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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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싸우는 소
두 마리 소가 싸우고 있다.
누런 소와 검푸른 소가
머리를 맞대고 뿔싸움을 한다.
누런 소의 앙버틴 뒷발, 치켜든 꼬리,
굴곡진 등뼈, 힘차게 뻗은 앞발,
고개를 숙이고 눈을 부릅떴다.
뿔에 온힘이 실려
꼬리를 휘날리며
뒷발이 허공에 들린
검푸른 소의 휘어진 등뼈,
머리와 뿔이 들리면 끝장이다.
이제 막 고개를 돌리고
콧김을 뿜으며,
침을 질질 흘리면서
매정하게 돌아설지도 모른다.
들린 두 발이 땅에 닿으면
온통 진홍색 바탕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다.
굵고 검은 색으로 나타나는
황소의 근골(筋骨),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찰라,
검푸른 소와 누런 소,
싸움은 화면에 정지해 있다.
씩씩대는 거친 숨소리, 허연 콧김,
하얗게 흘리는 침이 마를 때까지
화면은 늘 정지해 있다.
이중섭
-달과 까마귀
노란 보름달이 떠오른다.
하늘 가득 떠 있다.
검고 굵은 실선
아래쪽에 걸려 있다.
노랗고 커다란 보름달.
달무리가 뜬 걸까.
얇은 구름이 가벼얍게
짙푸른 하늘을 덮고 있다.
까마귀 한 마리,
고개를 숙이며 날개짓을 한다.
또 한 마리,
얌전히 앉아 깃을 모으고,
전선 위의 제비처럼 날렵하게
까마귀 한 마리,
이제 막 전선 위에 앉아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는 중이다.
수직으로 내려앉는
또 한 마리의 까마귀,
노란 달을 가로질러
다가서는 노란 눈,
다섯 마리 까마귀의 눈은
모두 노랗다. 노란 눈 속에서
검은 눈동자, 익살스럽게 웃는다.
까마귀들은
부리를 벌리고 있다.
까악까악
서로 부르고 대답하고,
다정하다.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한 가족이 길을 떠나고 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뿔이 뭉툭한,
황소가 끄는 달구지 위에
제법 큰 아이가 소를 모는 자세로
엉거주춤 엉덩이를 빼고 서서
한 손으로 꼬리를 잡으려는 걸까.
파란 새를 잡으려는 걸까.
흰 저고리에 반물치마를 입은 아내는
뒤에 선 아이의 등허리를 잡고,
앞에 선 아이의 바지춤을 잡고,
뒤에 탄 아이는 허공을 나는
하얀 새를 두 손으로 잡으려 하고,
누렁 황소는 느릿느릿
앞발 하나를 직각으로 굽혀
내딛으려 한다. 자, 이제 출발이다.
코뚜레를 묶은 고삐를 잡고
한복을 입은 사나이 이제 막,
머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더 높이 하늘을 떠받들 듯이
왼손을 쭉 펴고 자, 이제 출발이다.
달구지 위에는
이삿짐 하나 보이지 않는데,
짙은 회색의 하늘과 땅,
하늘 가운데 검붉은 노을이 잡혀 있다.
황소의 잔등으로, 달구지 위로,
한 마리, 두 마리, 여러 마리 나비들.
타박타박 황톳길
어디까지 흘러갈까.
한 가족이 길을 떠나고 있다.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
눈이 온다.
소담스럽게 함박눈이 온다.
누추한 집 안에서 창 밖을 보며,
한 사내가 그리움에 넋을 잃는다.
집 뒤로 난 길 위에
검은 치마를 입은 아낙,
만세를 부르듯이
머리 위에 함지박을 이고,
눈밭을 걸어오고 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저만큼 눈발에 휘감기는
낡은 집 기둥, 검은 창 안으로
쏟아지는 함박눈 속에,
왼팔을 베고 스르르 잠이 드는
사내의 힘없는 가로 얼굴.
흙바람 벽엔 온통 흰 눈.
이제 거의 다 왔다.
강은 돌아오지 않는다.
늘 거기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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