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김상국

김상국

[꽁트]아이 러브 베이비!



	1. 저녁상을 물리고 난 뒤 정신씨는 신문을 보더니 배꼽을 쥐고 웃었다. 그러자 설거지를 하던 하 여사는 “무슨 기사가 났기에 그렇게 좋아 할까”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 하나 더 있었음 좋겠어.” 의외의 말이었다. 하 여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남자가 아이를 한 명 더 갖고 싶다고 하는데 대체 어찌하면 좋은가. 접시를 닦던 손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이런 힘 빠짐 현상은 다리 쪽으로 빠르게 옮겨 갔다.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방금 한 말 진담이에요, 아니면 농담이에요?” “이봐. 내가 언제 농담하는 것 봤어.” 겸연쩍은 듯 고개를 떨군 정신씨가 슬쩍 곁눈질로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꺼내고 싶었던 말이기에 후회하지 않았다. “60대 여성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잖아. 고령의 산모와 아기는 모두 건강하다고 나와 있군. 참 신기하지 않아?” 하 여사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놀라는군. 또 있어. 요즘 한인타운에 ‘방미 출산’이 늘고 있다는 거야. 물론 속셈은 시민권 아이 만들기 위한 것이지. 아이가 시민권을 가질 경우 자라면서 각종 복지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거든.” 굳어진 하 여사의 얼굴은 어느새 파랗게 변했다.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남편이란 작자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가슴에 박히는 것이었다. 하 여사가 어디 20대인가. 40줄 초반을 바라보는 중년이 아닌가. 그러잖아도 쌍둥이 딸을 놓고 몸조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그 뭐냐, 골다공증 약을 먹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 그 아이들은 커서 하이 스쿨에 다니고 있지만 하 여사의 뇌리에는 육아의 고통이 떠나질 않았다. 쌍둥이를 키우느라 겪었던 온갖 고초가 흑백 인화지처럼 각인돼 있는 것이었다. 박봉의 공무원이었던 정신씨. 빠듯한 생활에 갓난애 둘을 키우려니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자라면서 아프기도 잦았던 쌍둥이여서 유난히 병원 신세를 많이 져 생활비도 만만찮았다. 관악산이 바라다 보이는 신림동 골짜기 15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살면서도 정신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딸딸이 아빠지만 이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겠노라고 굳게 다짐한 것이다. 하지만 정신씨는 쌍둥이 딸을 얻고도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고 어딘가 불안했다. 백일기도, 부부관계 전 30일간 금욕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됐지만 하늘의 섭리를 거역할 순 없었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으려는 하 여사는 쌍둥이 출산 이후 두 번의 소파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수술을 받고 나서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꿈틀거리는 태아를 긁어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런 뒤로 밤마다 이상한 악몽에 시달려 온몸에 식은땀이 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하 여사는 아들타령을 하는 남편을 증오하기도 했다. 3대 독자인 정신씨는 시골에 계신 홀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얘야, 아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가 끊긴다”라는 어머니 말씀이 귓속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하 여사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시어머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쌍둥이 딸이 태어났을 때 시어머니의 안색을 기억했다.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 여사는 가부장 사회의 산물인 아들 선호사상이 구시대의 유물처럼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딸도 아들처럼 대를 잇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IMF 한파가 불어 닥치더니 청사에 인력감축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로 ‘퇴출바람’이었다. 50줄을 바라보는 정신씨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용직부터 자르더니 아니나 다를까 애꿎은 복지과로 먼저 불똥이 튀긴 것이다. 그야말로 황당했다. 경제도 어려운 국내상황에서 무얼 하며 가족 입에 풀칠을 한단 말인가. 막노동판 일자리 얻기도 쉽지 않았다. 굴지의 건설사들조차 도미노 부도로 넘어지다 보니 공사장은 온통 꽁꽁 얼어붙었다. 그러다 보니 노숙자들이 불어나 지하도를 메우게 됐고 인생을 비관해 자살한 사람들도 생겨났다. 정신씨가 그나마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재직시절 잘 알고 지내던 청소용역업체 사장 덕분이었다. 동년배인 왕 사장이 그의 딱한 처지를 듣고 선뜻 일자리를 내준 것이다. 새벽마다 야광조끼를 입고 청소차를 타고 골목을 누벼야 하는 힘든 일과. 그러다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몸에서 시큼하면서 비릿한 냄새가 배어났다. 아무리 털어도 몸 안으로 자꾸 파고 들었던 쓰레기 냄새. 손에 흙 한번 묻히지 않았던 그가 쓰디쓴 밑바닥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그러던 정신씨가 미국으로 오게 된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왕 사장의 소개로 미국 청소용역업체에 취업을 하게 된 것이다. 공무원이었던 경력이 크게 어필해서 인터뷰도 무난히 마쳤다. 비자를 받아 쥔 그는 가슴이 떨렸다. 새로운 세상에서 멋지게 살아 보리라 다짐하면서…. “나도 당신 마음 알아요. 하지만 이제와서 아이를 낳을 순 없잖아요. 나이도 그렇고 몸도 성치 않은데 아이 낳다가 죽든지 뭔 일이 생긴다면 좋겠어요?” 정신씨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하 여사는 설거지를 다시 시작했다. 세제를 스펀지에 묻혀 거품을 낸 뒤 닦으므로 손이 매우 미끄러웠다. 바로 그 때 쨍그랑 하며 접시 하나가 싱크대에 부딪혀 깨졌고 그녀는 접시 조각의 날카로운 부분에 그만 손가락을 배이고 말았다.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이런 사고는 미국에 온 이후 처음이었다. 2.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정신씨와 하 여사의 사이에 험악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하 여사는 의도적으로 잠자리를 피해 딸 아이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녀의 얼음처럼 차가운 태도는 한 달 이상이나 지속됐다. 평소 애교스럽던 말투는 온데 간데 없고 말 붙이기가 무서우리만치 퉁명스러워졌다. 정신씨는 회사에 가서도 아내의 자세가 못마땅해 도무지 일손이 잡히질 않았다. 무엇 보다 아이 얘기를 했다고 이렇게까지 나올 수 있느냐는 괘씸한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말할 수 없는 고독이 가슴을 후려치곤 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것만 해도 힘겨운데 이런 정신적인 고통까지 겪어야 하다니.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아내의 그런 행동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가뜩이나 유교 집안에서 성장한 정신씨의 기준에선 아내의 행동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밤에 술 마시는 일도 잦아졌다. 때로는 동료들과 마셨지만 주로 혼자 마셨다. 어느 날 타운 어느 선술집이었는데 정신씨는 소주 2병을 들이키고 나서 꽤 취해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아범아, 아들이 있어야 대를 잇는다.” 정신씨는 깜짝 놀라 얼굴을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때 저쪽에서 늘씬하게 생긴 여자가 선글래스를 끼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여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는 3병째 소주를 주문했다. “안녕하세요? 형, 저 모르겠어요?” 선글래스를 벗는 그녀의 얼굴. 하, 이게 얼마 만인가. 대학교 때 만난 서클 후배였다. 산악회였는데 복학 4학년 때 신입생인 그녀가 산악회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선배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늘 적극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우리 산악회의 꽃이었다. “정말 반갑구나. 근데 이 곳엔 어떻게?” “어떻게 오긴. 형이 가는 곳에 나라고 오지 못하라는 법이 있나요.” 당돌하게 말하는 그녀는 여전히 학창시절 그 분위기였다. 그런 그녀도 흐르는 세월을 잡을 수는 없었는지 마흔을 갓 넘긴 여인답게 눈가에 가뭇한 주름살이 깊게 패어 있었다. 그녀로부터 사연을 들어보니 이랬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국내에서 잘 나가는 중소기업 오너 2세와 중매로 결혼했는데 5년만에 성격차로 헤어졌다. 미국에서 유학 물까지 먹은 남편이 어찌나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지 매사 의견충돌이 잦았기 때문. 화가 나면 손찌검까지도 다반사였다. 돈하고 일만 알았지 인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괴짜 인간’이었다고 쓰라린 기억을 더듬었다. 그 남자와 이혼한 뒤 홀로서기로 당당하게 살아가려 했으나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이혼녀’라는 딱지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다행히 아이가 없었을 망정이지 아이 둘 정도 딸렸다면 어찌 됐을까. 게다가 친정 어머니는 딸의 불행을 아니 보겠다는 듯 재혼을 종용했다. 하여튼 편안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려고 태평양을 건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형은 이 곳에 어떻게 왔어? 형은 잘 나가는 공무원이었잖아요.” 잔을 계속 그녀에게 권한 정신씨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벌써 소주 네병째였다. 마취 주사를 맞은 듯 감각이 무디어졌다. 대학을 졸업한 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후배와 낯선 땅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난 형같은 타입이 좋았어.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고 어떤 투정을 부려도 모두 받아 주는 너른 가슴을 가진 그런 남자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형이 좋았거든.” 그녀도 술이 약해서인지 서너 잔 마셨는데도 자세가 흐트러졌다. 정신씨는 마치 블랙홀처럼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한때 그녀에 대한 사랑의 불을 지피지 못하고 돌아서 후회했던 한 남자의 감정이 금방이라도 살아나는 것 같았다. “형, 말 좀 해봐요. 지금도 나 좋아해?” 그녀는 취한 듯 머리를 비스듬히 정신씨 어깨로 기댔다. 그러자 그녀 머리칼에서 짙은 레몬 향이 풍겨 날아왔다. 아, 얼마만에 맡아보는 여자의 향기인가. 정신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녀를 와락 끌어 안았다. 그녀도 그의 품에 안겨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달콤한 입술은 정신씨의 뇌리를 더욱 몽롱하게 만들었다. 3. 미국에 온 이래로 첫 외박이었다. 호텔에서 눈을 떴을 때 이미 그녀는 없었다. 침대 위에는 그녀의 집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 한 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인지 종일 머리가 지근거리고 토할 것만 같았다. 어젯밤 일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곤 했다. 정신씨는 꿈을 꾼 것은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아내 얼굴이 오버랩됐다. 남편의 외박을 빌미로 아내는 분명히 이혼을 요구해올 것이다. 그러면 이혼법정에 서야 하고 이혼 뒤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귀여운 쌍둥이 딸은 또 누가 어떻게 키울까. 만가지 생각이 필름처럼 순식간에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되려 불안과 걱정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 한번 부딪혀 보는 거야. 정신씨는 퇴근 길에 꽃집에 들러 노란 장미 서른 아홉 송이를 샀다. 그런 뒤 서둘러 차를 몰아 아파트로 향했다. 방문을 열어 보니 인기척이 없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짐을 싸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간 것이 아닐까. 그 때였다. 식탁 위에는 정성스런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고 한쪽에는 하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정신씨는 조심스레 편지를 들었다. “사랑하는 당신께, 퇴근 후 술자리가 있을 때 미리 예기해주면 어디 덧나나요. 음주운전을 하지 않으려고 외박까지 해도 집안에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해줘야지 않나요? 한국에서도 그러더니 미국에 와서도 마찬가지네. 지금까지 당신과 잠자리를 피한 것은 당신이 미워서가 아니라 알다시피 몸이 쇠약해서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제왕절개를 해서라도 한 명 더 낳을 순 있어요. 오늘 타운 병원에 갔다 조금 늦을 거예요. 우선 이 상태에서 임신 가능한지 건강체크라도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서요. 한의원에 들러 보약도 지었어요. 일단 건강해야 아이도 튼튼한 법이니까. 저녁상 차렸으니까 많이 들고 설거지 좀 부탁해요. 알았죠? 늦지는 않을게요. 안녕.” 볼펜으로 또박또박 적은 편지를 읽은 정신씨는 또 한번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 여사가 이렇게 나올 줄 전혀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내에 대한 죄의식이 솟아났다. 정신씨는 어젯밤 후배가 두고 간 메모지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갈기갈기 찢었다. 그는 화장대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노란 장미 다발이 아내의 얼굴과 겹쳐지고 있었다. 쌍둥이 딸의 귀엽고 밝은 얼굴도 함께. 바로 그 순간 정신씨는 아들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털어버리기로 했다. (여성중앙 미주판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재미가 없더라도 이해해주시고 좋은 의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