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김종인

김종인

한여름우물속에서 길어올리는 한바가지 생명수 같은 시(詩)



	한여름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리는 한 바가지 생명수 같은 시(詩) -열대야 속에서 시 읽기 김종인 1.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밤 이 지리멸렬하고 어지러운 시대, 가치관의 혼란이 극에 달한 적반하장의 시대에 도종환 시인의 『슬픔의 뿌리』란 시집을 읽었다. 도종환 시인과 함께 『분단시대』란 동인 활동을 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분단시대 동인 활동, 아내의 죽음, 교육 운동과 구속, 해직과 복직, 전교조 활동과 지역 운동을 20여 년 감당해온 도종환 시인이야말로 온몸으로 역사의 현상을 누비며 정면으로 돌파해온 시인이 아닐까 한다. 순수하면서도 맑고, 깨끗하면서도 강한 정신의 소유자인 시인, 정직하고 심지가 곧은, 도무지 속세의 죄를 짓지 않을 것 같은 시인이 "요즘 몸이 조금 안 좋아 일을 멈추고 잠시 쉬면서" 속리산 속, 누옥의 황토방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언젠가 꼭 돌아와 꽃 같은 아이들과 함께 가르치며 배우기를 그렇게 소망하던 시인이 '몸이 좋지 않아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산 속에서 요양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도 안타깝고 서럽다. 그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를 읽어보면 "나무와 숲과 별과 벌레와 짐승과 우주와 나 자신과 고요와 평화를 다시 만났다"고 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깊은 사색과 명상에서 건져 올린 아름다운 산문들에서는 너무도 진한, 인간적인 향기가 물씬 풍긴다. 『슬픔의 뿌리』는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보다 2년 남짓 빨리 나온 시집이다. 그의 시는 진지하고 절실하며, 아름답고도 슬프다. 쓸쓸하다. 사랑과 번민, 반성의 정서 속에서 중년의 삶이 느끼는 근원적 쓸쓸함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본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쓸쓸한 세상" 전문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피고, 허공에 새들이 날고, 뜰에 나와 노래를 하고, 파도가 밀려오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세상은 쓸쓸할 뿐', 이 세상 모든 쓸쓸한 것들을 덮어버리는 눈은 쓸쓸하여 더욱 아름답지 않은가. 절실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신경림 시인이 시작 활동 50년을 맞아 신경림 시전집을 간행했다. 기념비적인 사건이며 정말 축하할 일이다. 시인이 어떤 글에서 "역시 시는 어디까지나 시 자신이 얘기할 뿐이다. 그밖에는 한갓 불필요한 군더더기일 뿐이다. 다만 시를 쓰면서 언제고 시 한 편 한 편이 바로 완성된 세계이고 우주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의 시에 대해서 변명하고 설명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말씀이다. "시란 모름지기 시대에 대한 대답"이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시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대가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인 영감은 현실과 생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시는 시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도종환의 시 "담쟁이"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 중 시 "담쟁이" 전문> 80년대 『분단시대』 동인 활동 이후 도종환 시인은 위의 시 담쟁이처럼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서두르지 않고, 여럿이 함께 손잡고,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담쟁이잎 하나가 수천 개의 담쟁이 잎을 이끌고 결국은 그 벽을 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왔다. 시가 곧 사람이요, 시대에 대한 대답이요, 절실함이다. 2. 시는 시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90년대 이후 시가 가벼워졌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편의 시를 읽고 삶과 인생에 대해 함께 웃고 울면서, 지난 삶을 반성하고 바람직한 삶에 대해 사색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것은 19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있었던 낭만적인 추억에 불과하다. 90년대 이후 이제 시들은 현란한 상품 이미지처럼 가볍고 찰라적인 것들에 탐닉하고 있다. 오늘날의 시는 그 본래적 의의를 상실한 채 지리멸렬한 상태이다. 설혹 세계와 자아의 동일성 회복이라는 시 본래의 임무에 충실한 시라고 하더라도 시는 이제 상품 물신화에 길들여져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것에 익숙한 독자 대중의 관심 밖에 밀려난 지 오래이다. 연일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열대야의 밤은 길다. 현란한 상품 이미지로 점철된 화려한 이미지의 시대에 아직도 시대 운운하면서 시를 읽는 것이 혹자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삭막한 열사의 사막과도 같은 시기에 한 바가지 생명수 같은 시는 없을까? 무릎을 탁 치는 그런 감동적인 시는 없을까? 한바탕 웃음이라도 내지를 수 있는 그런 통쾌한 시는 없을까? 그런 마음과 절실함을 무기 삼아 이 계절의 시들을 섭렵해 보았다. 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미군의 통치가 지속되면서 이라크 민중의 분노와 저항은 더욱 치열해져 가고 있는 작금, 정부에서는 애초 계획한 대로 이라크에 대규모 군대를 파병한다는 계획을 밀고 나가는 형상이다. 김선일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파병 원칙을 철회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신문기사 한 토막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9일 오후 3시부터 서울 광화문 교보 문고 앞에서 정부에 대해 이라크 파병 결정 철회를 요구하는 반전 평화 거리 시화전을 열고, 오후 7시 반부터 3시간 동안 시낭송회를 갖는다. 작가회의는 이 날 행사 개최와 관련, "전쟁은 인류의 근본적인 도덕을 말살하는 페스트요, 파병은 세계의 양심인류들에게 치명적인 독균을 매개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며 "문학 고유의 가치를 살려 반전 평화를 위해 고군 분투하는 양심사회세력에게 기운을, 국민들에게는 문학적 감성으로 양심을 건드려' 꺼트릴 수 없는 촛불을 지키자'고 외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행사는 연속적인 반전 평화 운동에 합심하겠다는 작가들의 의지를 밝히는 연대의 한마당이며,' 거리에 뒹구는 아픈 말들을 거두어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작가의 소임이 아니겠느냐'고 우리가 내걸었던 질문에 스스로 화답하는 날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작가회의는 "우리는 죽음-학살보다 더 확실한 현실을 본 적이 없기에 파병 앞에 붙은 어떤 수사도 인정할 수 없다"며 "내가 살기 위해 죄 없는 누군가를 죽일 수 없나니 그 마음이 죽음을 살릴 것"이라고 밝혔다. <어느 신문기사에서 간추림> 김일병 가지 말아라 이라크 전쟁은 가장 추악하고 가장 비겁한 전쟁이다 장소위 가지 말아라 이라크 전쟁은 백년전쟁이다 결코 내일 모레 끝나지 않는다 <고은> 신이여, 세상 벽에 가득한 저 지는 꽃잎들 돌아 쓰다듬으소서 평화의 뿌리 펄럭이소서 평화의 날개들<강은교> 식민지에서 감히 미국 놈들 허락도 안 받고, 그 날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30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지방도 56호선을 걸어간 죄로, 그리하여 이 땅 식민지 한반도에서 식민지의 딸로 태어난 죄로, 그리하여 미국놈들 장갑차에 깔려 죽은 게 효순이 미선이의 잘못인 것처럼, 선일씨 당신이 목 잘린 채 그 날 2004년 6월 22일 오후 10시20분 바그다드에서 팔루자 방향으로 35km 지점에 아스팔트 위에 폭탄과 함께 묶여 내동댕이쳐진 것도, 그리하여 우리와 아무런 원한도 있을 수 없는 이역만리 이라크에 당신의 모가지가 나뒹굴게 된 것도, 다, 당신 잘못입니다. 당신의 죄입니다. 아, 아, 이 저주받을 야만의 땅 식민지 한반도의 아들로 태어난 죄. <신현수> 아들아, 사람이 절대 해서는 안 될 게 있다. 뭐냐고? 억압에 못 이겨 자신을 파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 이런 짓이 바로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아들아, 가지 마라. 그 길은 사람의 길이 아니다. <서정홍> 자유, 화해, 평화, 상생, 인권, 생명, 이런 단어들을 사용해온 것이 부끄럽다. 인간의 생명을 제물로 삼는 백정의 나라 미국에 무릎을 꿇는 것이 국익이라고 말하는 천박하고 비열한 자본옹호주의가 역겹고, 그게 엄혹한 현실이라고 말하는 정당과 지도자를 지지했던 것이 부끄럽다. 생떼 같은 젊은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외치는 것이 전부인 것이 부끄럽다. <박두규> 살고 싶다! 절규하는 국민의 생명을 저버리는 나라. 오, 우리는 파리보다 못한 목숨을 이어가는 대한민국 국민. 우리의 생명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국익 앞에서 버려진 헌신짝이어라! 죽은 파리떼와 헌신짝이 쌓여서 마침내 무덤을 이룬 나라! 대통령이? 국가가? 아니다, 그들은 국민의 생명을 나 몰라라 했음을. 오, 누가 그 무덤에서 우리를 숨을 쉬게 해주랴. <윤동수> 위의 글들은 문인들의 반전평화 게릴라 글이다. 파병 철회를 요구하는 수백 만 명의 서명이 이어지고 있다. 성명서가 낭독되고 촛불 집회와 1인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시대의 정신이요, 목소리요, 질문이며, 대답이다. 위의 게릴라글들은 민족문학작가회의 홈페이지에 있는 수많은 반전평화시보다 더 절실한 외침이요,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한 편의 시가 아닌가! 3. 다시 시란 무엇인가 연일 계속되는 열대야에 시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고통일수도 있겠으나, 강박과 집착을 버리고 즐겁게, 무언가 기대하면서 시를 읽다보면 어느새 더위 자체를 잊어버리게 된다. 이 밤, 다시 시란 무엇인가를 되새겨 보자. 상식적으로 말해서 '시는 영혼을 스쳐 가는 감정의 순간적 표현이고, 주관성이 우세하며, 리듬과 비유를 적극적으로 채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체험의 압축적인 표현이고, 시인과 대상간의 순간적인 융합과 감정의 내면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운율적인 언어에 의해 이루어지는 개인적 체험의 순간적인 극화'라고 생각해 보자. 엘리어트의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말을 보더라도 시를 정의 내리는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다. 이 말은 시대에 따라서, 시인에 따라서, 시의 종류에 따라서 시를 보는 안목이 모두 다름을 말해 준다. 매받이는 사냥을 나가기 한달 전부터 가죽장갑을 낀 손등에 나를 앉히고 낯을 익혔다. 먹이를 조금씩 줄였고 사냥의 전야 나는 주려, 눈이 사납다. 그는 안다 알맞게 배가 고파야 꿩을 잡는다. 배가 부르면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 매받이는 안다. 결국 돌아와야 하는 나의 운명과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야성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서 꿩이 튀어오른다. <『창작과 비평』2004년 여름호 윤성학 '매' 전문> 시를 읽다가 우연히 위의 시에 눈이 멈췄다. 매받이가 길들인 매를 가지고 매사냥을 하는 장면이다. 현대 사회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인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모두 매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알맞게 배가 고파야 꿩을 잡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배가 부르면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그는 늘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내게 준다. 결국은 돌아와야만 하는 운명과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야성이 만나는 그 순간 꿩이 튀어 오르고, 매는 꿩을 향해 쏜살같이 내려꽂힌다.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매를 기다리는 음흉한 매받이의 미소를 매는 결코 알아채지 못한다. 알맞게 배가 부른 곳으로 결국 돌아와야 하는 우리들의 운명, 그곳이 우리들의 사회요, 직장이요, 가정이요, 국가라는 이름이 아닐까. 튀어 오르는 꿩을 내버려두고 돌아서는 곳에 자유가 있다는 것을 매가 알아차릴 날이 있을까. 시를 사랑하는 춘천의 어떤 분은 "길들여지는 자, 도구로 쓰이는 자의 분노가 튀어 오르는군요. 운명>야성/운명=야성/운명<야성의 갈등이 꿩에서 만나다? 스스로 길들여지고 있음을, 한 달을 두고 줄어드는 먹이와 사나워지는 눈의 함수관계를, 매받이의 수법을 익히 알면서도 돌아와야 하는 상황은 얼마나 잔인하고 그악스러운가."라며 시와 우리 사회를 꿰뚫어 보고 있다. 지극히 맞는 말씀이다. 그 시대와 사회를 한 눈에 꿰뚫어보고 통쾌하게 한 방 먹이는 시를 만날 때의 즐거움이란! 늙은 말채나무 갈라진 수피 위에 손가락 마디 만한 투명한 껍질이 붙어 있다. 느리게 기어가는 자세 매미 한 마리 살다 간 빈집이다. 등허리 윤기 위 햇살들 놀고 있다. 한 올 습기까지 빠져나가 손대면 바삭 부서질 것이다. 가슴 가로지른 뾰족한 바늘잎 주름진 꽁무니며 코 언저리의 솜털까지 흔적 아슬하다 접혀진 다리와 꺼칠한 발톱 틈새 미처 털어 내지 못한 진흙이 가난처럼 묻어있다. 한 때는 몸이었을 얇은 막 흙 속을 뚫고 느리게 올라 등허리 금갈라 옷 벗으려 먼저 빼낸 앞발의 자세가 물음표를 그리며 공중에 멈춰 있다. 몸 빠져나가는 순간 털썩, 소리도 없이 너만 남았으리 몇 해를 뒤집어쓰고 지낸 살 한낱 껍질이 되어 있다. 짝을 찾아 울음통 눌러대는 매미소리 어지러운 대낮 어둔 땅 속 살았을 생명의 거처 좌탈의 흔적에 자꾸만 눈이 깊어진다. <『시와 사람』2004년 여름호 김채원 "매미 허물" 전문> 열대야의 밤이 깊어간다. 밤에도 매미가 울다니! 문득 학사대 위 벚나무 숲에서 매미가 우는 소리를 듣는다. 밤에 우는 매미 소리는 왠지 슬프다. 가락도 느리고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김채원의 시를 다시 읽어본다. 이교상 시인은 이 시를 두고 "매미의 허물을 보고 시인은 어쩌면 자신과 세상을 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몇 번의 껍질을 벗고 벗어도 보이지 않는 저 아득한 낭떠러지를 시인은 매미의 울음소리로 허공에 날려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매미 허물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집요하리만큼 매미 허물을 물고늘어진다. 여름날에 매미가 목놓아 울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시적 감동이란 깊이와 일치한다."라고 그 감상을 말했는데, 누구나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시이다. 전체 26행 중 마지막 4행을 제외하면 모두 매미 허물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묘사하고 있다. '손가락 마디 만한 투명한 껍질', '한 올 습기까지 빠져나가 손대면 바삭 부서질 것' 같은 매미 허물은 '가슴 가로지른 뾰족한 바늘잎/ 주름진 꽁무니며 코 언저리의 솜털'과 '물음표를 그리며 공중에 멈춰'선 자세까지 너무도 선명하다. 극세밀화를 보는 듯하다. '다리와 꺼칠한 발톱 틈새/ 미처 털어 내지 못한 진흙'이 가난처럼 묻어 있는 매미 허물을 보고 '털썩, 소리도 없이 너만 남았으리'에 와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낱 껍질만 남은 우리네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지나친 상상일까? 김대호 시인은 "하나의 사물 혹은 현상을 시인 나름대로 구체성을 가지고 은유화하는 기법이 뛰어나다. 거의 버릴 것 없는 문장 구성과 시상의 정교함이 먹이를 쥔 짐승의 이빨처럼 날카롭다. 특히 '주름진 꽁무니며 코 언저리의 솜털까지/ 흔적 아슬하다'라고 하는 문장은 정확하면서 애절하다. 시의 메타포가 그 정신성을 향하고 있다면, 이 구절이 그에 적절한 예가 아닐까?"라고 했는데, 사실적 묘사만 따라가며 읽어도 긴장이 끝까지 유지되는 시이다. 끝났다. 모든 길은 또 이렇게 시작되었다. 땅끝마을 땅끝에다가 슬쩍 발끝을 갖다대 보고는 씁쓸히 웃는다. 가파른 언덕 아래 밤바다 파도소리가 폭풍을 안고 거칠다. 지느러미, 부레가 없는 지난날의 절망 따위여 포말, 포말, 캄캄하게 에워싸며 파랑치던 야유를 기억한다. 다시 출발하자고 막 돌아섰으나 질풍노도라는 말, 혹은 말 저놈의 갈기를 잡고 올라타 본 적 없다. 나는 한 번도 부려먹어 보지 못한 세월, 세월이 끝내준 것이라고는 도대체 청춘뿐이다. <『작가세계』여름호 문인수 "땅끝" 부분> 아, 천년 묵은 그 숲이 첫날처럼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시커먼 고목 어디에 그렇게 연한 피를 숨겼는지 병아리 부리 같은 새잎들이 뾰족뾰족 각질을 뚫고 나왔다.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 톡톡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온 숲에서 달콤한, 솜털 뽀얀 아가 냄새가 났다. 봄바람은 요람인 듯 가지를 흔들고 새잎 아가들은 연한 입술로 옹알이를 한다. 참, 그만 모든 것 내던지고 싶은 이 만신창이 별에서 숲은 무슨 배짱인지 또 거뜬히 봄을 시작한다. 환장할 일이다. <『녹색평론』5 - 6호 조향미 "상림의 봄" 부분> 시계가 없어 더욱 자유로운 신전 화려하게 성장한 신도들은 서로의 안부 가볍게 물으며 눈길은 온통 외모로 쏠리지 반짝이는 신제품 의상을 걸친 화려한 신들 앞에서 그녀는 한없이 작아지지 신전의 긴 주랑 천천히 걸으며 그녀의 두 눈은 기쁨으로 충만하지 온 몸으로 퍼져 가는 구원의 희열 빛나는 성의 손끝만 스쳐도 천국에 들어선 듯 설레지 신에게 무한한 감사 돌리는 쇼핑하는 여자 신전에 오래 머물수록, 가계는 휘청거리고 가족들의 유대 느슨해지지 그러나,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고 행복해지는 그녀는 쇼핑하므로 늘 존재한다고 믿지 <『시와 사람』여름호 김화순 "쇼핑하는 여자" 부분> 쪼매 늦었죠, 니년은 그새 밀린 지각비가 얼만 줄이나 알어? 양지다방 김양은 허기만 더할 말대답 대신 스쿠터 엔진 소리로 콧방귀를 뀐다. 확연한 빚만 켜켜이 쌓여 있는 여름, 자귀나무 연분홍 꽃잎이 헤프게 흩날린다. 배알도 없이 헤프게 으응 자귀 자귀야 야들야들한 코맹맹이 꽃 입술 엉덩이 흔들어 날려보낸다 아찔한 속살 조마조마하게 내비치기도 하면서 (전 괜찮아요, 보는 놈만 속타지) 오빠 냉커피 한잔 더 탈까, 지지배 지지배배 읍내 제비 앞세운 김양이 쌩쌩 달려나간다. 연분홍 자귀꽃 흩뿌려진 땡볕 배달길, 따가운 빚이 신나게 까지고 있다. <『창작과 비평』여름호 박성우 "자귀꽃" 부분> 윤이월 보름달 속 늑대가 운다. 먼 길 달려와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 내 검은 옷에서 죽음의 냄새 날린다. 억만 광년 떨어진 뭇 별을 따서 들르신 대산골 할아버지 십년 된 아카시아 뿌리째 지고 온 숙부 분분한 묽은 흙 그림자 뼈 조각을 조심스럽게 잇는다. 바꾼 자리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비밀처럼 누워 있다. 수천의 눈을 가진 황사에 섞여 아우성치는 환상 얼굴이 깨진 내가 거뭇한 흙냄새와 함께 싸늘한 그림자를 옮긴다. 저 소리들. <『사람의 문학』여름호 노현수 "移葬"> 요즘 시들을 읽다보면 뭐가 뭔지 알기 힘든 '이미지를 중심으로 시상을 전개하는 시'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90년대까지는 리얼리즘을 중심으로 한 민족시 계열의 시와 순수시 계열의 모더니즘 시들이 확연히 그 경계를 긋고 있었는데, 2000년대 이후로 오면서 특히 눈이 띄는 것이 그 경계가 사라지고 서로서로 영향을 끼쳐 현대시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창비와 실천문학, 문학과 사회와 현대문학, 90년대 후반에 생겨난 많은 문학 잡지에 실리는 시들이 상당히 비슷해졌다는 인상이다. 이런 현상은 매우 바람직한 변모의 모습이라 생각되는데, 그 대신 눈에 확 띄는 시와 선이 굵은 시, 감동과 절실함으로 몸이 떨리는 그런 시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대시는 끝없이 새로운 형태를 만든다. 그 형식의 끝이 어디인 줄은 아무도 모른다. 이 현대성만 따라가다 보면 시를 쓰는 것이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시를 읽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다. 혹자는 현대성을 이해하고 이를 즐기지 못한 독자를 탓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적 실험이든 낡은 형태의 반복이든 간에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누구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문학은 감동이다. 그 감동의 크기가 크든 작든, 감동의 깊이가 얼마이든 간에 감동과 절실함이 없으면 시를 읽는 자체에 재미가 없어진다. 문학에 있어 기교는 절망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삶의 고충이 막다른 곳으로 몰릴 때 사는 방법이 새롭게 탄생하고, 말을 더 이상 하기 어려울 때 새로운 화법이 탄생한다. 많이 들었던 이야기도 전혀 다른 화법으로 말하거나, 색다른 입장에서 이야기할 때, 신선한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렇다고 이 계절에 나온 시들이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문인수 시인의 시는 경쾌하다. 인상적이다. 때로는 시적 흐름이 발랄하다. '끝났다.'로 시작하여 "모든 길-땅끝마을-밤바다 파도소리-지느러미-포말--파도의 갈기"로 이어지며 세상이 모두 끝난 것처럼 보이다가, 다시 출발하자고 마음먹는다. '세월이 끝내 준 것이라고는 도대체 청춘뿐'이라고 한탄하다가 말단끼리는 돈독한 넉넉한 품성을 보여준다. 시를 읽는 맛이 살아있다. 이 더운 열대야에 수박 한 조각 입이 무는 것처럼 웃음이 흐른다. 이것이 감동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향미 시인의 시 "상림의 봄"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 '환장할 일이다'를 읽으면 기가 막힌다. 참 그만 모든 것 내던지고 싶은 이 만신창이별에서 또 거뜬히 봄을 시작하는 자연에서 희망을 본다. 김화순의 "쇼핑하는 여자"는 가볍게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를 낸다. 현실에 대한 풍자와 아이러니가 중심을 이룬다. 쇼핑에 중독된 여자가 백화점이라는 소비의 신전에서 쇼핑을 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쇼핑에서 구원의 희열을 느낀다. 쇼핑하므로 존재하는, 쇼핑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녀에게 쇼핑은 거룩한 종교다. 가볍게 읽히지만 즐겁다. 박성우의 "자귀꽃"은 자귀나무의 꽃을 커피 배달하는 양지다방의 김양에게 비유하였다. 자귀나무의 잎은 밤이 되거나 흐리고 비 오는 날엔 미모사처럼 두 잎을 닫아 서로 합쳐진 채 밤을 보낸다. 짝수의 깃꼴겹잎이 합쳐진 모습은 사이좋은 부부를 상징하듯이 보여 옛날엔 부부의 방 창가에 심어 금슬 좋은 부부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 한자 이름도 합혼수(合婚樹), 야합수(夜合樹:밤에 합쳐지는 나무) 등으로 부른다. 박성우는 자귀라는 이름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자기라는 소리를 듣고, 연분홍 꽃잎이 헤프게 흩날리고, 코맹맹이 꽃 입술, 아찔한 속살로 김양의 이미지와 자귀나무 꽃의 이미지를 결합시키고 있다. 이번 수법이 시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아주 재미있다. "윤이월/ 보름달 속 늑대가 운다"로 시작되는 노현수의 "이장(移葬)"은 시적 화자가 이장을 하는 장면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잔잔한 시이지만, 눈에 보이는 그림이 선명하다. 4. 마무리 -열대야 속에서 시 읽기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가 쓴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 중에서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글이 있다. "비슷하다란 말 속에는 진짜가 아니다 가짜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무리 진짜같이 똑 같게 그려도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다. 연암은 다시 심사(心似)와 형사(形似)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심사란 표현이 달라도 정신이 같은 것이고, 형사란 겉모습은 같지만 실질은 다른 것이다. 형사는 결국 사에 그치지만, 심사는 결국 진에 도달한다. 진정한 닮음이란 껍데기에 있지 않다. 껍데기는 다른데도 알맹이가 같은 그런 닮음이라야 한다. 똑같이 하지 말아라. 똑같이 해서는 똑같이 될 수 없다. 모방은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의 장애를 극복해내야 하며, 아득한 과거가 지금과 나란히 만나고, 지구 저편의 일이 바로 내 일로 된다. 이것이 바로 연암이 말하는 심사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정형화된 것만을 흉내내 되풀이하는 것은 고인 물과 다름없다. 문장이든, 삶이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간에 지나간 것의 답습이 아닌 새로움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연암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또 다른 '까마귀의 날개빛(菱洋詩集序)'에 나오는 얘기를 살펴보자. 일반인들은 까마귀에게서 검은 빛깔 하나만을 잡아낼 뿐이지만, 연암은 햇빛 속에서 자주빛으로, 유금빛으로, 석록빛으로 보이는 까마귀를 발견한다. 까마귀를 누가 '검다'고 했는가? 고정된 틀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연암의 질타다. 너무도 비슷한 것이 넘치는 시대에 뭔가 다른 형식과 새로운 시각의 시, 한여름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리는 한 바가지 생명수 같은 시(詩)를 얻는다는 것은 정말 환장할 만큼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