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김상국

김상국

[꽁트]이상한 복권



	광장에서 지하도로 통하는 계단을 따라 가면 지하철역 구내. 매표소를 벗어날수록 조도가 낮아 희부옇다. 언제나 그렇듯 매표소 주변은 시끌벅적하다. 그는 고개를 떨궜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그해 겨울. 광장을 쩍쩍 갈라놓을 정도의 지독한 강추위를 피해 노숙자들은 지하철역 구내로 밀려들어온다. 훈훈한 온기가 그나마 다행이다. 그는 우선 목 좋은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아뿔사. 좋은 자리는 이미 약삭빠른 사람들 차지. 남루한 옷차림, 거렁뱅이 신세. 담요 한 장과 신문지가 그의 몸을 덮어주는 유일한 것. “이놈의 날씨가…” 목 좋은 곳을 잡지 못한 사람들은 이빨을 아드득 갈았다. 그래도 빈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복권판매소 옆. 판매소와 기둥 사이에 난 작은 틈새. 그게 그의 둥지인 셈이다. 그는 바닥에 신문지 몇 장을 깔고 고슴도치마냥 웅크렸다. 몸을 감싼 너덜너덜한 담요 사이로 냉기가 안개처럼 밀려왔다. 자꾸만 몸이 시리다. 오금도 절인다. “아∼”하는 비명이 입가에서 새어나왔다. 이렇게 동장군의 위세에 조금이라도 몸을 녹일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한 일. 그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울컥 설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왜 이리 비참하게 됐나. 개·돼지 보다 못한 내 인생…”. 그는 가슴의 털을 쥐어뜯었다. 그러자 증오가 밀려왔다. “죽일 년!”하고 그는 뇌까렸다. “어이, 김대리, 오늘 술 한잔 어때?” “여부가 있겠습니까.” 호방한 성격의 그가 술 자리 제안을 거절할 리 없었다. 명문대 법과를 나온 그가 원칠한 키에 허우대가 좋아 첫 인상은 좋았다. 그러나 너무 호방한 것이 오히려 자신의 약점이었다. 그날도 아내의 생일이었다. 그러나 부장의 한마디에 “ok”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게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됐다. 어쩌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모든 게 알콜 탓이었다. 룸살롱 아가씨들이 연신 양주병을 들여왔고, 그날 밤 물인지 양주인지 모를 정도로 마셨다. 그 이후는 어찌됐는지 필름이 뚝 잘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철창 속이 아닌가. 팔뚝을 꼬집어 봤다. 아팠다. 그렇다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당신, 기억 나? 당신 말이야 횡단보도에서 살인했어. 그것도 2명씩이나. 만취상태에서 차를 과속으로 몰다니 그게 살인행위가 아니고 뭐야. 그러고 뺑소니까지. 이제 당신은 끝장이야. ” 눈앞이 캄캄했다. 그놈의 부장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텐데 말이다. “자네 이번이 과장 승진 케이스야”하면서 꼬드긴 부장이 죽도록 미웠다. 그 놈의 승진 때문에 인생을 망치다니. 생각할수록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아내를 볼 염치도 없었다. 사람을 죽인 범죄자를 어떻게 남편이라고 부를 것인가. 일간지 사회면에도 그의 기사가 실렸을테니 말이다. 세월이 덧없이 흐르고 그는 출소했다. 세상이 많이 변해있었다. 아내가 보고 싶었다. 결혼한지 한 달만에 남편을 감방으로 보낸 아내가 얼마나 고통받았을까.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또 한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살던 전셋집을 찾아갔으나 아내는 온데 간데 없었다. 종적을 감춘 아내를 어디서 찾으랴. 당장 먹고 살 일이 까마득했다. 고아 출신인 그였기에 피붙이도 없는 처지. 가슴이 찢어질 듯 했다. 이제 또다시 혼자다. 그는 일단 공사장에서 일을 했다. 잠은 현장 컨테이너 막사에서 잤다. 하루하루 절망과 고독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알콜에 의지해야 했다. 마약 같은 알콜은 그나마 위안이 됐기 때문이다. 하루 벌어 술 사 마시고 하니 저축은 제로. 살금살금 마시던 게 이제 알콜중독증세로 발전했다.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 가뜩이나 IMF가 터져 경기가 얼어붙었고 일자리마저 구할 수 없었다. 거리에는 비슷한 처지의 노숙자들로 넘쳐났다. 몸은 갈수록 쇠약해졌고 정신은 몽유병자처럼 몽롱해져 도무지 사리를 분간할 수 없었다. 지하철역 구내는 노숙자들의 천국인가. 곰팡이 썩는 퀴퀴한 냄새를 맡은지도 어언 1년여. 한때 북적대던 노숙자들도 이제 서서히 자리를 뜨고 있다. 경기가 다시 좋아졌기 때문일까. 남은 자들의 슬픔. 몸이 쇠약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처지. 노숙자 수는 줄었지만 깡통에 ‘닷컴’을 새겨 다니는 노숙자들로 생겨났고 지하도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노숙자도 있었다. 복권판매소 옆 보금자리. 웅크린 등허리 위로 쏟아지는 멸시의 눈빛들. 그는 꿈쩍도 않는다. 마치 내동댕이쳐진 무슨 짐짝처럼. 다행스런 것은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무심한 발길질이 없다는 것. 그들은 복권의 숫자에만 시선이 고정돼 있어 짐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점잖게 생긴 신사가 복권판매소 앞에서 서성인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지갑을 꺼낸다. 전에 샀던 복권 한 뭉치의 숫자를 맞춰본다. 복권 중독에 빠진 신사의 머리칼이 심하게 흔들린다. “제기랄, 이번에도 꽝이잖아. ” 곳곳에서 복권 찢는 소리가 들린다. 찢어진 복권이 눈발처럼 흩날린다. 판매소 옆 쓰레기통 주위로 복권이 쌓인다. 저런 사람도 내일이면 또다시 복권을 살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만일 복권 1등에 당첨되면 이 비참한 거렁뱅이 생활도 한순간에 종친다. 시궁창 같은 이곳에서 잠을 잘 이유도 없다. 광장식당 아줌마가 버린 생선 썩은 냄새도 맡지 않아도 된다. 바로 그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복권판매소 앞을 서성이더니 홧김에 복권을 찢어갈긴다. 수 십 장, 아니 수 백 장은 될성싶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찢어진 복권이 수북했다. 그는 찢어진 복권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아니나 다를까. 찢어진 복권 더미 속에서 찢어지지 않는 복권 몇 장이 발견됐다. 참 신기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복권 판매소의 작은 구멍으로 복권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주인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아니, 뭐가 잘못 된 것인가. “1등이네요.” 꿈인가 생시인가. 팔뚝을 꼬집었다. 아팠다. 이만한 돈이면 일하지 않고도 평생 먹고 살 돈이다. 이렇게 횡재를 하려고 지금까지 이토록 고생을 했는가 보다. "오! 주여." 그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목이 터져도 좋다. 누가 이를 말리겠는가. 그때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순 시선이 쏠렸다. “저 사람들이 부러워서 저렇겠지.” 그때 누군가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눈을 떠보니 역무원 아닌가. “미쳤군. 지하철 역 구내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어떡합니까? 당장 여길 나가세요.” 이상한 꿈을 꾼 것이다. 허망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 꿈이 아니었던들…,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이제 보금자리마저 잃었다. 갈곳이 없다. 광장 밖으로 나온 그는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흐르는 눈물에 눈발이 스며들었다. (1997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