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손은석

손은석

백조의 호수



	http://www.korea-dongpo.org/soneus 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도 아버지는 훈계하신다. 매번 듣는 소리지만 내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 있어 청각 기관을 통해서 머리까지 오지 못한다.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그냥 후계자 이어서는 안된다 아비가 이제까지 애써 이룬 이 집과 재산을 지키려면 ... 알았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잔소리를 계속 듣고 있노라면 내 머리가 계속 텅 비어버릴 듯 하여서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에 올렸다. 하얀색, 후륜 구동 4000cc 6기통 애마가 우렁차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휠스핀하는 소리가 주차장 내 다른 차들의 잠을 깨웠으면 했다. 고리타분한 집 구석. 갑갑한 철장 속을 거부하는 애마는 큰 길로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 나갔다. 강변 북로로 접어들어 통일동산쪽으로 향했다. 오늘 밤도 친구들이 나와 있으리라. 그래도 그들과 함께 하면 마음은 자유롭다. 오늘따라 별빛이 잘 보인다. 가로등이 고장나서 길은 어두웠다. 카메라 따윈 의식하지 않았다. 마음껏 밟아보리라. 오늘도 삼촌이 욕설을 퍼붇는다. 아직 안 내려왔다고 아래층에서 큰 소리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용주골에 들어온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누군지 몰라도 참 어색해 보인다. 진하게 눈화장을 하고 마스카라까지 하고 립스틱을 짙게 바랐다. 예뻐 보여야할 거울 속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 했다. 형광등 아래에 두평도 안되는 이 방에서 나는 다시 저 웨딩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오늘은 속옷도 입지 않은 채 저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었다. 계단을 서서히 걸어 내려오니 삼촌이 동생들을 훈계하고 있었다. 이제 좀 그만 잔소리를 하지. 가여운 동생들. 언니들은 다 병들고 늙었다고 쫓아 내면서 영계들 들인다고 온 저것들이 무슨 죄인가. 어린 나이에 가난이 죄인 게지. 여기서 입을 웨딩 드레스가 아닌데. 여기서 늙어갈 저들이 아닌데. 삼촌한테 그만 야단 치라고 했다. 나한테 빨리 내려와서 동생들을 관리하란다. 영업 시간 다 지나가도록 뭐하느냐 득달이다. 나도 빨리 영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 속에서는 빨리 나를 놔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저 동생들을 데리고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새벽 1시 통일동산. 자동차 배기음이 강 건너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 온갖 종류의 국산/외제 차가 마치 두 눈을 부라리듯 불빛을 내 쪼이며 이리저리 오간다. 통일동산 앞의 주차장은 움직이지 않는 차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땅이 흔들거렸다. 이때 저 멀리서 큰 왕방울을 가진 하얀색 차가 뛰어들어온다. 너무 급하게 뛰어 들었기에 주변 차들도 당황하여 급정거를 하느라고 때아니게 아스팔트에 타이어 끗는 소리가 주변으로 퍼졌다. 하얀색 차는 무리 속으로 뛰어 들더니 멋지게 180도 드리프트를 한 후에 멈춰섰다. 다들 시동을 끄고 하얀색 차를 향해서 향해서 달려 들었다. 하얀색 차도 시동을 끄고 문을 열었다. 무리가 차에서 내린 사람을 향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와, 국필이 형이다." "반가워요, 형. 오랜만이에요." 무리는 국필이란 사람을 중심으로 둥글게 섰다. "그래. 반갑다. 다들 잘 있었냐?" "형 없어서 지겨웠죠. 역시 형이 있어야 우리가 빛이 나요." "무슨 소리냐. 나 없어도 잘 지내야지. 너네들 오늘은 머할거냐?" "요새 단속이 심해서 오늘도 겨우 모였어요. 기변 단속이 너무 심해서 낮에는 제대로 달리지도 못했어요." "짜식들. 쫄았구나. 그래 오늘은 이 형이 쏜다. 한번 돌아보자." "우와. 형. 역시 형 뿐이에요." "오늘은 내가 로드 설 테니까 너네는 신나게 따라 와. CB는 활짝 올려 놔라." 다들 각자 차로 돌아간다. 이윽고 시동을 걸고 부릉거리는 소리가 다시 통일동산을 뒤덮기 시작했다. "찌~익. 여기는 왕자, 여기는 왕자, 시종들 나와라. 이상" "찌~이이익. 여기는 시종 1, 왕자 말하라. 이상." "찌익. 오늘 코스를 말하겠다. 일단 자유로 따라서 임진각까지 간다. 이상." "찌이익. 알았다. 시종들은 왕자를 따르겠다. 이상." "찌찍. 여기는 왕자. 비상시 주파수는 7로 맞추기 바란다. 이상." 무선을 통해서 앞차가 뒤차로 전달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얀색 차가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주차장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뒤로 차량 여섯 대가 따랐다. 자동차 배기음이 모두 빠져 나가자 통일동산은 죽은 듯 조용해졌다. 새벽 1시 20분 임진각. 남서쪽에서 큰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통일대교쪽으로 가려는 듯 하다가 코너길로 돌아서 임진각 앞 주차장으로 빠르게 뛰어들어왔다. 주차장 안으로 들어온 차들은 앞 차를 따라서 한 바퀴 시끄럽게 돌더니만 임진각을 향해서 일렬로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휴게소 앞 음료수 자판기 앞으로 향했다. "국필이형. 이거 하나로 끝나는거 아니죠? 헤헤." "지금은 이거 하나지만 레이스 끝나고 내가 거하게 야식 쏘마." "히히. 기대할게요 형." "근데, 형. 갈때는 어디로 갈거에요? 왔던 길 돌아가면 경찰 있을지 모르는데." "그렇지? 어디로 갈까?" "이왕 온 김에 파주쪽으로 가 볼까요? 거긴 단속 없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래도 신호가 많아서 괜찮을까요?" "흠. 그래, 위험이 좀 따르긴 하지만, 괜찮을 것 같군. 모두 나만 따르도록 해." "알았어요, 형." 새벽 1시 20분 파주시 입구의 어느 초소. 초소 안에는 경찰 두 사람이 있다.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뛰어 오고 있다. 쭐래쭐래 뛰어오더니 초소안으로 들어간다. 초소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가슴팍에서 캔커피를 꺼내 놓는다. "밤바람이 좀 차네요. 이거 한잔 드세요." "그러게. 고맙네." "그나저나 오늘 단속하기로 했는데, 지나가는 차가 별로 없네요." "머. 없으면 우린 좋잖아. 오늘 밤은 편하게 보낼 수 있지." "헤헤. 그러게요." 새벽 1시 25분 임진각 주차장. 커피 자판기 앞에 있던 무리들이 흩어져서 각자 차로 돌아갔다. 하얀색 차가 시동을 먼저 걸었다. 머플러에서 포효하듯 굉음이 나왔다. 다른 차들도 질세라 엔진 파열음을 퍼부었다. 곧바로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주차장으로 퍼졌다. 무리가 줄줄이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주차장에는 타이어 자국만 줄줄이 나 있다. 새벽 1시 30분 파주시 초소 앞. 초소 안에 있던 경찰이 잠깐 밖에 나온다. 볼일을 보고 들어가려는데 저 멀리서 자동차 배기음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소리가 들리는 걸 알고서 안쪽으로 들어간다. "경위님. 차소리가 들립니다." "어. 거 웬만하면 안 지나가는게 좋은데 말이야. 자, 준비들 하세. 자네는 차단막 좀 확인하고." "에구. 그러게요. 엉덩이 인제 좀 지폈는데." 경찰관 3명이 검문 준비를 마쳤다. 자동차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일반 자동차와는 달리 소리가 무척 거대하였다. "이봐. 이거 소리가 좀 다른데. 정지봉 준비해. 아무래도 이 놈들 폭주족인거 같어." "예." "차단막도 필요하니까 준비해. 통과시켜서는 안될거 같어." 새벽 1시 30분 지국필의 차 안. 차를 몰고 가는 지국필이 앞쪽을 보더니 CB를 든다. "찌이이이익. 여기는 왕자. 시종들 나와라. 이상." "찌찌찍. 여기는 시종1, 무슨 일인가. 이상." "찍. 앞쪽에 장애물이 있다. 정지봉이 왔다갔다 하는데,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상." "찌익. 형, 그러면 어떻게 해요? 잡히면 안되잖아요." "초소 가기 전에 샛길이 하나 있어. 그 길로 빠질테니까 뒤쪽에 전달해라. 이상." "알았어요. 이상." 새벽 1시 32분 파주시 초소 앞. 초소쪽으로 날아오던 불빛이 없어졌다. 저 멀리서 오던 차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어, 경위님. 쟤들 옆으로 빠지고 있습니다." "아이고. 분명히 저것들 무슨 문제 있다." "어떻게 할까요? 쫓아갈까요?" "여기도 지켜야지. 거 참. 안되겠다. 김경사. 혼자 지킬 수 있겠지? 최경사. 순찰차 끌고 와." "경위님. 저 혼자 어떻게 지켜요?" "에이. 할 수 있어. 나 최경사하고 쫓아갈테니까 일단 본서에 연락해. 아무래도 저것들 음주 폭주인거 같어." 최경사가 순찰차를 가져오자 같이 타고 쫓아갔다. 새벽 1시 40분 용주골. 가게에서 내뿜는 화려한 조명이 개천으로 흘러서 하늘에 이르렀다가 별빛이 되어 다시 가게로 내려온다. 아가씨들이 유리창 안 의자에 한복이나 웨딩 드레스를 입고 곱게 앉아서 손님들을 유혹하는 모양새가 강남역에서 삐끼들이 손님잡는 폼하고 다를바가 없다. "어이, 오빠. 놀다 가. 찐하게 연애하자." "오빠 일루 와바요." "아이, 오빠. 나 오늘 개시도 못했어. 어여 들어와." 개천따라 형성된 용주골의 저 안쪽에는 손님 발길이 드물다. 그러나 발길이 드물어도 장사가 잘되는 "목화"가 있다. "목화"에는 오의정이 동생들 여섯과 함께 웨딩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다. 오의정은 이 지역에서 소문난 미모로 손님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자동차 배기음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강한 불빛이 파주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오의정은 갑작스레 나타난 소리와 불빛에 잠시 눈을 돌렸다. 불빛은 이내 마을 속으로 사라졌다가 용주골 바로 앞의 다리로 나타났다. 잠시 머뭇하던 불빛들은 이내 용주골로 접어들었다. 오의정은 잠깐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색 차는 서서히 오더니만 "목화" 앞에서 멈추었다. 국필이 까만 차 유리를 내리고선 가게 유리창 앞에 선 의정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이쁜 아가씨. 말 좀 물어봐도 될까요?" 국필이 친절하게 물어오자 의정은 반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또 반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창을 열고 대답한다. "뭘요? 머가 궁금한대요?" 국필은 의정이 반문하는 태도에 흥미를 느꼈다. "여기 뒤로 우리 애들 예닐곱이 있는데, 오늘 들어가 줄테니까 차 일곱 대 주차할 만한 곳 있어요?" 저 멀리서 경찰 사이렌이 요란스레 울리면서 다가 온다. 힐끗 마을쪽을 본 후에 국필을 쳐다 본다. 다소 무례한듯한 국필의 모습에 의정은 기분이 나쁘기보다 호감을 느꼈다. "글쎄요. 조금만 더 가면 우리집 뒤에 공터가 있어요. 거기 차를 댈 수 있을거에요. 전부 몇 명이죠?" "8명. 근데 손님은 7명으로 생각해요. 난 생각없으니까. 그럼 주차하고 오죠." 차들이 줄줄이 집 뒤로 사라지자 의정은 차와 사람 숫자를 세어보더니 바로 옆 가게로 가서 이야기를 한 후에 1명을 더 데리고 들어온다. 새벽 1시 45분 공터. 차를 모두 주차한 후에 국필을 중심으로 모두 모였다. "형, 어쩌자는 거야? 경찰이 계속 쫓아 오잖아." "애매하게 꼬였다. 일단 손님인체 하고 여기에 있으면 경찰도 어쩌지 못할거야. 여기는 경찰도 손 못 대는 곳이잖아." "손님인체 할 수 있을까? 여긴, 용주골이잖아." "짜식. 걱정마라. 오늘은 내가 쏜다니까. 한 삼십분 좀 지나면 경찰도 물러날테니까 그때 다시 서울로 가자." "흐흐. 형이 쏜다는데 우리가 머 힘이 있나. 따라야지. 그렇지 애들아?" "그래, 헤헤. 형 덕에 오늘 지옥에서 천국와서 호강하네." "자. 일단 들어가자." 새벽 1시 47분 목화 입구. 국필이 애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의정이 문 앞에서 서서 들어오는대로 애들을 하나씩 붙여서 방으로 인도하게 했다. "이봐요, 아가씨. 7명인데 얼마죠?" "제 이름은 의정이에요. 그리고, 8명인 듯 한데요." 국필이 데리고 온 애들 7명은 벌써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목화 입구에는 의정과 국필만 남았다. "아, 난 빼요. 카드로 계산하면 되죠?" 국필이 지갑에서 카드를 빼는 모습을 보고 있던 의정은 팔짱을 끼면서 약한 헛웃음을 내뿜었다. "이봐요. 애들 8명 데리고 왔거든요. 그래서 나도 옆집에서 1명 빌려 왔어요. 30분짜리는 7만원, 1시간짜리는 13만원이에요. 카드는 14만원입니다." "아, 알았어요. 그럼 나까지 해서 8명으로 계산해요." 의정이 기분 상한 듯 국필이 건내는 카드를 빼앗다시피하여 단말기로 긁었다. 그리고 112만원을 누르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계산하는 동안 의정은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해서 국필을 쳐다보았다. 국필은 카드 단말기를 내려다보다가 의정을 잠깐 보고서는 쑥스럽고 당황해서 고개를 밖으로 돌렸다. 밖을 보던 국필이 다시 의정을 보면서 물었다. "원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 "글쎄요." 여전히 의정은 차갑게 대답했다. "2층으로 올라가셔서 제일 끝방으로 가 계세요." 새벽 1시 50분 용주골 입구.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왔던 순찰차는 용주골 입구에서 잠시 멈추었다. 두 경찰관은 창문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다. "햐. 분명히 이쪽으로 도망쳤는데 말이야. 갑자기 차 소리가 없어졌네." "그러게 말입니다. 이 자식들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질 않네요." "무전으로 반대쪽 끝 초소에 연락 한번 해봐. 그쪽으로 나오면 잡으라고 해. 난 이곳 업소들에 한번 물어볼께." "알겠습니다." 경찰관은 차에서 내려서 가게로 서서히 걸어갔다. 경찰을 보자 주변에 있던 건장한 남정네들이 둘셋끼리 모여 긴장한 티를 냈다. 경찰관은 권총집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보이지 않게 위협을 했다. 세 번째 가게를 지나서 네 번째 가게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나 파주 경찰서에서 나왔는데, 혹시 여기 시끄러운 차 몇대 지나가는 거 봤어?" "아, 아뇨. 아니 봤어요. 경찰관님 오시기 전에 지나갔어요." "어, 그래. 햐, 고놈들 빠르기도 해라. 폭주족 단속 중인데, 어디로 갔는지 알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구요, 지나는 갔어요." "에이씨. 놓쳤구먼. 알았어. 그나저나 요서 머 힘든거 있어? 별 일은 없는거지?" 경찰관이 "별 일"에 힘을 주자 남자는 일순 긴장했다. 머뭇머뭇하더니만 봉투를 하나 꺼내서 경찰관 손에 살짝 쥐어준다. "허. 벼별 일은요. 일 없어요. 우리야 그저 잘 지내고 있습죠." "그래. 별 일 있으면 말해. 난 이만 가볼테니까." 경찰관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경찰차로 돌아가고 남자는 한숨을 쉰다. 차로 돌아온 경찰관은 가게가 있는 쪽을 살핀 후에 차에 탄다. "에이. 여기 지나가긴 한거 같아. 그래 그쪽에서는 봤대?" "아뇨. 지나가는 차가 없었대요. 아무래도 어디로 숨은거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다. 일단 후방 초소쪽으로 갔다가 우리 초소로 돌아가자구. 출발해." "예." 올때는 요란하게 사이렌 소리를 냈던 경찰차가 한번 왜엥 하면서 조용히 출발했다. 새벽 1시 50분 "목화" 어느 방. 일하는 직원이 안내하여 국필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앉아 있으라는 말에 국필은 침대에 앉아서 방안을 둘러보고 있다. 조명은 붉다. 국필은 침대 끝에 앉아 있다가 엉덩이를 움직여 화장대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피로 목욕한 붉은 색을 뒤집어 쓴 남자가 앉아 있다. 거울 속 세상은 레이스 달린 커튼과 유명 여배우의 나체 사진이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국필은 거울 앞으로 다가 가서 서서히 두 손을 펼쳐서 자기 얼굴을 만져 보았다. 하얀 얼굴이 붉은 조명을 받아서 피를 뒤집어 쓴 듯 했다. 얼굴을 만지고 있는 손은 흡사 피구덩이 속에 담갔다가 뺀 모습이었다. 국필은 괴로운 듯 얼굴을 감쌌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국필은 감싸고 있는 두 손을 풀지 않고 있었다. "어디 아파요?" 의정이 문을 닫으면서 국필에게 물었다. 그제서야 국필은 두 손을 내리고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나.. 난." "긴장할 거 없어요. 그냥 내 말만 잘 들으면 되니까." "그게 아니라 난 별로 생각이 없어요." 의정은 국필에게 다가갔다. "무슨 생각? 여기선 생각이 별로 필요없어요." 의정이 국필의 겉옷을 벗길려고 옷 끝을 잡았다. 국필이 의정의 손을 잡았다. "나, 이러고 싶진 않아요. 그냥, 나 먼저 나갈래요." 국필이 의정을 손을 놓고 의정의 뒤로 돌아갔다. 의정이 고개를 돌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애써 들어와 놓고 또 왜 이러는거에요? 아까부터 재수없게 그래요?" "그게 아니라, 난 경찰 피하려고 여기로 들어온거에요. 아까 봤잖아요." "그건 알아요. 그런데 들어왔으면 경찰 갈때까지는 있어야 할 거잖아요. 경찰이 곧바로 갈거라 생각했어요?" "그... 그건." "마음대로 하세요. 나도 잡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당신이 나가면 나는 편해요." 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았다. 갑자기 머쓱해진 국필이 나가지도 못하고 자리에 선 채로 의정을 쳐다보았다. 화장대 거울로 보이는 의정이 매우 붉게 보였다. "휴. 하긴, 지금 나가면 나혼자서 애들 나올때까지 기다려야겠네요. 그런데, 내가 나가면 당신이 편한데 왜 나가지 못하게 잡는거죠?" "공짜로 돈 받는 것 같아서 그래요. 비록애 이런 일 하지만, 그래도 줄건 주고 받아야죠." 의외의 대답을 듣고서 국필은 침대로 가서 앉았다. "아저씨, 이런 데 처음 와요?" 의정은 거울을 통해서 국필을 쳐다 보았다. 국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혼자 온 것도 아니고 떼거지로 온 걸 보면 처음은 아닌데, 괜히 고상한 척 하지 말아요." 국필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의정이 던진 말 때문일까. 침대에 걸터 앉은 국필은 두 손으로 침대를 지긋이 눌렀다. 장대 앞에 앉아 국필을 지켜보면 의정은 조용히 일어나서 국필 앞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국필 앞에서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의정이 다가온 걸 안 국필이 고개를 들어 의정을 바라다 보았다. 말없이 서 있는 의정의 목에 있는 목걸이가 유난히 밝아보였다. "그거, 스와로브스키꺼죠?" "그런가요? 잘 모르는데. 어머니가 주신 거에요." 목이 아픈지 국필은 살짝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카트리나라고 하는 거에요. 셋트로된 팔찌도 하나 있는데." 국필을 보고 있던 의정은 불현 듯 가슴에서 살짝 뜨거운 느낌을 받았다. 무스나 젤을 바른 머리도 아닌데 유난히 뻣뻣해 보이는 국필의 머리, 그리고 아까 자신을 올려다보던 국필의 눈망울, 그리고 침대를 누르고 있는 국필의 손. 의정은 국필 앞으로 다가가서 그 머리, 어깨를 껴앉았다. 국필은 갑자기 자기를 껴안은 의정 때문에 살짝 당황하여 팔을 양 옆으로 들었으나 아무 말없이 의정을 껴안았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침대로 쓰러졌다. "목걸이는 언제 받았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받았어요. 그땐, 인생이 이렇게 비참해 질 거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그럼, 여기에 온 건?" "후후. 대답하기도 지쳤네요. 좋아서 여기 온 사람이 있겠어요. 다들 사연이 있는거죠." "그래도 그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네요." "나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리면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거 같아서요. 어서 돈 벌어서 빚갚고 나가야죠. 여기 있는 동생들도 다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그나저나 오빠는 여기 올 사람이 아닌 거 같던데." "경찰 피해서 왔잖아요." "후후. 그런거 말구요. 여기서 오래 사람 상대하다보면, 반쯤은 점쟁이가 된다니까요. 관상이랄까. 이 사람은 왜 여기 왔을까 한 번은 생각해 보거든요. 경찰 피해서 온 건 알지만 그렇다고..." "나두 머리가 복잡해요. 인생이란게..." "아까 차 보니까 돈 때문에 힘들어 보이지는 않던데요. 오빠도 사연이 있나? 후후." "어찌보면 사연이야 있지요. 여기서 일하는 의정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사연에 무게는 없어요. 내 사연 남 사연 다 커요." "하하. 대단해 보이는군요." "그래요? 모르겠어요. 제가 잘 살고 있는지." "처음 볼때도 느꼈지만, 의정씨는 좀 특별해요." "호호. 그런가요? 전 특별하다 생각은 안해봤는데." "느낌이 좀 색달랐어요. 다른 여자들하고는 틀려요. 이렇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의정씨가 많이 끌려요." "어머. 그건 좀 오버 아녀요? 호호호.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빚이 많아요? 아까 빚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휴. 예. 좀 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또 어머니 돌아가셔서 집에 일이 많았거든요. 1억 넘어요." "그랬군요." "많이 갚기는 했는데, 워낙 크게 빚을 졌어요. 빚갚으려고 몸팔고 있죠." "......" "의정씨." "네?" "그 빚, 내가 대신 갚아주면 안될까요?" "네? 무슨. 왜 국필씨가 갚아줘요?" "빚 갚으려고 몸 팔고 있잖아요. 내가 의정씨 사께요." "어머. 몸 팔고 있다고 나 우습게 보는거에요?" "아, 아녀요. 오해는 말아주세요. 저도 진심으로 말하고 있어요." "호호. 진심인가 보네요. 그래요. 갚아 주세요." "의정씨. 농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의정씨를 여기서 빼낼 수 있어요?" "진짜루 빼시게요? 우리는 모두 삼촌한테 빚지고 있어요. 삼촌한테만 갚으면 되거든요." "알았어요. 오늘 오후에 제가 다시 와서 의정씨를 빼내드리께요. 약속합니다. 진심으로." 새벽 3시 주차장. 사람들 몇이 서 있다. "목화"에서 나온 국필이가 차가 있는 곳으로 왔다. "어, 형. 이제 나왔어요? 형 덕에 우리는 재미있었는데. 형은요?" "응. 나도 재미있었다. 가자." 어깨를 움츠려서 까치발을 하고 있던 일행은 각자 차에 올라탔다. 거친 숨소리를 내뱉는 야수처럼 자동차들이 울부짖었다. 국필의 차가 헤드라이트를 켜면서 앞으로 뛰쳐나갔다. 연이어 차들이 빠져나갔다. "목화" 앞으로 지나갈 즈음에, 국필은 차를 서행하면서 경적을 울렸다. "목화" 안에 있던 의정이 문 앞으로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 의정의 모습에 가게 안의 동생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왕자. 지익. 일행 들어라. 왔던 길로 되돌아 가서 뒷북을 치자. 속도를 좀 낼테니까 잘 따라 오도록. 이상." 새벽 3시 5분 파주시 초소. 지나가는 차가 없어서 경찰관들은 모두 초소 안에 들어가 있다. 따뜻한 난로가 안에 있어서 다들 꾸벅꾸벅 잠을 자고 있으며 라디오에서 음악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다. 의경이 일어 나서 소변을 보러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 배기음이다. 소변을 보고 있던 의경은 눈을 감고 있다가 번쩍 눈을 떴다. 뒷정리를 채 하기도 전에 초소 안으로 뛰어들었다. "경위님. 경위님. 그 자식들이 되돌아 왔어요. 경위님." "으응. 머... 머야?" 초소 안에서 뛰쳐 나오자마자 그들은 큰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는 차량들을 보았다. 순식간에 지나갔기 때문에 바리케이트를 칠 수도 없었다. 멍하니 지나가는 차들을 지켜보면서 욕지거리만 던졌다. "에이. 저 자식들이 어디 숨어 있다 나온거야." 한강물에 퉁 반사된 빛이 방 안 가득히 찼다. 처음에는 작은 별빛이었는데, 이제는 앞을 하얗게 만든 큰 빛이 되었다. 꿈만 같다. 어제밤 일이 사실인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다. 이 감정은 무엇인가. 가슴이 터지겠다. 다시 태어나도 이런 느낌, 기분일까. 천장에 비친 햇빛에 내 눈이 다 멀었다. 어제 만난 그 친구는 나를 기억하고 있으려나. 혹시 그 친구는 나를 지나가는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는지. 아,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분명 내가 그 친구와 약속을 하였다. 이러고 있을 수 없다. 그 친구와 나를 위해서. "아버지." "뭐냐?" "부탁이 있어요." "갑자기 무슨 부탁이냐? 혹시 너 어제 또 사고 쳤냐?" "아버지. 아버지가 기억하는 아들은 언제나 사고뭉치였죠."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 "아버지. 아버지의 그 사고뭉치 아들이 달라졌어요. 이제부터 아버지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무어? 아니, 그, 그게 진심이냐? 아. 아하하. 아니 너." "그래요. 아버지 아들 제정신입니다. 말짱합니다. 멀쩡해요."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지 이 놈의 자식아. 니가 인제 정신을 차리는구나." "그래서, 아버지. 제가 여자를 하나 데리고 오겠습니다." "뭐? 아니 무슨 여자? 설마 너 어제 밤에." "예.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 여자를 만났어요. 저한테는 그 여자가 필요해요." "그럼 데리고 오면 되잖아." "그런데, 문제가 좀 있어요. 그 여자, 용주골에서 일해요." "뭐라고? 아니 이 자식이 정신이 든 줄 알았더니. 정신 차려, 이 자식아. 창녀를 데리고 오겠다는 거야 머야!" "아버지.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그 여자, 지금은 몸 팔고 있지만, 보통 여자하고는 달라요." "어허. 이 놈이 단단히 빠졌구나. 네 놈이 정신을 아주 다 팔았구나." "하지만, 아버지. 순결하고 고귀한 여자입니다. 빚져서 거기에 매여 있는 거구요. 아버지도 만나보시면 생각을 바꾸실 거에요. 무엇보다, 제가 변했잖아요. 아버지도 그건 인정하실 거에요." "이, 이 놈이. 아이구 머리야."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제 말, 못 믿으시는거에요? 말씀 드렸잖아요. 아버지. 그러니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는 거에요." "그, 그래. 무슨 부탁이냐. 그 여자를 빼 내 달라는거냐?"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의 못난 아들이 제 정신을 차리도록 만든 그 여자를 빼 내어 제 여자로 만들고 싶어요. 빚갚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네?" "아이고. 내 팔자도. 그래, 알았다. 얼마면 되겠어, 엉?" 오후 5시 용주골 "목화". 가게 앞으로 하얀색 스포츠카가 멈췄다.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목화는 뉘엇뉘엇 지는 햇살을 비스듬히 받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국필은 목화 입구로 다가서서 유리창으로 기웃거렸다. 국필은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어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안쪽에서 사람 형체가 움직이는게 보였다. 국필은 문을 두드릴려고 손을 올렸다. 이때 문이 갑자기 열렸다. "거, 형씨는 누구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인상파는 다짜고짜 시비쪼로 국필에게 다가왔다. 인상이 너무 험하여 겉으로 봐서는 정상적으로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 저... 저는, 아니 그게, 혹시 이 가게 주인을 만났으면 해서요. 혹시, 안 계신가요?" "주인? 무슨 주인을 말하는거요? 당신 머요?" "오.. 오해는 하지 마시구요, 경찰이나 머 그런건 아닙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내가 주인인데, 할 말이 있으면 해보슈." 남자는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 넣은 후 다리를 벌리고 섰다. 갑작스레 말을 하자 국필은 일순 당황했다. "저, 여기 있는 아가씨 말인데요. 데리고 나가려면 어떻게... 그러니까 제 말은." "머요?" 얼굴 흉터 있는 그 남자는 한쪽 다리마저도 떨기 시작했다. "여기서 데리고 나가려면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죠? 빚을 갚으면 되나요?" "뭐라구요?" 짧은 머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내 참. 또 어떤 년이 손님한테 사기쳤나." 고개를 좌우로 몸풀 듯이 돌렸다. 또독또독 소리가 났다. "빚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나 물어보슈? 그만큼 돈이 있어야 하는데. 아서슈. 거, 댁이 순진해 보여서 여기서 일하는 애들이 작업 좀 걸어본 거유. 당신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모르겠는데, 상상도 못할거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서 남자는 목화 안으로 들어가려고 돌아섰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원하는 만큼 줄 수 있어요." 문에 한 발을 올리고 들어갈 자세를 취했던 남자는 잠깐 멈칫했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국필에게 들어오라고 한다. 이윽고, 한 남자가 아가씨를 데리고 목화의 유리문을 나섰다. 남자는 밝게 여자 손을 잡고 차 문을 조심스레 열어주었다. 여자는 그다지 밝은 표정이 아니다. 귀찮은 표정이 오른쪽 눈가 아래로 살짝 흘러 내렸다. 남자는 자신의 차에 타서 여자쪽을 보고 무슨 말을 했다. 여자는 살짝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동을 건 후에, 차는 출발했다. 차가 목화를 벗어나자, 목화가 있는 건물 2층에서는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해가 진 저녁 시간, 가정집에서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다. 로댕의 조각상마냥,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오른손은 이마를 살짝 받치고 있으며 왼손은 살짝 주먹을 쥐고서 꼬은 다리 사이 위에 살짝 올라가 있다. 재떨이는 흔적이 가득하다. 커다란 벽시계 소리가 똑똑 거리고 깊은 심호흡 소리가 후욱 나올 뿐이며, 가정집 치고는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 그 무엇도 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현관 문 소리가 정적을 깼다. 앉아있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 현관쪽을 바라보았고, 현관에서는 한 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여자를 데리고 온 남자는 여자를 자리에 앉힌 후에 자신도 앉았다. 아버지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던 국필. 아버지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국필은 표정이 매우 밝았다. 그간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제는"이라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근데, 아저씨. 나 아저씨가 찾는 사람 아니에요." 갑자기 국필이 놀라서 여자쪽으로 돌아봤다. "아저씨가 찾는 사람, 아니 의정 언니 말인데요. 오늘 새벽에 의정 언니가 삼촌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보내달라던 언니를 삼촌이 가두었어요. 나보고 대신 가라던데요." 눈을 크게 뜨면서 놀라는 국필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 인제 가 보께요. 그럼 수고하세요." 저녁 8시, 파주시 입구 초소. 의경 몇 명이 차단막을 설치하고 있다. 초소 앞에서는 종이 커피잔을 든 경찰 두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 내가 오늘 새벽까지 근무 섰잖아. 그런데 무엇이 문제냐고. 왜 내가 또 근무냐고." "새벽에 자는 것만 안 들켰어도 이런 일이 없는데. 좀 그렇죠?" "그래도 이 사람아. 새벽 근무 중에 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지나가던 사람이 근무 태만이라고 경찰서에 신고했대잖아요. 어쩔 수 없죠. 아휴. 그냥 보내줘도 불만이야." "아, 내말이. 이 추운 날씨에 음주 단속도 안하고 그냥 보냈는데 말이야. 에이. 재수 옴붙었어." "대충 하고 가시죠. 오늘도 사람 많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내, 억울해서라도 오늘은 전부 다 잡을거야. 이봐. 차단막 확실하게 설치해." 먼 곳에서 자동차 배기음이 들렸다. "뭐야? 이거 또 그 놈들인가? 이봐. 차단막 확실하게 해. 내 이놈들을 그냥 두진 않겠어." 종이 커피잔을 구기면서 비상봉을 들고 차단막 앞에 섰다. 저녁 8시 5분, 국필의 차. 국필은 머리 속이 복잡했다. 배신 당했다는 느낌과 아울러 아버지 앞에서 엉망이 된 자신이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의정을 알아보지도 못한 자기 눈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강변 북로와 자유로를 지나쳐 오는 동안 지나치게 과속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국필의 뒤쪽에는 순찰차도 한 대 붙어 있었다. 내가, 내가 왜 그랬을까. 그녀를, 그녀를 구해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 인물이었나. 내가 처음 사랑을 느낀 여자를 그 어두운 구석에서 빼주지도 못했다.나는, 나는 왜 이런 바보짓을 했을까. 어서 가서 구하자. 내 여자를, 내 반쪽을 구해내자. 국필은 애가 탔다. 임진각에서 파주쪽으로 접어들었다. 초저녁을 이미 지났기 때문에 가로등이 통일로를 밝히고 있었다. 얼마나 빠르게 달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차 옆으로 지나가는 가로등과 가로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인다. 앗차. 단속 경찰이다. 이대로는 그냥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저녁 8시 10분, 목화. 2층 창문이 살짝 열렸다. 커튼을 밀치고 여자가 상체를 내밀었다. 여자는 다리를 밖으로 내밀어 뛰어내렸다. 남자가 뛰기에도 높았으니, 여자에게는 무리인 듯하여 다리를 절었다. 왜 내가 말을 했을까. 그냥 삼촌한테 말하지 않고 그냥 있었으면 국필씨가 나를 데리러 왔을 텐데. 내가 국필씨를 속였어. 음흉한 놈. 나를 이 바닥에 데려올때도 온갖 감언이설을 다 하더니, 끝까지 내 인생을 막는구나. 평생 포주질만 하다가 죽을 놈. 국필씨. 보고 싶어요. 내가 국필씨를 찾아갈께요. 기다리세요. 오의정은 목화에서 나온 후, 주변 가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천천히 다리가 있는 쪽으로 절뚝거리면서 걸었다. 얼마되지 않는 길이지만, 의정은 조심스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얻어맞은 자국이 아팠다. 광대뼈가 얼얼하고 귓속이 멍했다. 뒤쪽에서 의정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났다. 국필은 초소 앞 50m지점에 있는 조그만 길을 보았다. 국필은 속도를 멈추지 않고 달리다가 조그만 길 앞에서 드리프트하면서 방향을 틀었다.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초소 앞까지 들렸다. 초소에서는 경찰관 몇 명이 순찰차에 올랐다. 조그만 논길위로 스포츠카가 맹렬히 달렸다. 경찰차도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쫓았다. 논길은 좁다. 좁은 길을 맹렬하게 달리던 스포츠카는 길 왼쪽편에 있는 콘트리트 배수관과 충돌을 했다. 운전석쪽 앞바퀴가 들리면서 차량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튕겨 올랐다. 운전석이 오른쪽으로 완전히 돌 즈음에 콘트리트 배수관과 한 번 더 부딪혔다. 이제 차량은 몇번 더 돌아서 개천으로 떨어져 버렸다. 멈춘 차량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순찰차가 쫓아왔지만, 경찰관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스포츠카는 커다란 불꽃을 내고 말았다. 경찰관은 급히 119에 연락을 했다. 의정은 뛰기 시작했다. 아픈 다리가 더욱 고통이 되었지만, 힘껏 뛰었다. 남자 둘이 의정을 잡았다. 의정은 뿌리쳤다. 남자 하나가 의정의 머리채를 잡았다. 의정은 큰 소리를 냈다. 다른 남자는 의정의 뺨을 쳤다. 의정의 입에서 피가 터졌다. 의정이 고개를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었다. 잡고 있던 남자가 머리칼을 놓쳤다. 뺨을 쳤던 남자가 다른 손으로 다시 뺨을 쳤다. 의정의 몸이 휘청이면서 개천쪽으로 떨어졌다. 의정의 몸이 한바퀴 돌아서 개천에 떨어졌고 의정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머리부터 떨어진 의정의 몸에서 짙붉은 색의 액체가 흘러내렸다. 위에서 서 있던 남자 둘은 서로 다투더니만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커다란 호수 위에 떠 있는 유람선마냥, 오늘도 개천 옆의 용주골은 화려하게 조명을 켰다. 불야성이란 단어가 그대로 어울리는 이 곳에서,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은 오늘도 순정을 팔고 상처를 거둔다. 조명은 화려하지만 열기가 없고 사람은 많지만 진심이 없다. 한 사람이 떠나가면 다른 사람이 자리를 채우는 이 곳에서, "목화"의 아가씨 여섯명은 하얀색 드레스 위에 투명한 보석을 떨어뜨리며 두 사람의 명복을 빌고 있다. 목화 앞을 흐르는 개천은 국필이 떨어진 개천을 지나서 임진강으로 조용히 흘러간다. *********** 백조의 호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