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고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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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아버진 갓 세간 난 외딴집 울타리에 미루나무를 심었다
감나무, 가죽나무, 누룩나무, 살구나무, 뽕나무를 심었다
전쟁 뒤의 가난 속에서 순단이 누나를 잃고,
다섯 명의 자식들이 쑥쑥 자라는 것보다 더 빨리
감나무에 감이 누렇게 익고,
봄이면 살구나무는 집동 만한 구름덩이 화사한 살구꽃을 피웠다
미루나무는 더 높이높이 자라서
아홉 그루의 아름드리 가지에는
해마다 까치들이 둥지를 틀고,
떼까치도 봄이면 집을 올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흙담 위로 먹구렁이가 슬슬 기어다니곤 했다
초가집 지붕 밑 서까래 사이사이
참새들이 유난히 많은 집을 지었고,
우리는 손전등을 비추며 참새잡이를 했다
높다란 거름자리 위에는 황소가 되새김질을 하고
옥밭골에서 물이 내려오는 개울에는
송사리, 버들치, 피라미, 미꾸라지, 붕어들이 살았다
우리 집 마당으로 건너오는 구름다리 밑에선
살진 붕어들이 한 사발은 넉넉히 잡히곤 했다
우리 집 머리 위 옥밭골에는
수백 년 동안 내려오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상여집에는 꽃상여가 보관되어 있었고,
공동묘지 주위엔 토끼가 유난히 많았다 옥밭골 계곡에는
여우와 이리와 늑대가 어슬렁 어슬렁 내려오곤 했고,
옥밭골 계곡을 막아 만든 저수지에는
해마다 한둘이 물에 빠져 죽었다
저수지 물에 들어가면, 귀신들이 다리를 잡아당긴다고 했다
미숙이 처녀가 처음 물에 빠져 죽던 날,
온 동네 사람들이 시체라도 찾는다고 못가에 모여
작은 배에 장닭을 태우고 못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닭이 놀라 소리치며 우는 곳에서 시체를 찾았는데
퉁퉁 부은 얼굴이 보름달처럼 보였다
조금도 죽은 것 같지 않은 하얀 얼굴로 화장터로 갔다
율곡천과 감천이 만나는 냇가에서 화장을 한 후
미숙이 처녀의 영혼을 냇물에 띄워 보냈다
그 해 옥밭골 저수지는 한 해 내내 물이 말랐다
공동묘지 아래 상여집과 저수지 근처에는
미숙이 처녀의 귀신이 하얀 옷에 산발하고 날아 다딘다고 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가을 밤이면
공동묘지 근처에서 인불이 파랗게 날아다니곤 했다
그 집에서 우리는 안 마을 어귀로 이사를 했다
고구마를 심던 밭에서 흙벽돌을 찍었다
찰흙을 파서 체로 치고 짚을 썰어 넣고
발로 잘 밟은 후, 삽으로 퍼서 벽돌 틀에 넣고
밟은 뒤 빼내면 흙벽돌이 된다
한여름 내내 틈틈이 벽돌을 찍어 말려서 잘 쌓아두었다가
가을걷이를 끝내고 쌀쌀한 초겨울의 바람 속에서 집을 지었다
고구마 밭이던 집터를 고르고
새끼를 치고 횟가루로 줄을 그어
큰방, 건넛방, 대청, 마루, 부엌을 일자 남향으로 앉히고
외양간, 광, 창고, 작은방을 아래채에 동향으로 앉혔다
뒷간, 소달구지간은 서향으로 조그맣게 금을 그어 줄을 쳤다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고
아버지와 둘이서 터파기를 하고 돌을 채웠다
그 위에 흙벽돌로 담을 쌓았다
그 해 초겨울 너무너무 추웠다
낙엽이 채 지기도 전에 눈이 몹시 내렸다
한 길 두 길 올라가던 담이 무너지곤 했다
추를 내리고 수직을 잡아, 다시 담을 쌓아 올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한 자도 넘게 내리고 사위는 적막했다
새벽같이 달려가 보면 어제 쌓은 담이 또 무너져 있었다
공동묘지 아래 그 옛집 주위에 자라던 그 큰 미루나무를 베어
한 여름 내내 그늘에서 말렸다가
제재소에 가서 기둥으로 뽑았다
어느 날 밤, 달도 없는 캄캄한 밤,
아버지와 난 조마에 가서
말 구루마 3대에 서까래와 들보를 실었다
면에서 모르게, 지서에서 모르게,
남 몰래 밤을 타고 우리는 도둑놈처럼
말 구루마에 서까래를 싣고 야음을 타 집으로 왔다
조마 냇가를 건너야 했다
말 구루마 바퀴가 냇가 모래톱에 빠지자
하는 수 없이 서까래를 다 내린 다음,
구루마 바퀴를 빼내고 다시 실어야 했다
먼동이 부옇게 터 오는 새벽,
서리가 하얗게 내리던 그 캄캄하고 몹시 추웠던 밤,
아버지와 난 서까래를 무사히 우리 집터로 옮겼다
마당에 가득 찬 서까래 소나무를
진골에서 온 목수가 다듬어 서까래로 만들었다
마당 한 구석에는 가마솥을 걸고
대파와 배추와 돼지고기를 넣고
양념을 듬뿍듬뿍 넣어 국을 끓였다
농한기라 별 할 일이 없는 동네 어른들은
오며 가며 우리 집에 들러
돼지고기 국에 막걸리 한 사발 걸치고
무엇하나 도와 줄 게 없나 하고 기웃거렸다
서까래를 올리고, 상량식을 하고,
기와로 지붕을 덮고, 벽을 바르고,
구들을 놓고 대청과 마루를 덮고,
마침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
아버지와 난 붙들고 울고 싶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너나 없이 힘을 모아
마침내 완성한 우리 집,
마을 어른들은 자기 집인 양 좋아했다
아버지의 그 감격해 하던 모습을 난 잊지 못한다
그 옛날 집, 일곱 식구가 방 두 칸에서 살 때,
그렇게 가지고 싶은 내 방이 생기고
우리 집은 마을에서 대궐같이 커 보였다
어머닌 시집온 지 20년만에
대궐 같은 집이 생겼다고 너무너무 좋아했다
공동묘지 아래에 살면서, 상여집 가까이에 살면서
남의집살이를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난 기억한다
이제 더 이상 안 마을에 가 놀다가 밤 늦게 돌아갈 때,
공동묘지를 바라보며 눈을 감고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상여집과 옥밭골 저수지를 보면서
미숙이 처녀의 귀신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백 미터 먼 곳에서 우물물을 길러 먹지 않아도 되었다
갓집 아들이라고 놀림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하늘을 날 듯이 좋았다
그 집, 그렇게 지은 집에서 아버진,
여든 살, 호호백발이 되어 살고 있다
지금 가 보면 천장이 낮고 방이 좁아
가구하나 제대로 들여놓을 데가 없는 집,
아직도 외양간에서 쪼그리고 앉아
군불을 지펴야 하는 집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늙어가고 있는 그리운 고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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