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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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를 갖 졸업하고 한때 난 아주 깊은 실의에 빠질뻔했던 적이
있었다.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여상을 나왔으니 빨리 취직을 해야 한다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때문이었는지,
난 내 자신의 진로문제에대해 아주 깊이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 돌파구조차 찾지 못하고 방황의 늪을 헤매고 있을때...
울산 자동차 회사 경리로 미리 취직되어 간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번 바람도 쏘일겸 놀러 오라고....
82년 3월이었던것 같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고,조금 두터운 외투를 입었던 기억이....
먼 곳으로의 여행이 서투른 내게 친구는 아주 자세히
내게 울산으로 찾아오는 길을 일러주었고, 난
별 준비도 없이 착찹한 맘음으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
금요일 늦게 도착한 내게 친구는 맛있는 저녁을 대접했고,
그녀의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토요일 아침을 먹고 친구는 가까운 경주 불국사 구경을
시켜 준다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모든길이 초행길인 내게 다른 도시는 모두 낮이 설었다.
그때가지만해도 우물안 개구리식 삶을 살아온 내게는
역사책속에서만 들어왔던 불국사와 그 안의 다보탑,석가탑...을
볼 수 있다는 설레임에 우울했던 마음에 조금씩 햇살이 비치는것
같이 희망이 보였다.
불구사 내부를 구경하고 있는 우리들 등뒤에서 웬 남정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살님들께선 무얼 잡숫고 키가 들 크셨나요?"
뒤돌아보니 회색 승복을 한 젊은 스님이 말을 걸었다.
기분이 그다지 나쁘진 않았지만 썩 좋은 소리도 아니었다.
사실 친구와 난 키가 좀 작은건 사실이었으니까....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린 그 스님을 따라
절 내 이곳 저곳을 설명을 들으며 구경할 수있었다.
"저는 아직 선방에서 수행중이라...보살님들만 보면 즐겁답니다.
아직 속세의 미련을 덜 버린 탓인가봐요."
하며 멋적게 웃는 스님의 미소속에서 정말로 그는
아주 햇병아리 스님이라는 이미지가 풍기고 있었다.
우린 그분을 따라 석굴암까지 가게 되었고, 그분이 그곳
주지스님께 허락을 받아 저녁을 먹고 하룻밤 자고 가도 된다는
싸인을 받고, 우린 일정에도 없는,(별로 자고 갈 맘도 없었는데...)
1박을 하게 되었다.
그 스님은 불국사 절 내로 도로 내려 가시고...
비구승만 계시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는데,
체면 때문인지,아님 쑥스러워서 그랬는지, 우린 둘 다
제대로 밥을 많이 먹지도 못했다. 정말 맛은 있었는데...
주지 스님께서 심심하면 차 한잔 마시러 건너오라는 말씀에
일찍 해가 떨어진 산속이라 그런지,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작은 방에 둘만 덩그머니 떨구어지니,
정말로 심심했다. 군것질거리도,책도 아니 가져왔으니,
정말로 벽 쳐다보고,천장 쳐다보고.....둘이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다가 우린 스님계시는 방을 노크를 했다.
이왕 온거 스님께 훌륭한 말씀 한마디만 건지고 가도
내 인생에 도움이 되겠지 싶어서....
마침 우리가 올걸 예견하신듯이 차를 끓이고 계셨다.
향기가 참 좋았다.
잘 정돈된 방에 젤먼저 눈에 뛴건 카세트였다.
"스님도 노래를 들으시나?..."
작설찬지,설록찬지....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차에 대해선 그저 커피,쌍화차,율무차,생강차..정도만
알고 있던 내겐 스님께서 권하신 차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아주 정성을 들여 손수 다기에 담아 엷은 미소와 함께
전해주셨으니...
어떤 맛이었는지..암튼 차 한잔과, 좋은 말씀도 듣고
작은 방으로 건너와 잠을 청하려 해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선 잠시라도 잠을 자 두어야 하는데,
두어번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나니....뱃속에서 쪼르륵...하고
요동을 쳤다. 너무 배가 고파서 둘이 벌러덩 누워 천장을 쳐다보니
저녁에 먹었던 잡곡밥에,나물무침.. 이 자꾸만 떠올라
정말로 잠이 올것 같지 않았다.
"아까 마신 차가 이상하다.자꾸 오줌만 나오고..."
"나두 그래. 우리 이렇게 배가 고풀줄 알았으면 아까,밥
많이 먹어둘껄...."
어찌어찌하다가 잠시 눈을 붙엿는가 싶었는데 새벽 예불시간이라며
노크를 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니
스님께선 벌써 옷배무새 정갈히 하시고 석굴암 안으로 들어가고
계셨다. 먼동이 트려면 아직도 먼듯 한데....
졸린눈 비비며 스님을 따라 들어가 예불을 드리고..
6시에 아침공양....
밥이 정말로 꿀보다 더 달고 맛있었다.
밤새 쫄쫄 굶다가 먹는 아침을 이렇게 맛있게 먹었던적이 있었던가.
친구와 난 금새 한그릇 뚝딱 비우고, 정말로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여러번 전하며 하산하려할 채비를 하고 있느니
불국사 선방 스님께서 일찍 올라오셨다.
밤새 편안히 잘 주무셨냐고....
"아뇨,밤새 배고프고 잠도 안와서 혼났어요.
스님이 이상한 차를 주시는 바람에..."
사람이 가는길이 여러갈래라는 생각을 그때 비로소 했던것 같다.
공부를 하지 못했던것, 대학을 가지 못했던것, 취직시험만 보면
미끄럼 타는것.....이런것들에게서 나를 가두어두려햇던
자신이 부끄럽다는걸 았았다.
인생을 더 길게 보면,그리고 더 멀리 보면...
보살님이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인다고 말씀하시던 스님,두 손으로
차 한잔을 건네 주시며 미소를 지으시던...그 모습이
두고두고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않고 있었다.
걸어온 길은 뒤돌아보면 뚜렷이 드러나 보이지만..
걸어가야할 길은 그때 당시엔 왜 그리 안개속같았는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때 좀더 인생의 목표를 바르게 세우고,
더 깊이 생각할걸...하고 후회해 보지만,
엉겹결에 떠난 여행길에서 아무 맛도 모르고 마셨던 설록차 한잔의
청춘이 아닐런지.....그때 나의 인생은...
그리고 지금은 습관처럼 마시고 있는 커피향과같은 내 중년의 인생을
들여다 보며 웃어본다.
자동판매기에서 뽑아져 나오는 지금의 차 문화,
정수기 물에 휘이~저어 성의 없이 타주는 일회용 티백속
녹차 한잔.....
맛을,정서를 생각한다면 그리해선 안되지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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