GP - 소설
|
| |
|
|
| |
| |
| |
본 소설은 http://www.korea-dongpo.org/soneus/writing/gp.html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개인 창착입니다.
*******************************************
GP
06:00. 기상 나팔소리.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해는 아침마다 일찍 얼굴을 들이민다. 겨울에는 칠흑같은 어둠이지만 4월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어둠이 아니라 밝은 빛의 세상이다. 2년째 들어 이제는 듣기조차 소름끼지는 기상나팔 소리는 어김없이 확성기를 통해서 전 GP에 울려퍼진다. 상황실에 걸린 시계는 12시에서 5도 오른쪽으로 가 있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다. 지루하고도 따분한 GP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상황병에게 커피 한잔을 시켰다. 졸다가 일어난 상황병은 얼굴에 침이 묻은채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중대본부에 정수기가 나왔다는데 여기까지 보급이 오려면 아직은 멀었다. 아니 GP에서 무슨 정수기를 생각하나. 꿈같은 소리이다.
모닝커피. 결혼하면 이런 대접 받고 산다는데, GP에서 이런 대접이니 참 행복한게 아닐까 싶다. 상황병에게 어제밤 상황을 정리시켰다. 오늘 중대장에게 보고하려면 미리부터 정리를 해 두는 것이 편할 듯 했다. 커피잔을 들고 상황실을 나섰다. 일조점호를 위해서 내무반에서 나온 소대원들이 정렬해 있었다. 귀여운 녀석들. 나야 직업이지만 이 놈들은 무슨 팔자에 이런 섬아닌 섬에 갖혀서 사는 것인지. 일직하사가 보고를 한다.
"보고드리겠습니다. 단결!"
"단결, 보고하라"
"xxxx년 x월 x일 O소대 아침점호 인원보고 드리겠습니다. 총원 OO명, 사고 무, 현재원 XO명, 열외 O명, 열외는 취사 X, 초소근무 X, 상황근무 X, 이상 보고자 외 OX명 점호준비 이상없습니다. 단결!"
"단결."
지극히 정상적이다. 뭣하나 변동도 없고 뭣하나 바뀐 것도 없다. 아마 이들이 GP근무 교대를 하기까지 매일 이럴 것이다. 아니 계속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 창창한 젊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우리뿐만 아니라 저쪽의 애들까지도.
"그래. 이상이 없구나. 자, 그럼 xxxx년 x월 x일 아침 점호를 본 사관이 취하겠다. 소대, 전방을 향해 힘찬 함성 오초간 실시."
"아아아아아아아아."
"함성소리가 작다. 다시 3초간 강하게 실시."
"아아아아아아아아."
"구령 조정 3회 실시"
"열중 쉬어! 소대 차렷! 뒤로 돌아!"
"좋아. 반동 준비."
"엇!"
"반동은 좌우 반동. 반동 시작. 하나, 둘, 셋, 넷. 반동간에 군가한다. 군가는 행군의 아침. 힘차게 저쪽 애들이 소리듣고 잠이 확 깨도록 한다. 군가 시작."
"동이 트는 새벽녘에 고향을 본 후..."
"군가 그만. 반동 그만. 전체 차렷. 자, 고향예배를 실시한다. 전체 우향 우. 묵념."
고향에 대해서, 부모님에 대해서, 이들 소대원들은 진지하게 고민을 할까? 이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저쪽에 있는 애들도 고향과 부모를 버리고 이 곳 섬 아닌 섬에 와 있다. 일촉즉발, 여차하면 총격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이 곳에서 아침마다 고향을 향해 부모님을 향해 머리 숙여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건 아이러니이면서 한편으로는 가슴 한쪽을 쓸어 내릴 수 있는 다행이다.
"바로. 좌향 좌. 애국가는 3절. 애국가 시작."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
"자 본 사관이 복무신조를 선창할테니 따라하기 바란다. 복무신조!"
"복무신조"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우리는 ..."
...
"점점 날이 길어지고 수풀이 울장해지고 있다. 이럴수록 적 침투가 용이하니 경계근무를 철저히 하고 시야 확보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오늘도 하루 일과 차질없이 진행하고, 사고 없이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한다. 이상 점호 끝."
"소대 차렷. 단결! 점호끝."
"단결"
모닝커피는 식었다.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상황실에 들어서니 상황병이 쳐다본다.
"무슨 일 생겼냐?"
"전방 초소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위쪽 애들이 내려오는게 아닐까 합니다."
"머야? 자세하게 보고해봐."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수풀이 미묘하게 흔들렸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짐승이나 사람에 의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규모가 대충 분대급 정도 된다고 합니다."
"지금은 어떻다는 거야?"
"들어오시기 전에 움직임이 없어졌는데 주시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흠. 아침부터 지랄이군. 근무교대자에게 위치 알려주고 주시하라고 하고 계속 지켜보고 무슨 일 있으면 즉시 보고하라고 해."
"예"
"중대에는 내가 직접 보고 하겠다. 상황 정리된 것 이리 주고 이제 그만 들어가."
"예. 단결!"
"그래. 단결."
상황일지를 천천히 살폈다. 야간 초소 경계 근무자로부터 보고받은 몇몇 부분을 보니 아침에 일어난 이상 징후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02:00에 군사분계선 북측에서 약간의 징후가 있었고 그것이 점차적으로 군사분계선까지 내려온 것으로 짐작이 된다.
07:00 상황보고.
비화기를 들었다. 이때쯤이면 중대장님도 나와 계실 것이다. 상황병이 받았다. 중대장님을 요청했다.
"어. 중대장이야."
"단결! O17 GP장 소위 박**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야간에 북측에서 몇 가지 이상 조짐이 있어 보고 드립니다."
"어떤 거지?"
"02:00경에 군사분계선 북측에서 미묘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06:40 경 그 움직임이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짐승으로 추정하기에도 그 숫자가 많아 아무래도 분대급 정도의 적으로 추정됩니다."
"그래? 흠. 경계태세를 갖추고 계속 주시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상 조짐은 즉각 보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 외에 야간에 이상 있었나?"
"없었습니다."
"지내는데 어려운 점은 없나?"
"예."
"오늘 부식추진은 오후에 있을 예정이다. 출발하기 전에 통문에서 연락할 것이니 맛있게 먹도록, 박소위. 그럼."
"예. 단결!"
07:10 아침 식사.
상황보고를 끝내니 아침을 빨리먹은 상황병이 돌아왔다. 같이 밤을 샌 녀석은 내무반으로 자러 가고 밤새 충분히 잔 원기 왕성한 녀석이 올라왔다.
"단결!"
"어. 그래. 오늘 조짐이 좋지 않으니까 경계초소에 주의를 주고 군사분계선 부근을 계속 살피라고해. 그리고 이상 있으면 보고하고."
"예. 알겠습니다."
"난 밥먹고 오마."
"예. 알겠습니다. 단결!"
"참, 오후에 수색 있지? 누구누구 나가는지 조사해서 알려줘."
"예. 알겠습니다."
식당에 들어서니 벌써부터 한창 밥을 먹고 있다. 군단 정보병 애들도 밥먹으러 왔고 포병 관측장교도 눈에 띄인다. 오전 근무는 내가 서지 않아도 될 것이다.
"최소위. 잘 잤어?"
"어. 박소위. 간밤에 수고했다."
"여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썰렁하다야. 밤에 좀 춥더라."
같은 기수라서 친한 면도 있지만 최소위 이 녀석은 많이 털털해서 잘 어울렸다. 더구나 같은 GP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포병은 힘들다는데 포병학교에서도 잘 지냈다니 고립무원의 GP에서 여간 고마운 놈이 아니었다.
식당은 그다지 크지 않다. 기껏해야 20명이 오밀조밀 앉을 수 있는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취사병 녀석이 어떤 놈이 오는 가에 따라서 밥이 먹을만한지 아니면 고역인지가 결정되는데 우리 GP는 그나마 다른 GP보다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번 검열때도 타 GP를 제치고 위생분야에선 으뜸이었고 검열관들도 맛있다고 했다. 문제는 부식이 제때에 오지 못하면 이 취사병도 속수무책인 것이다. 그나마 지금은 바깥에서 나물도 좀 구해오거나 안에서 좀 심어 놓은 야채가 도움이 된다.
"박소위. 나 근무 간다. 잘 자고 점심때 보자."
"그래."
우리 GP에선 이 취사병을 "주방장"이라고 부른다. 물론 음식이 맛있을때는 "주방장"이라고 부르지만 가끔씩 밥맛이 없을때나 반찬이 형편없을땐 "짬장"이라고 불러 애를 골탕먹인다. 그게 "짬장"의 잘못이 아니긴 하지만 친근함의 표시라고 봐야할 것이다. 오늘 아침 주방장의 요리솜씨는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쇠고기국과 깍두기, 계란찜, 오이무침, 그리고 주방장이 아침에 애써만든 부추김치가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내무반으로 돌아와서 애들이 펴 놓은 잠자리에 누웠다. GP에서 편하게 잔다는 건 있을 수가 없다. 언제든 위기 상황이 닥치면 뛰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은 상황이 좀 미묘했다. 피곤해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고 잠에 정신을 집중했다. 군사분계선 근처의 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큰 무리가 없는 한은 괜찮을 거라 여겼다.
10:50 돌발사태.
몽롱한 상태, 꿈 속이다. 총을 들고 헤매고 있다. 수색을 하고 있다. 작전 지역인 듯 한데 어디서 본 기억은 없는 산과 나무이다. 선두 조가 앞에서 통로를 개척하고 있으며 나는 본대 속에서 앞쪽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이윽고 앞쪽에서 정지신호가 들어왔다. 앞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부분대장이 수신호로 전방에 적의 조짐이 보인다고 표시했다. 선두조와 함께 본대로 들어왔다. 수색대원들을 모아서 조용히 매복형태로의 전환을 명했으며 매복 위치는 우측 언덕이라고 지시했다. 선두조는 좌측 나무 숲 아래로 가게 했다. 신속히 매복을 끝내고 나서 전방을 주시했다. 예상대로 적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소대 병력 정도였다. 전방 50m까지 오기를 기다렸다. 다들 긴장을 했는지 총을 고추 잡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긴장이 될 것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덜떨 떨리기는 다른 녀석들과 매한가지였다. 훈련받은 대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사람을 쏴 본 적이 없었다.
어쨌건 적들은 다가왔고 대략 50m까지 왔다. 바짝 얼었다. 총을 잡은 손이 떨렸다. K-1 소총이 이토록 부담스럽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내가 긴장하면 애들도 얼어버린다. 긴장을 풀고 총을 제대로 잡고 겨냥을 했다. 내 일발에 저 놈들 모두가 쓰러질 것이다. 제일 처음에 오는 놈을 겨냥했다. 인민군 하전사였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면서 오고 있었다.
별안간 들려온 총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명령도 없이 누가 총을 쏜 것인지 의심스러웠지만 그 총소리는 아군의 총소리가 아니었다. AK이었다. 좌측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선두조가 당하고 있었다. 급히 사격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아군은 이미 적에게 노출된 상태였다. 뒤쪽에서도 적이 있었다. 완전히 당했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일어나십시오. 소대장님. 일어나십시오."
"으응? 머야."
"상황실에서 관측장교님이 찾으십니다."
"무슨 일인데. 몇시야?"
"11시 10분 전입니다."
"아이씨. 자는 거 깨우고 그래."
꿈이었나보다. 상황병이 깨우는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수색중에 뒷총을 맞다니. 찜찜하다. 오후에 수색이 있는데.
상황실에 들어섰을 때 불평할 상황이 아닌 듯했다. 최소위의 얼굴은 바짝 긴장한 상태였고 초소와 연결된 전화기와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 상황병은 중대본부와 계속 통화하면서 받아 적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박소위. 상황이 좀 묘해. 아까 낮에 말한 그 조짐이 말이야."
"더 내려왔어? oo야. 커피한잔만 줘."
"군사분계선에선 더 안 내려왔는데, 주변으로 퍼지고 있어. 초소 근무자 이야기로는 분대급에서 소대 정도 규모래. 그리고 조금 전 상황으로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군."
"흠. 중대 본부에는 보고했나?"
"예. 적 규모와 적 위치가 변동이 있다고 보고 했습니다."
상황병이 건네는 커피를 받아들고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이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꿈도 꿈이거니와 이 정도 움직임이면 예사도발은 아닌 듯 했다. 우선은 사태를 파악해보고 그 결과를 가지고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이봐 최소위. 내가 전방 초소에 한번 가보고 올테니 좀 더 지켜봐줘."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단독군장을 챙겼다.
11:00 전방 관측 초소.
연결 통로를 통해서 전방 초소로 갔다. 근무자 2명이 계속 전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콘크리트 초소는 날씨가 더워지면서 오전에는 시원한 바람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단결!"
"단결. 수고가 많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가?"
"예. 저쪽 앞입니다.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좌우로 갈라져서 서서히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근무자는 병장과 일병이다. 이 정도면 알만큼은 다 알만한 놈들이다. 경험도 나보다 많아서 쉽사리 요동칠 놈들이 아니다. 이 놈들이 어느 정도 긴장할 정도면 사태는 정말 평상시보다 긴박하다는 뜻이다.
쌍안경으로 전방을 살폈다. 우리 GP는 다행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내려다 보는 풍경이다. 그래서 적들이 움직이면 우리쪽에서 먼저 관측할 수가 있다. 마른 고목들 사이로 수풀이 어느정도 자라기 시작했는데, 마침 큰 바람이 없는 날이라 주변은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다. GP의 정북쪽을 바라다 보니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반경 5m 안에서 수풀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씩 둘씩 좌우로 갈라져 내려오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이 정도의 움직임이 없다. 아니 이렇게 움직이면 들킨다는 걸 뻔히 아는 상황이다. 내 얼굴이 긴장으로 살짝 굳어졌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계속 주시해. 상황실에 가 있을테니까"
"예. 단결!"
경례도 받지 않고 통로를 따라 상황실로 갔다.
11:10 상황실.
"라지트반에 전화해서 물어봐. 적들 흔적이 있는지. 그리고 비상을 걸어라. A급 경계태세 발령해."
"예."
"최소위. 애들 배치상태를 좀 점검해주겠나. 그리고 실탄 분배도 부탁하네."
"그러지."
"난 중대장님하고 통화를 좀 해봐야겠어."
비화기를 들었다. 한번 심호흡을 했다. 이런 상황이면 교전까지도 각오를 해야 한다. 비무장지대 안에서의 교전이면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르다. 부모님 얼굴이 살짝 스쳐갔다.
"상황실? 중대장님 바꿔라."
"어. 중대장이다."
"단결! O17 GP장 소위 박**입니다."
"그래. 상황 변화가 있나?"
"평상시 적 활동이 아닙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였는데, 분대규모가 아닙니다. 적어도 소대 규모이며 아니 그 이상도 될 것 같습니다."
"적 숫자를 확인했나?"
"현재 라지트반에 연락해서 어느 정도 규모인지 의뢰를 했습니다. 저희 GP 정북 방향으로 좌우 15도 안쪽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래?"
"ASIC에 확인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현재 저희 GP에 비상 경계태세를 발령하여 실탄 지급 한 후 대기중에 있습니다."
"흠. 알았다. 계속 움직임을 주시하고 이상 유무를 점검하여 연락하도록. 사단에 직접 보고하고 조치사항을 기다리겠다. 그리고 만일 소총으로 사격해올 시 대응사격은 자제하고 있도록."
"빠르게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로는 전방 200m선입니다. 150m 전방에 오면 다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그때 응사 유무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박소위. 긴장이 되더라도 애들 관리 잘하고, 아무 일 없을거라고 생각해. 알았나?"
"예. 단결!"
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시계를 보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을 했는데 뜻밖에 긴장할 일이 나타난 것이다.
상황병이 라지트반에서 돌아왔다.
"소대장님. 사람입니다. 아니 인민군입니다."
"흠. 라지트반은 군단으로 보고했나?"
"예. 식별이 이제 끝나서 보고 했답니다."
"지랄. 우리한테 먼저 알려야 할 거 아냐."
"..."
"너도 군장해. 그리고 실탄도 지급받아와. 가는 김에 내 것까지 받아와."
"예."
교전 규칙에 따라서 총을 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면 조용히 넘어가야 한다. 암묵적으로 침묵이 흐르던 비무장지대에 서서히 떨쳐버릴 수 없는 긴장이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긴장이다. 마치 "Das Boot"의 잠수함 안과 같다. 우리로서는 지원을 기다릴 수도 있지만 제일 먼저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중대나 연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최소위가 왔다.
"왔다. 요소요소에 배치시키고 실탄 확인하고 경계태세까지 확인하고 왔다."
"고생했다. 애들이 많이 긴장하고 있지?"
"그렇지 뭐. 그래도 고참 병장들이 잘 다독이니까 그리 얼어 있지는 않아."
"라지트 애들이 확인했는데, 사람이 분명하단다. 적이지. 규모면에서 봤을때는 소대 병력이야."
"일상적인 것은 분명히 아닌데. 도발인가?"
"그럴 수도 있지. 하필이면 우리 GP앞에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군. 큰 싸움이 되면 안되는데."
"그러게. 애인 얼굴 못보고 죽는 건 억울하잖아."
농담 따먹기 속에도 고뇌는 녹아 있다. 매번 경계태세 갖추는 일을 많이 하다보니 이제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긴장이 크다.
"최소위. 나 애들 좀 둘러보고 올테니 상황실 좀 봐줘. 중대장님 전화 올지도 모르니 전달 사항 잘 적어두고."
"그래. 너도 긴장 풀어."
상황실을 나와 연결 통로를 거쳐 우측 관측 초소로 갔다. 몇마디 말을 해 주고 긴장을 풀었다. 요소요소에 있는 애들을 만나서 한마디씩 해주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다들 몸이 굳어 있었다. 별 일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나 역시도 그들처럼 긴장해 있는 걸.
라지트반으로 향할까 하다가 상황실로 발길을 돌렸다. GP에서 유독 치외법권처럼 굴던 곳이라 가서 말하기가 싫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열심히 하겠지.
상황실에 들어서니 최소위가 긴장한 얼굴이었다.
"중대장님 전화가 왔었네."
"머라셔?"
"심상치가 않다는 군. 걔네들 훈련도 없고 일상적인 수색도 아니라는 거야."
나 역시도 긴장을 했다. 도발이다.
"중대장님이 교전규칙에 따라서 하라고 하셨다. 승인이 떨어졌다는군."
"흠."
짧게 뱉어냈다.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전투가 되는 것이다.
11:50 전투식량.
맛있는 점심은 없다. 비상 경계 근무이다 보니 별 수 없이 비상식량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3분 카레처럼 끓는 물에 데워서 먹는 밥과 반찬이다. 찜찜한 기분은 나뿐만이 아니다. 애들도 전투식량을 먹으면서 괴로울 것이다. 조금이라도 편하고 싶지만 마음은 언제나 부담에 쌓여 있어야 하는 군인이다.
GP는 유사시에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죽는다고 봐야 한다. 적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적의 진출을 저지해야 하는 최전방의 외딴 섬과 다를 바 없다. 준 전시 상태인 이 곳이 오늘은 전시상태가 될 것 같다. 혹시나 이 점심이 마지막은 아니길 바라면서 허기진 상태는 아니지만 꾸역꾸역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식판에 먹는 밥조차도 부담스러운데 전투식량은 모래를 씹는 듯 하다.
다 먹고 나서 다시 애들의 상태를 알아보러 갔다. 이런 때에 격려를 하지 않으면 나나 애들이나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나도 애들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셈이다. 믿음직한 그 놈들을 보면서.
12:50 조짐.
전방 초소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군사분계선을 정점으로 좌우로 펼친 적 진영이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상황실에서 보고를 들었을 때 마치 그림처럼 그들이 내려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나타났다. 이 놈들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내려오고 있다. 먼저 도발을 하고 총을 쏘게 만들어서 마치 우리가 먼저 침략할 기회를 제공한 것처럼 만들려는 것이다.
각 분대장들을 지휘통제실로 불렀다. 3개 분대의 분대장들이 왔다. 전방에서만 거진 2년 가까이 산 놈들이다. 이곳의 생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잘 알고 있는 놈들이다. 1분대와 2분대는 앞쪽을 맞고 있었고 3분대는 지휘통제실을 중심으로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단결! 부르셨습니까."
"어, 그래. 선 채로 들어라. 갑작스런 비상이라서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A급 경계태세인 건 알고 있지?"
"예!"
"너희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현재 우리 GP 앞쪽 분계선에서 움직임이 있다. 이미 중대에 보고했고 교전규칙에 따라서 응사해도 좋다고 중대장님이 지시하셨다."
분대장들은 그다지 굳어지지 않았다. 이등병 시절부터 수없이 겪어온 일이라서 이번에도 일상사로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 노련하고 대담한 녀석들이라서 그럴 것이다.
"부소대장도 없는 판국에 나와 너희가 최대한 이번 기회를 잘 헤쳐나가야 할 거 같다. 12시 방향을 중심으로 왼쪽은 1분대가 오른쪽은 2분대가 맡고 예비로 3분대가 여차하면 밀리는 곳을 맡기로 하자."
"저, 소대장님."
"그래. 뭔가?"
"측면과 뒤쪽은 어떡하시겠습니까? 걔네들 하는 걸로 봐서는 앞만 위협할 거 같지는 않습니다. 대비책을 준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좋은 생각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그래 그럼 3분대를 후방과 측면에 넓게 배치하도록 하면 어떨까. 1분대와 2분대는 자신있나?"
"할 수 있습니다. 소대장님."
"그래. 그럼 각 분대장들은 위치로 이동하도록. 적이 보이면 우선 보고하고 조치를 받도록."
3분대장 녀석이 후방과 측면을 이야기했을 때 일순 꿈 생각이 났다. 부소대장이 있었다면 애들이 덜 불안했을 듯한데 갑작스런 집안일로 인해 GP를 비운 사이에 일이 일어났다. 분대장 녀석들이 보기엔 내가 그저그런 소대장으로 보이니까 아무래도 부소대장이 의지가 많이 될 건데.
최소위가 들어왔다. 아마 대대에 연락을 했을 것이다.
"GOP쪽에서도 난리인가봐. 비상인건 당연한 거고, A급 경계태세에 잔뜩 긴장하고 있어. 큰 일이 벌어질 건지 알기는 아는가봐."
"흠."
"사단 사령부도 난리났겠지."
"그렇겠지. 최소위."
"응?"
"우리... 잘 할 수 있겠지? 별 일 없겠지?"
"그래. 별 일 없을거야. 없겠지."
14:10 긴장
1분대장이 긴급히 보고를 해 왔다.
"소대장님, 전방 400m 지점에서 소대 규모가 사격 자세를 취한 채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수화기를 든 상태에서 나는 잠깐 얼얼해졌다. 드디어 시작인가.
"언제부터인가?"
"확인하자마자 바로 보고 드립니다. 엄폐를 한 상태로 우리측에 사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중화기는 있나?"
"기관총이 약 4정 정도 확인되었습니다. 무반동총이나 로켓포는 보이지 않습니다. 약 40m 간격으로 퍼져 있습니다. 와서 확인하시겠습니까?"
"알았다. 곧 가겠다."
급히 총을 챙겼다. 총알이 가득한 탄창을 삽탄했다. 철모를 썼다. 지금은 유난히 철모 똑딱이 소리가 크게 들린다. 쌍안경을 집어들었다.
"상황병, 중대본부에 연락해서 적들이 사격 자세를 취했다고 보고해라. 그리고 나는 확인하고 오마."
"예!."
"최소위, 혹시 모르니."
상황 변경에 나만 놀란 것은 아니다. 최소위도 총을 집어들었고 장전을 하고 있었다.
"그래. 갔다와."
말을 잇지 않았다. 통로를 따라서 앞쪽으로 갔다. 가는 길에 각 초소에 있는 애들 어깨를 다독였다. 힘을 불끈 쥐어 주었다.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말이 필요가 없을 듯 했다.
1분대장이 있는 곳에 이르니 1분대장이 망원경으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를 짚었다.
"어때?"
"아. 단결."
"응. 지금 어디 있니?"
분대장은 손가락을 앞쪽으로 내밀었다. 분대원 하나는 M60을 전방으로 겨눈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방으로 11시와 1시 사이에 있습니다. 왼쪽 능선 보이십니까? 능선 아래 바위 비슷한 곳부터 오른ㅤㅃㅘㄶ으로 마른 풀이 쭈뼛쭈뼛 올라와 있는 게 적입니다."
1분대장이 말한 곳에는 예측대로 인민군이 있었다. 정상적인 수색 작전이 아니다. 저 정도 규모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왔다면 도발인 것이다. 쌍안경으로 400M전방에 있는 인민군을 보았다. 철모에 위장용 풀과 나뭇가지를 꽂고 AK소총을 우리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흠."
쌍안경을 내리면서 오른쪽에 있는 2분대장을 불렀다. 이윽고 2분대장이 왔다. 두 분대장을 앞에 두고 나는 교전규칙을 읽듯이 말했다.
"내려 오거나 먼저 소총 사격을 해 오면 응사한 후 보고하도록. 그리고 중화기 공격이 있으면 즉각 보고하도록. 알았나?"
"예!"
"자. 각자 위치로."
분대장들이 제대로 날 믿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내가 읽듯이 말했다는 걸 알 것이다. 아니 그들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건 나는 그들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상황실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나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셈이다.
상황실에 돌아오자마자 중대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중대장님 부탁한다."
"예!"
"중대장이다."
"단결! O17 GP장 소위 박**입니다."
"그래. 어때?"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엄폐한 상태에서 우리쪽을 향해 총을 겨눈 상태로 있습니다. 중화기는 기관총 4정이고 나머지는 소총입니다. 아직 다른 중화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에 병력은 더 없었나?"
문득 떠 오른 것이 있었다. 후방. 3분대가 지키고 있는 후방쪽. 아직 확인을 해 보지 않았다. 적이 내려왔다는 조짐이 꽤 많이 지났다. 이 시간 정도면 뭔가 있는 것이다.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머야! 빨리 확인하고 다시 보고해!"
얼떨떨했다.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단결!"
"그래!"
15:00 뒤통수치기
중대장과의 통화 후 최소위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 겨를도 없었다. 후방쪽을 지키고 있는 3분대장에게 빨리 달려갔다. 후방에 있어야 할 3분대장이 보이지 않았다. 초소에 있는 부분대장에게 물어보았다. GP 동쪽 초소로 갔다고 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우다니. 갑자기 화가 났다.
다시 통로를 타고 동쪽 초소로 갔다. 3분대장이 쌍안경으로 뭔가를 관측하고 있었다. 조금은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이봐. 3분대장!"
3분대장은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표정이 자뭇 놀란 상태이다. 그러나 표정을 고치고 내게 경례를 붙였다. 괘씸했다.
"단결!"
"그래. 자리를 안 지키고 여기 왜 있나?"
"안 그래도 보고 드릴려고 했었습니다. 저쪽을 보시겠습니까?"
3분대장이 보여준 것은 땅 바닥에 바짝 엎뜨려서 조금씩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인민군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얼추 소대규모는 되는 듯 했다.
"서쪽 편에서도 서서히 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앞쪽은 아군의 시선을 집중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전방으로 시선을 집중 시킨 후 후방에서 약 2개 소대 병력이 집중 공격해 올 기세였습니다."
"으음."
"어떡하시겠습니까?"
내 지시를 물어 보고 있었다. 3분대장은 좀 전에 화를 낸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묻고 있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나는 무슨 지시를 내려줘야 한다.
머리 속에는 상황을 떠올려 여러 가지 가정을 해 보고 있었다. 먼저 발포한다, 수색해서 추격한다, 후방에서 지원을 받는다, 공격해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지원을 받는다, 공격해 올 때 최선을 다해서 물리친다, 그러나 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했다.
"어떻게 할까?"
한참 생각하다가 3분대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젠 되려 내가 3분대장의 눈치를 살피게 된 것이다.
"오히려 뒤통수를 쳐야죠. 확실히 말입니다."
"어떻게?"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16:10 기발한 생각
다시 상황실로 돌아왔다. 3분대장이 제안한 방법을 실천하기에 앞서 중대장님게 보고를 해야 했다. 최소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괜찮더냐?"
"아냐. 역시 GP 좌우측으로 적이 내려오고 있었어. 중대장님께 보고하고 난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중대장님이 바로 받으셨다.
"단결! O17 GP장 소위 박**입니다."
"그래. 어때? 후방도 살펴봤어?"
"예. 좌우로 각 1개 소대씩 철저히 위장한 채로 남하중이었습니다. 현재는 GP선 좌우까지 내려오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허. 역시 그랬군. 애들 상태는 어떠한가?"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궁금했다. 나조차도 마음이 흔들리는데 어떻게 애들이 굳건히 있단 말인가.
"교전 규칙에 따라라. 총격전이 벌어지면 GOP쪽에서 응사할 것이다. 사단에서도 지원을 해 주겠다고 했다."
"예. 단결!"
전화를 끊었다. 자칫 잘못하면 저들이 전화선도 끊을지 모른다.
중대장님은 몸을 사리고 있다. 아니 우리가 희생될 지도 모른다. 교전규칙에 따르면 되겠지만 인민군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우리쪽으로 총을 쏴대고 심하면 포까지 퍼부을지 모른다. 그놈의 교전규칙을 따르다보면 희생은 우리쪽에서만 생길 게 뻔한 일. 결국은 3분대장이 제안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분대장 3명을 불렀다. 그리고 최소위도 같이 앉혔다.
"지금 상황이 엉망이다. 뒤쪽에선 조용히 넘어가 주기를 바라지만 인민군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단에선 우리쪽 희생과는 상관없이 비무장지대쪽으로 총을 쏘고 싶어하지않는 듯 하다. 그래서!"
넷을 돌아보면서 말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이 판국을 조용히 사고 없이 넘어갈 방법을 써야 할 거다!"
1, 2분대장은 의아해하면서 나를 쳐다 보았다. 최소위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을 알고 있는 3분대장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3분대장, 설명하지."
기다렸다는 듯이 3분대장은 나머지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수풀에 숨어있는 족제비를 쫓아 내려면 시위를 하는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앞쪽의 적은 우리가 뒤쪽에 숨어든 적을 모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앞쪽의 적에게는 뒤쪽에 적이 있다는 점을 우리가 알아챘다는 사실을 말해줌과 동시에 뒤쪽의 적에게는 앞쪽이 이미 당했으니 되돌아 가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좋은 내용이다.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그렇게 알릴 수 있을까? 우리측에서 총소리를 내면 전투가 시작될텐데 말이야."
최소위가 물었다. 우려하는 것은 우리측 책임으로 인해서 교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확성기로 알릴 수도 없잖아. 그런 걸로 저쪽 애들이 겁먹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최소위가 정확히 지적을 했다. 그러나 3분대장은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말을 계속 이었다.
"바로 그 점입니다. 확성기를 사용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방송하는 것으로 알고 앞과 뒤의 적은 서로 안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명탄과 연막탄, 그리고 공포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걸로 어떻게?"
이번에는 두 분대장이 의아해했다.
"먼저 연막탄을 전방의 적과 측면의 적 사이에 쏘고 그 상태에서 공포탄을 쏩니다. 그렇게 되면 연막탄에 차단된 적은 서로가 공격받는다는 착각에 빠질 것이고 가장 남쪽으로 내려온 애들이 불안해서 후퇴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적이 동요하는 기세가 보일 때 조명탄을 10여 발 정도 쏩니다. 그렇게 되면 후방측에서도 공격을 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우리 앞쪽에서 버티고 있는 애들도 위로 올라갈 거라 생각합니다."
이에 내가 3분대장의 말을 덧이었다.
"난 여기서 두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어. 우선은 연막탄과 조명탄, 공포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교전규칙을 어기는 일이 되지 않을 것이고, 그 다음은 이 일을 우리가 빨리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뒷짐쥐고 있는 우리 뒤쪽 윗분들을 이 일에 좀 더 적극적으로 끌어 들여서 빨리 해결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가능할까?"
"우리가 얼마나 훈련이 잘 되었는가에 달리지 않았을까?"
16:50 작전 개시
최소위가 연막탄과 조명탄을 쏘게 하고 내가 공포탄 사격을 지휘하기로 했다. 3명을 차출하여 최소위에게 배당을 했다. 상황실에서 연막탄과 조명탄 사격 시간을 지시하기로 하고서 최소위 일행은 GP 가운데로 갔다.
시각을 보았다. 17:00. 전투가 벌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있어도 소총 선에서 끝나야 한다. 사격을 하더라도 우리쪽에서 먼저 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목이 바짝 탔다.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저들이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여줘야 적이나 우리가 피해없이 이 사태를 넘어갈 수 있다.
수화기를 들어 최소위에게 연락했다.
"시작하자"
"그래!"
연막탄을 쏠 것이다. 북쪽을 보고 좌우 각각 30도 되는 지점에 연막탄을 쏴서 우선은 시야를 흐리게 할 것이다. 연막탄 발사 소리가 들렸다. 17:00이면 그래도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가고 있는 찰나다. 해가 지고 있으니 연막탄의 효과는 클 것이다. 더구나 바람도 그다지 불지 않는다. 연막탄의 효과가 클 것이다.
시계를 보고 있다. 터진 연막탄이 시야를 가릴 정도의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어느 정도로 반응을 보일 지가 궁금했다.
1분대장에게 연락을 했다.
"소대장인데, 반응이 어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연막탄의 효과는 어때?"
"양쪽에서 터져서 서서히 퍼지고 있습니다."
"흠. 계속 지켜보고 이상 조짐이 보이면 알려줘."
"예. 알겠습니다."
초조하다. 반응이 없다니. 예측이 빗나간 것일까?
문득 머리에 스치는 생각. 행여 이 연막탄이 시야를 가려서 저쪽이 예정보다 빨리 공격해 오지는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아니다. 행여 만일 그렇게 된다면 GOP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자위하고 싶다. 그래야 한다.
수화기를 들었다.
"최소위, 연막탄을 좀 더 쏴."
"효과가 없어? 흠. 알았다."
좀 있으니 다시 연막탄을 쏘는 소리가 들렸다. 17:10. 목이 마른다. 입안에 침이 고인다. 삼키면 그만인 것을.
뒤쪽에 수화기를 돌렸다.
"소대장인데, 반응이 어때?"
"약간 동요가 있습니다. 소대장인지가 애들 두엇 데리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 흠. 그래. 알았다. 지시 기다리도록."
수화기를 내렸다. 사르르 손이 떨렸다. 드디어 반응이 나왔다. 약간은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심호흡을 하고 상황병을 불렀다.
"공포탄을 최소위한테 전달해라."
"예!"
상황병이 공포탄 박스를 들고 최소위에게 달려갔다. 공포탄이 효과를 발휘할까? 연막탄만큼 효과가 아니 연막탄 이상으로 효과가 나야할 것이다. 갑자기 딸딸이가 울었다.
"소대장님. 1분대장입니다."
"어. 그래. 무슨 일이야?"
"동요가 있습니다. 무전을 치는 것인지 아니면 회의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셋 정도가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 흐음. 알았다. 계속 지켜봐."
"예!"
동요하고 있다. 드디어 동요하고 있다. 이때 공포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연사를 하고 있다. 상황병이 돌아왔다.
"전달하고 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제 저쪽에서 빠져주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어느 한쪽을 공격하는 것으로 느낄 것이다. 그래. 너희도 빠지고 우리도 피해없고. 문득, 저쪽 GP가 생각났다. 수화기를 들었다.
"1분대장. 저쪽 GP는 어때? 움직임 있나?"
"예. 확인해보겠습니다. 우리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아, 기관총도 우리쪽으로 향해 있습니다. 소대장님! 무반동총도 우리쪽으로 향해 있습니다."
예측을 하지 못했다. 난처한 일이다. 저들이 후퇴할 때 저쪽 GP가 지원사격을 한다면 문제가 된다. 고민이다. 공포탄으로 인해서 후퇴하지 않고 공격을 해 오면?
공포탄 사격은 이미 끝이 났다. 이제 저들의 반응을 봐야 한다. 이미 계획은 섰다. 실행을 계속 하자.
"상황병. 최소위한테 조명탄!"
"예!"
수화기를 들었다. 3분대장을 불렀다.
"소대장이다. 어때?"
"공포탄 소리를 듣더니 동요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 후퇴할 거 같습니다. 아. 소대장님. 조금씩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금은 안심이 된다.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이제 저들에게 가속을 줘야 할 것이다.
"알았다. 3분대장. 계속 지켜봐라."
"예!"
이제는 조명탄 차례다. 벌써 17:25. 시간은 왜 이리 빠르게 흐르는 것일까. 실상 그 시간 속에서 속타는 우리들 마음을 알 수 있으려나.
조명탄 쏘는 소리가 들었다. 이젠 확실히 쫓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교회의 종소리요 절의 범종소리일 것이다.
갑자기 딸딸이가 울렸다. 상황병이 받았다.
"소대장님. 중대장님입니다."
"단결! O17 GP장 소위 박**입니다."
"야이. 미친 XX야. 너 지금 머하는 거야?"
수화기를 통해서 중대장의 욕설이 쏟아졌다. 실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총알같았다.
"너 이 XX야. 지금 전쟁일으키고 싶냐? 왜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 야이 XX야. 만일 너 이 상황에서 전쟁일어나면 총살이야. 총살!"
"중대장님. 그게 아닙니다. 이건 위협을 통해서 적을 몰아내자는 겁니다."
"시끄러! 너네 GP 때문에 지금 사단이 난리난 건 물론이고 전 군단에 비상이 걸렸어. 곧 군사령부까지 비상 걸릴거란 말이야!"
뜻밖이었다. 그렇게 효과가 크게 나타났단 말인가?
"중대장님. 해결할 자신이 있습니다. 이미 내려와 있는 적이 서서히 북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북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중대장은 다소간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뭐? 북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도대체 무슨 수작이야 너?"
"연막탄으로 적 간의 공간을 차단하여 연결을 끊고 후퇴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에 공포탄으로 위협을 하고 조명탄으로 적을 뺑소니치게 만드는 작전입니다."
차근차근 설명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걸 설명해야 한다. 중대장이 일단 수긍하기만 하면 방패막이가 되어 줄 것이다.
"흠. 그 정도로 움직이냐? 좋아. 진행해 보고 경과는 수시로 보고해!"
"예. 단결!"
수그러졌다. 일단은 수긍한 셈이다.
조명탄, 조명탄은 어찌 되었을까? 중대장님과 통화를 하느라 바깥 상황을 놓쳐버렸다.
"상황병, 조명탄은?"
"예. 다 쐈습니다."
시계를 보니 17:35이었다.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3분대장에게 연락을 했다.
"소대장이야. 어때?"
"소대장님. 후퇴하고 있습니다. 엉금엉금 기어서 위로 가다가 조명탄이 터지니까 잽싸게 다들 지그재그로 뛰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머야? 그래? 양쪽 다?"
"동쪽에 있는 애들이 먼저 도망을 갔습니다. 서쪽편 애들은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조명탄 터질 때 놀래서 다들 북으로 뛰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일었다.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무사히 넘길 확률이 커졌다.
"그래. 끝까지 잘 살피고 혹시 남은 애들이 없는지 확인해."
수화기를 내리면서 뿌듯했다. 조명탄을 다 쏜 최소위가 애들 셋과 같이 상황실로 들어왔다. 결과를 알고 싶은지 긴급히 들어왔다.
"박소위. 어떻게 되었어?"
"우리 양쪽에 있는 애들은 올라가고 있단다."
"이야! 거진 성공이네."
"앞쪽도 알아봐야겠어."
다시 1분대장을 불렀다.
"1분대장, 어떤가?"
"동요 중입니다.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 소대장님. 움직입니다. 서서히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아. 드디어 끝난 셈이다.
18:40 저녁, 식당
밥이 좀 늦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긴장감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가슴이 아직도 덜덜하고 손과 팔에 힘이 남아 있다. 실로 엄청난 긴장이 아닐 수 없었다.
"어. 박소위. 오늘은 내가 근무설테니까 편히 자."
최소위가 밥 먹으러 왔다.
"부소대장이 없으니까 너까지 근무에 들어가게 되었구먼. 미안하이."
"아냐. 그나저나 본부에서 무슨 말 없었어?"
"왜 없었겠어. 중대장이 난리났었지. 그래도 잘 넘어갔으니까 아무말 없더군."
"사단 사령부에선 머래? 아까 사단장님 연락 온 거 같던데."
"장난 아니었지. 사단장님이 그렇게 칭찬하는 건 처음 본 거 같았어. 머 상하나 주지 않을까 싶네."
"그래? 이야. 잘 되었네."
"어? 왜 그래. 너도 포함되는거야."
"야야. 나는 소대장이 아니잖아. 난 되었다야."
"무슨 소리야. 이건 우리 모두가 한거잖아."
"어쨌건 잘 끝났다. 다행이야."
"그러게. 어쨌건 오늘 근무 부탁한다."
"그래. 아침에 보자구."
20:00. 내무반.
"단결!"
"어. 단결, 모두 편한 자세에서 듣도록."
앉아 있는 녀석들을 돌아 보았다. 지친 하루라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참 길었지? 그래도 큰 일 안 내고 하루를 넘겼다. 오늘은 특히 네 녀석들이 자랑스러웠다."
"에이. 소대장님도."
장난기 섞인 야유가 나왔다. 이제 긴장이 약간은 풀어졌으리라.
"오늘 상황은 너희들도 알다시피,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어. 본부에선 그냥 적당히 대처하라고 했지만 병력이 우리 GP를 거의 포위하다시피 싸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전쟁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적 동향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아마 내일쯤 본부에서 전문이 내려올 거 같으니 그건 내일 알려주도록 하겠다. 어쨌건 오늘 하루 수고했고, 편히 자도록. 텔레비전 너무 오래까지 보지 말고 말이야. 알겠나?"
"예!"
"그래, 그럼 편히 쉬어."
"단결!"
22:00. 취침 나팔 소리.
오늘 일어난 일을 일기에 적고 나서 잠시 벽을 보고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취침 나팔 소리가 들린다. 또 이렇게 하루가 흘렀다. 이 곳 섬 아닌 섬에서 하루는 무슨 의미인가. 생존인가 아니면 전쟁을 위한 대비인가. 긴장 속에서 자칫 느슨했다면 오늘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여기는 1시간도 채 못되어 적 포화에 초토화가 되고 마는 곳. 그래서 작전계획에 의하면 최초생존율 자체도 보장하지 못하는 곳이다. 비록 위쪽에서는 소모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 소모품들은 이 곳에서 인생의 황금기 청춘을 보내고 있다.
무사히 집에 가고 싶지 않은 자 누가 있을까. 내무반의 텔레비전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고 있다. 내일도 무사히 보내야 할텐데.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