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깨달음 그리고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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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무슨 일 때문에 남편과 다투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밤 12시가 지난 시간이었고 초여름이었던 것 같다. 기억 속에 공원에 피어있는 옥잠화의 향기가 아직도 생각난다. 오랫동안 한 장소에 앉아 있었다.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면서 수없이 많이 해 온 생각
' 내가 왜 이 남자랑 결혼했을까'
누구의 강요도 아니었다. 나의 선택이었다. 그것이 나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나란 여자는 과연 생각이란 것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
'거기까지야. 그것이 나의 한계야. 그것이 바로 너 자신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
이런 생각으로 나를 자학하며 살아온 십오년 세월...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수시로 상처를 주며.
할퀴고, 달근질하며,
눈물이라면 지겹달 만큼 많이 흘린 눈물.
가슴을 보이고 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전혀 얼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나만의 슬픔.
늘 한 쪽 가슴에 흐르는 전기 고문같은 짜르르한 통증.
내 편안한 미소뒤에 감추어진 허전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이중성인가?
자식을 키우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그 사람의 몫.
사람의 가슴은 다른 하나가 넘쳐 부족한 부분을 채워지지 않는다.
그 부족한 부분은 그대로 아픈 채 남아있다.
살아 있으면서도 땅을 딛고 있지 않은 듯,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슬픔.
그 사람 하나의 몫.
그런데 그 어느날 이었다.
그이와 다투고 밤 늦도록 찬이슬을 맞으며 앉아 있는데
지금의 내 모습 이 슬픔이 지금까지 나를 깨어있게 한 힘이었다는 걸. 큰 걱정이나 아픔없는 사람이나 슬픔이나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이나 삶의 무게는 같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느껴지면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껴안고 싶어졌다.
그 이후, 행복한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이후, 그이와 다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슬프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슬프면 슬픔이 있어 좋았고
아프면 아픔만큼 아픔이 있어 좋았다.
슬픈 음악이 다 내 마음을 타고 놀았고,
아픔속에서 아픈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고,
겸손함 배웠으며,
그로 인해 내 가슴은 더 큰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나를 부지런히 찾았다.
변함없는 만족감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
책
산
강
자연
그이의 자리가 채워지지 않았지만, 난 무겁도록 슬프지 않았다.
다른 한 자리가 더 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 있을 때,
숲 속에 있을 때,
나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들과 하나가 된다.
나무, 하늘, 강, 바람, 물..........
가슴이 벅차 오르는 감동.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순간 순간 마음이 가난해서 행복하다.
때때로 채워지지 않는 내 가슴에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대로 그대로 둔다
그리고 난 느낀다. 그 서늘함 과 허전함을.
그런대로 그것도 좋다.
.
내가 너무 쉽게 행복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사랑한다.
우린 썩 잘 어울리지 않지만,
지금의 그이를 사랑한다.
사소한 것은 참으면 되는 것이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 주면 되는 것이다.
그이가 양말을 매일 소파 옆에 뭉쳐 놓으면 말없이 집어서 빨래통에 넣으면 되고,
반찬이 짜다고 잔소리 하면 미안하다고 하면 되고, 우리 엄마에게 몰상식하게 대하면 내가 잘하면 되고, 내가 늦게 오는 날은 밥 좀 해 놓으라고 큰소리 치면 되고,
내가 여행을 가고 싶으면 떠나면 되는 것이다.
난 때때로 떠날 수 있는, 떠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사랑한다.
둘이 꼭 하나 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나 하나가 있어 둘로 존재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 뜻이 계셨다는 생각이 든다.
2002.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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