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김상국

김상국

[꽁트]사막여행



	1. “여보, 소주 팩은 넣지 말아요, 네?” “걱정 마, 절대로 안 가져 갈 테니까.” 그의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다. 예의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전 같으면 이랬을 것이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술 없이는 못살아”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는 분명히 ‘절대로 가져 가지 않겠다’며 두부 자르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이 상대방의 의심을 미리 막으려는 속셈이라 할지라도, 오늘은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그가 술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만 하면 당일치기 나들이에 걸림돌 하나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만일 그가 소주 예찬론을 펼쳤더라면 이번 나들이는 물거품이 됐을지도 모른다. “참 이상도 하지. 당신이 이토록 고분고분 나올 줄 몰랐어요.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그 까짓 것 가지고 뭘. 나도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깐.” 정말이지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좋아하는 술이 바로 자신의 곁에 있는데도 그걸 외면하는 그의 심정에 비춰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부엌 선반 문을 열면 그 안에는 초록의 종이 팩에 든 소주가 한 박스나 있다. 달포 전 서울에 있는 친구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마른 오징어 몇 마리와 함께 단단하게 포장해 보낸 소주 한 상자. 그래서 그런지 그는 밤이 이슥해도 친구가 생각나면 소주 한 잔씩을 기울이곤 했다. 미국에 오기 전 그의 별명은 ‘주님’이었다. 주님의 주는 술 주자인데 풀이하면 ‘술님’이 된다. 워낙 술을 좋아한 때문이다. 그런 그는 술 마신 다음날에는 으레 “끊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은 늘 상습적인 다짐에 불과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로 인한 괴로움의 일단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아무튼 그가 미국에 온 후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짐작이 간다. 그렇다고 한국처럼 발길 닿는 곳에 탁 주저앉아 가슴을 풀어 헤치고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2. “여보, 딴 생각 하지 말고 핸들 꽉 잡아요.” “걱정일랑 끄라니깐.” 아이들은 모처럼 나들이에 들떠 있다. 차 창 안으로 캘리포니아 특유의 햇볕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따가운 햇살이 거친 살갗을 후비며 몸 속으로 파고 든다. 이 얼마나 오랜만의 나들이인가. 미국에 온지 거의 5년이 됐지만 이처럼 가족이 함께 나서게 된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주말이면 바이어들을 만나 골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중개무역을 하는 한국 바이어들을 접대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윈도우 버튼을 눌러 차 창을 내리니 뜨거운 기운이 훅 끼친다. 사막이 가까운가 보다. “정말, 쭉 뻗은 길이 끝내주네.”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죠?” “그럴지도 모르지.” 그의 말투는 늘 그랬다. 때로는 퉁명스럽고, 때로는 딴청을 부리는 언어 습관 탓이다. 그 때였다. “맘, 저게 뭐예요?” 초등 3학년인 아들이 손가락으로 저 앞쪽을 가리킨다. “응, 그것 말이다. 풍차란다. 바람의 힘으로 날개를 돌려 전기를 일으키는 거지.” 멀리서 보면 언뜻 사람처럼 생긴 거대한 괴물이 산등성이 마다 버티고 서서 휘휘 팔을 젓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시선을 한 곳에 모으고 있다. 프리 웨이를 타고 이스트로 3시간쯤. 우리는 목적지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슬러 가기로 했다. “원더풀!” 중학 1학년인 딸의 감탄과 함께 사막의 회오리가 먼지를 뿌린다. 괴이하게 생긴 선인장들이 길 옆에서 손짓하고 있다. 그는 뽀얀 먼지를 날리며 아득한 사막 한가운데로 거칠게 차를 몰았다. 벌써 해는 중천을 지나고 있다. 10분쯤 달렸을까. 길 오른쪽에 수백 개나 됨 직한 거대한 바위 덩어리들이 불쑥 불쑥 솟아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우뚝 솟은 바위들은 하나 하나가 둥그스름하게 생겨 마치 천상의 조각품을 보는 것 같다. “엄마, 배고파.” 그 때 환상적인 분위기를 깬 것은 개구쟁이 아들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경치는 둘째고 원초적인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의 성화에 우선 자리를 잡아야 했다. 서로 등을 맞댄 둥근 바위 틈새로 차를 몰아 작은 공간을 찾아냈다. 당일치기 나들이지만 일단 그 곳을 베이스 캠프로 삼았다. 그릴에 불을 지피는 그의 손놀림이 어쩐지 둔해 보인다. 30분 정도 씨름해서 겨우 불이 붙은 차콜에서 사막의 열기를 받아 파란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 차콜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지그시 감은 그의 눈가로 깊게 팬 가뭇한 주름살이 겹쳐 보인다. 그것이 한 남자의 삶의 궤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정말 사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나. 지금의 삶은…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인생이 아닐까. 미국으로 건너와 3년 전쯤부터 새록새록 솟아나기 시작했던 의문들이다. 정말 오늘 아침 일을 생각하면, 뭐라 할까. 그가 참 기특해 보였다. 그의 마음에 일련의 변화가 없이는 쉬이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즈니스에 하루하루 쫒겨 자칫 소홀할 수 있었을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은 것은 아닐까. 무엇이 그의 마음을 1백80도로 되돌려 놓았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3. 아이들은 일단 즐겁게 식사를 마친 것 같다. 열심히 갈비를 굽는 그의 꺼칠한 손길도 땀과 그을음으로 범벅이 되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사막의 해는 짧지 않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을 향해 선인장들은 딱딱한 가시를 내밀고 서있다. 사막의 태양은 그것들의 생명수를 단숨에 빨아들일 것처럼 가혹하게 열기를 뿜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끄덕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질기고 질긴 자연의 생명력이랄까. 태초의 자연은 인간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하고 있는 듯해 가슴이 저릿해졌다. 해거름이 찾아오려면 서너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 이전에 마치 중국 왕조시대의 토용(흙으로 구워 만든 허수아비)처럼 서있는 선인장 사이를 오가며 아이들과 기념사진이라도 찍어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은 숨바꼭질을 하듯 이리 뛰고 저리 숨고 좋아라 날뛴다. 바늘같은 가시에 찔릴 새라 조심 조심은 했지만, 역시나 개구쟁이 아들 녀석은 팔에 가벼운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러나 마냥 놀 수가 없었다. 해가 아무리 길어도 사막을 빠져나가려면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날이 어두워져 자칫 길을 헤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빨리 짐을 꾸리고 모두 차에 올랐다. 그는 아무 말이 없다. 우리가 사진을 찍으며 뛰놀 때 그는 무엇을 했는지 알만하다. 멀리서 얼추 봐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읽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차는 미끄러지듯 캠프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가 핸들을 잡은 뒤 5분쯤 지났을까. 꼬불꼬불한 길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길을 벗어나더니 그로테스크하게 생긴 선인장 사이를 뚫고 모래 더미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잠시 깜박했지 뭐.” 소주도 안 가져왔다는 양반이 왜 그런 운전 실수를 했는지 하도 이상해서 입을 벌려 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 속에서 알코올 냄새가 훅 뿜어져 나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랬다. 휴대용 물통에 소주를 담아 가지고 와설랑 혼자 캠프를 지키고 있을 때 몰래 홀짝홀짝 했다는 것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금세 땅거미가 내리더니 사방이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낭패다. 그의 속임수에 꼼짝 없이 모래더미 속에 갇힌 신세다. 핸드폰도 없고 지나는 차도 보이질 않는다. 어쨌든 날이 밝아야 다른 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서서히 사막의 밤은 찾아 들고 기온도 점점 내려가는 것 같다. 그나마 한낮 사막의 열기가 조금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사막의 대지는 캄캄한데 하늘은 정말 깊고 푸르렀다. 별들이 알알이 박혀 반짝거리는 게 마치 동화 속 별천지 같다. 하지만 감상을 접고 현실로 돌아왔을 땐 왠지 두려움이 솟는다. 이 난국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자 그가 한없이 미워졌다. 그의 말을 믿은 것이 실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탓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럴 때 일수록 서로 다독거리며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차 안으로 냉기가 스며들 때마다 아이들은 몸을 움츠린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지만, 하기야 그이 덕분에 우리는 사막의 깊고 푸른 밤을 감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의 위안이 됐다. 자태를 뽐내던 선인장들의 모습도 이미 칠흑 속에 잠겨 있다. “여보, 미안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술을 가져 오지 않으려 했는데… 솔직히 자연을 벗삼아 한잔 하고 싶었거든. 세파에 찌든 나 자신을 돌아보며 말이지.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고, 때론 서로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곤 하는 가엾은 우리네 인생. 끝없는 우주 속에서 그것은 티끌처럼 느껴져. 당신, 마음고생이 많겠지. 그래도 가시밭길 같은 이민생활을 잘 참고 있는 당신이 정말 고맙기도 해…” 그의 긴 고백에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이들은 지쳐 잠들었는지 잠잠하다. 둘만의 시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숨소리가 들린다. 마치 깊고 푸른 밤을 떠도는 수많은 별들의 속삭임 같았다. PS:미국에 와서 얼마안돼 가족을 데리고 사막에 갔었습니다. LA에서 차로 3시간쯤 달려 팜 스프링스를 지나면 '조수아 트리'라는 사막이 나옵니다. 조수아(Joshua)는 일명 여호수아 나무로 기이하게 생겨 멀리서 보면 마치 사람같은 형체가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사막 곳곳에는 이런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볼만합니다.사막의 여름은 화씨 평균 100도(섭씨 37.8도)이상으로 마치 불구덩이에 온듯 합니다. 이 꽁트는 실제 겪었던 일이 아니고 술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