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김상국

김상국

[꽁트] 사라진 모델의 꿈



	<사라진 모델의 꿈 > 아침 설거지를 막 끝낸 그녀는 비로소 한숨을 돌린다. 남편 출근 뒷바라지에 아이들 등교 준비. 이어지는 설거지와 빨래.그녀의 아침은 늘 전쟁통이다.그녀는 그런 전쟁을 10년째 치러오고 있다. 매일 치열한 전쟁을 치른 후의 짜릿함이란. 그녀에겐 날마다 자유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구속받지 않는 그런 시간.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종다리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그리 싱그럽지가 못하다. 소형 아파트라 그런지 사방이 답답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한낮의 집안 풍경이란 상상만 해도 덜컥 숨이 막힐 지경이다. 언제나 남들처럼 넓은 집에서 살아보나.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그래도 그녀는 희망을 노래한다. 장미빛 희망. 매일 아침 아무리 힘든 전쟁이라도 치러내지 못하랴. 그 어떤 절망도 희망 앞에선 무기력한 존재. 비가 갠 뒤 찬란하게 떠오르는 무지개를 바라보라. 어느덧 4월 꽃피고 새가 울때 아닌가. 여자의 마음이 부풀어지게 마련이다. 무슨 죄인이라고, 종일 집안에만 보릿자루마냥 처박혀 있을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생각에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른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다.자유시간? 그녀는 다시금 그 단어의 의미를 곰곰 씹어본다.일상의 권태에서 일탈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처녀 시절 못다 이룬 꿈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아저씨,열쇠 좀...우리 그 애가 학교에서 돌아오거든 전해주시면 고맙겠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열쇠꾸러미를 수위실 창문 안으로 휙 집어던지고는 종종걸음을 쳤다. "쯧쯧,무슨 여자가 맨날 저렇게 싸돌아다니는지." 끌끌 혀를 차며 수위 아저씨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아파트 정문을 빠져나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왈츠처럼 경쾌하다. 옷차림도 화사해 세련미가 처녀적 못지 않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그녀는 늘 자부심을 갖는다. 아직껏 처녀시절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형수술로 다진 각선미.처녀시절 유명하다는 피부미용실과 헬스클럽을 안방 드나들듯 해왔던 노력의 대가 아닌가. 요새 강남에서 잘 나간다는 XX모델학원.문을 열자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리듬에 맞춰 스텝을 밟고 있다. 하이힐을 신은 늘씬한 미녀들이 음악에 맞춰 행진할 때마다 엉덩이들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그녀는 무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번에 Y기획이 마련한 주부 패션모델 공개모집에 응시한 그녀는 마냥 꿈에 부풀어 있다. 그게 바로 그녀가 희망을 노래하는 이유.그녀의 눈에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모델을 아른거린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를 걸어가는 자신에게 쏠릴 숱한 시선들을 상상해본다. 단 1명을 뽑는 주부패션모델로 당당히 합격하게 되면 국내외 유명패션쇼는 그녀의 단골무대다. 게다가 운 좋으면 요즘 잘 나간다는 벤처의 CF모델 출연기회도 생긴다. 따라서 거액의 모델료를 거머쥐게 될 것이고 곰팡내나는 소형 아파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여고 학창시절 가졌던 일류모델의 꿈.미모로 치자면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부모의 완고함에 꿈을 실현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 꿈은 늘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부모의 성화에 못이겨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회사원인 그와 결혼했다. 그녀 남편은 한때 잘 나가던 대기업에서 기대주로서 성장했었다.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IMF가 닥쳤다. 인정 받던 그 역시 구조조정의 회오리를 피하지 못했다. 그 회오리는 적어도 그에겐 미국 플로리다 해변을 강타한 토네이도 보다 더 강했다. 심한 허탈감에 빠진 그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선배의 컨설팅회사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늘 불만투성이였다. 왜 더 완강하게 버텨보질 못했나. 남들처럼 빽이라도 없으면 유산이라도 많이 물려받을 것이지. 내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속내는 그런 원망으로 가득찼다. 남편은 그런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보, 나 모델 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어느날 그녀는 남편에게 다짜고짜 자신의 웅크린 욕망을 드러냈다. "뭐,당신이 모델 한다구. 웃기네." "아니 뭐라고요? 내가 뭐가 어때서 그래요." 남편은 예상외로 냉담했다. "망신살이 뻗쳐도 유분수지, 하고 많은 일중에 왜 하필이면 모델이야. 뭇 사내들 앞에서 허연 허벅지살 드러내놓고...그렇게 남의 눈요기거리가 되고 싶어 안달이야?" "당신,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모델들이 그 소릴 들으면 당장 집으로 쳐들어오겠어요." "그딴 소리 집어쳐." "아니 뭐예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데, 당신이 얼마나 잘났으면 아직도 이모양, 이꼴이예요? 남들처럼 번듯한 집도 없으면서 무슨 말이 많아요. 남들처럼 벤처나 차려서 떼돈을 벌든지. 이도 저도 아니고." 이때다 싶어 그녀의 불만은 물꼬 터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매일 아침 전쟁을 치르면서 쌓였던 감정이 화산처럼 폭발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듯 싶다.남편은 어이가 없었다. 아내에게 불꽃 보다 더 뜨거운 욕망이 활화산처럼 꿈틀대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2차 실기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그녀의 표정은 사뭇 흐뭇해 보인다. 물경 1백대1이 넘는 경쟁률이지만 자신만만했다.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이 어디로야 가겠는가.그동안 쏟아부은 노력은 또 어떻고. 2차만 통과하면 마지막 관문은 면접이므로 관행상 최종합격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그녀로선 그렇게 원했던 모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생각만 해도 날아갈 것만 같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다. 당장 패션모델이라도 된듯이.그래도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자. 합격자에겐 전화로 면접날짜를 개별통지하기로 돼 있어 느긋하게 기다릴 작정이다. "엄마,오늘은 안나가?" "으응,나갈 필요가 없게 됐구나. 바쁜 일은 모두 끝났고...참 너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엄마가 맛있는 것 사줄게." 그녀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초등학교 2학년짜리 아들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울컥 솟아오른다. 그런 속에서도 아들은 잘 자라줘 참 다행스럽다. 투명한 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이 따사롭다. 베란다 화분에서 벤자민이 짙은 녹음을 뿜어내고 있다. 생명이 저토록 신비한 것일까. 겨우내 시들하던 이파리도 흙기운을 빨아 저렇게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희망을 생각하자 그녀는 파르르르 가슴을 떨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엷은 안개에 휩싸인듯 도시가 허옇게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 10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도심속 풍경. 저쪽 나즈막한 아파트가 성냥갑 모양으로 시야에 잡힌다. 그녀는 생각한다. 산다는게 우습다고. 서로 지지고 볶고 아옹다옹 살아가는 삶의 군상들이 서글프게 여겨졌다. 왜 이리 살아야 하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때 그렇게 왜소해 보이는 인간세상 아닌가. 그래 커다란 야망을 가지자. 따분한 오후.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있으려니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녀는 연신 하품만 해대고 있다. 그럴때마다 그녀의 도툼한 입술 사이로 야릇한 괴성이 새어나오곤 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소스라쳤다.적막을 깨고 울려퍼지는 전화벨 소리 때문에. 혹시 합격을 알리는 전화가 아닐까.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집어든다. "여보세요, Y기획이죠?" "......" 조용하다.괴괴한 전파의 울림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다. 그런데 잠시후 또 벨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진짜 Y기획에서 걸려온 전화거니 하면서 수화기를 잽싸게 낚아챈다. 그런데 아뿔사, 어린 남자애의 목소리 같다. "누나, 심심하시죠? 우리 폰섹스 할까요?" 그녀는 하도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힌다. 또 그 놈의 장난전화다.점잖게 타일러도 보나 막무가내다. 벌써 몇번째인가. 그녀는 이대로는 도저히 분을 삭일수 없다. 꼭 노이로제에 걸린 것 같다.스토킹이 아닌가. 끊임없이 상대방을 괴롭히는 스토커들.수화기를 들면 끊고 또 걸려오고. 약속이나 한듯 계속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는 서랍 깊숙히 넣어뒀던 신경안정제 세알을 입속에 털어넣는다. 그래도 두통이 가시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단안을 내렸다. 코드를 뽑아버리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쑤시던 머리 속도 조금 가라앉는 것 같다. 이마와 등허리에 흘러내린 땀으로 흥건하다. 신경과민에 파도처럼 밀려온 피곤함이 그녀를 자리에서 넉장거리치게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갔다. 시간이 이토록 빨리 지나갔을까. 불현듯 합격여부가 궁금해졌다. 날짜를 보니 개별통지가 벌써 왔을 시기인데도 연락이 없어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떨어진 게 아닐까. 그놈의 장난질 전화 때문에 워낙 비몽사몽 지냈던 터라. 그녀는 직접 알아볼 생각에 서둘러 주최측에 전화를 걸었다. 산통이 깨질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미끈한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했다. "미안하게 됐군요. 개별통보하던 날 댁의 전화가 불통이더군요.아무리 해도 안되고, 2차합격은 하셨지만 다음날 바로 면접이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불합격처리하고 말았어요. 다음 기회에 또..." 달그락 하고 상대방의 전화 끝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이 칠흑처럼 캄캄해졌다. 애써 쌓아올린 공든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녀는 수화기를 벽에다 집어던졌다. 그러자 수화기의 파편이 그녀의 깨진 꿈과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오래전에 쓴 습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