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제일 나중에 쉴 터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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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제일 나중에 쉴 터의 노래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읽고
1.
신경림은 <문학예술>에「낮달」(1955),「갈대」,「석상」(1956)이 추천되어 시단활동을 시작하게 되어 그후 30여년간 때로는 삶의 좌표가 흝어진 어린 세대들에게 시골 할아버지처럼 회초리를 들기도 하고, 지난 시절 아픔을 같이 겪은 이들에게는 피와 살을 같이 한 친구가 되어 함께 눈물 흘리며 막걸리를 돌리기도 한다. 그는 초기에 전통적인 서정을 노래하였으나 그 후 10년 정도 활동을 중단한 다음 고향 충주 어름에 묻혀 농사도 짓고 광산꾼, 방물
장수, 아편거간꾼들을 쫓아 방랑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삶을 같이 나누게 된다. 그때의 체험은『농무(農舞)』의 밑바탕이 되었고, 그로인해 신경림은 한국문학사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고향의 뚝심으로 문단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다. 유종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농무』는) 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한때 창궐하던 시 경향을 복귀불능의 지경으로 추문화시켰다"라고『농무』가 일으킨 바람을 얘기하고 있다.
그 후 신경림은 꾸준히 걸죽한 시를 써오면서 문학적 가치의 잣대를 '민중의 수용적' 입장으로 옮겨놓고 있다. 신경림은 자신의 시를 '쉬운 시'라 말하고 있다. "아무리 민중의 삶에 깊이 뿌리박은 시, 민중의 삶에서 우러나온 글이라 해도 그것이 민중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글이라면 감히 이것을 좋은 글이라고 말하기 어렵다"(『우리 시의 이해』,한길사,1986)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신경림의 '쉬운 시'에 담긴 문학적 가치를 끌어 올릴 수
있다. 이는 "민중이 이해할 수 있는 시, 민중을 알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적 본바탕을 이루어 '민중의 시학'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쉬운 시'란 어려운 단어사용을 피하고 표현이 난해하지 않으며 누구나 읽어도 그 뜻을 헤아리기가 쉬운 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표현이 쉽다는 것이 결코 '수박 겉핥기'가 될 수는 없다. 그의 말대로 "표현이 쉽다는 것이 수준이 낮다는 것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표현 속에는 삶에 대한 넓고 깊은 통찰이 짙게 베여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순수한 우리말의 표현도 '쉬운 시'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
신경림의 최근작『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을 통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에 얽매여 "꺽정이처럼 울부짖"던 메마른 세월을 건너와 이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 발치에 가 묻힐 때"가 왔음을 스스로 느끼는 시인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나무의 거친 등걸과 굵은 나이테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의 애잔한 온기를 음미해보며『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 지니는 의의와 신경림 시의 변화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는 유독 자연을 소재로 한 시가 많다. 그 중에 나무를 노래한 시가 6편이 있는데 나무를 통해 삶의 다양한 모습들과 자세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은 "어깨와 등은 흉칙하게 일그러지고/ 팔과 다리는 망측스럽게 뒤틀"리면서도 "눈비에 몸을 맡기는 순수함에도 길이 들고/ 몸속에 벌레를 기르는 너그러움도 지니"(「정월 초하루, 소백산에서 해돋이를 맞다」)게 되는 것이다. 또한 혹한과 폭설에 시달리면서 "다시는 몸에 꽃도 열매도 맺지 않으리라" 맹세하고도 꽃으로 향기로운 봄을 기다리는 것이 또한 삶이 아니겠는가.
새파랗게 빛나는 잎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찢기고 할퀴어 흠집투성이인 가지가 보인다
벌레와 비바람에 썩고 잘려나간 밑둥이 보인다
돌과 흙에 짓눌린 뿌리가 보인다
얼어붙은 비탈길을 미끄러지는 쓰레기차가 보인다
이른 새벽 셔터를 올리는 시퍼렇게 터진 손이 보인다.
새벽길 삼백리를 달려온 찌그러진 작업화가 보인다
농익어 단 열매만을 뽐내는 저 큰 나무에
― 「찌그러진 작업화」전문
지나간 모든 날들을 스스로 장미빛 노을로 덧칠하면서.
제각기 무슨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면서.
―「흔적」부분
힘겹게 줄기를 타고 올라온 흙이
가지 끝에 연분홍 꽃망울로 불거진다
허위단심 강줄기를 쫓아 올라간 사람들이
검푸른 하늘에 별로 도드라진다
이내 온 들판이 연초록으로 물들리라
안개와 햇살로 짠 비단으로 덮이리라
추운 겨울을 이겨낸 더 많은 뿌리들이
벌건 상처를 누더기에 감춘 채
애처롭게 바위와 돌 틈에 달라붙어 있는
올 봄도 꽃샘바람은 칼끝처럼 맵더라도
―「올 봄의 꽃샘바람」전문
눈과 바람을 몰아내며 눈부신 햇살이 산과 들을 밟아 올라올 때 더 아름답게 빛나리라. 너의 몸 흠집투성일 터이니.
―「굴참 나무들을 위하여」부분
삶의 형태가 각기 다른 생(生)들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갈 즈음엔 "모두들 산비알에 똑같이 서"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흔적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 삶의 흔적은 "새파랗게 빛나는 잎"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가리워진 한켠엔 "찢기고 할퀴어 흠집투성이인 가지"와 "벌레와 비바람에 썩고 잘려나간 밑둥"의 고통이 있으며. "농익어 단 열매"의 결실을 위해선 "미끄러지는 쓰레기차"와 "시퍼렇게 터진 손","찌
그러진 작업화"의 정성과 땀이 있기 마련이다. 깊게 패인 나이테는 자신의 살을 파는 나무의 핏빛 아픔이다. 삶의 꽃을 피우기 위해선 그 아름다움 만큼의 고통은 단연한 몫이리라. 이렇게 생(生)의 어둠과 밝음의 양면을 관망(觀望)할 수 있음은 세월의 긴 바다를 건너 다시 뭍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를 찾은 시인의 이력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진감래(苦盡甘來)'라 고통 뒤에 복이 온다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통 뒤에 더한 고통이 가슴을 내리치는 불합리한 삶과 마주할 때가 있다.「올 봄의 꽃샘바람」에는 사계절을 다 겪고 다시 봄을 맞이하는 시인의 연륜이 스며져있다. 결코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 향기로운 바람속에 칼날같은 매서운 바람이 숨겨져 있음을, 추운 겨울을 견디고도 삶을 늦출 수 없는 생(生)
의 애처러움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맴더라도"에 담긴 시인의 의지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추운 겨울을 힘겹게 이겨낸 뿌리들에게 한번 더 가해지는 살을 베이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 그 바람이 아무리 "맵더라도" 그 바람까지도 굳굳하게 이겨낸 뿌리들로 인해 "온 들판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이 세상은 "안개와 햇살로 짠 비단으로 덮"힐 뿐 아니라 그 흠집투성이의 나무가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봄이 되면 나도 대지처럼 두꺼운 옷을 활짝 벗고
겨우내 감추어 두었던 보석들로 치장한 몸과 팔다리를
햇살과 바람으로 말끔히 씻어내고 싶지만, 들쳐보니
감추어 두었던 것은 누렇게 곪은 부스럼과 칙칙한 흉터뿐
그래도 나는 조심조심 내 몸에서 누더기를 걷어낸다
그 부스럼과 흉터에서 고이는 것이 맑은 이슬이 못될지라도
―「이슬」전문
「이슬」에서는 시인이 현실을 직면하는 두려움과 그 극복의지가 형상화되고 있다. 봄이 되어 두꺼운 옷을 활짝 벗어버리고 싶지만 "누렇게 곪은 부스럼과 칙칙한 흉터"가 감추어져 쉽게 옷을 벗을 수가 없다. 허나 두렵고 무서운 상처를 결코 외면하거나 덮어두지 않는다. 비록 "그 부스럼과 흉터에 고이는 것이 맑은 이슬이 못될지라도" 조심스럽게 내 몸에서 누더기를 걷어내기 시작한다. 그 누더기 속에는 "또 한번 겨울을 보낸 자"가 짊어지고 가야 할
살아남은 만큼의 몫이 숨겨져 있다. "흙이 되어버린 이들의 값진 눈"과 "물이 되어버린 이들의 뜨거운 피"를 비바람속에서 지켜 나가야하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과 하나일지라 곧 바르고 성실히 살아간다면 그 죽음 또한 이승에서의 의미있는 마지막 자리가 될 것이다. 살아오면서 몸에 걸친 화려함 속에서 시인은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얻었나보다"하고 겉옷을 버거워한다. 그리고는 교회의 종소리가 석양의 노을에 울려 퍼질 때 다시 두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버렸나보다"하고. 시인의 삶을 무겁게 했던 것들과 그의 눈을 감기우게 했
던 버려진 것들은 무엇인지「추운 가을」과 「세월이 참 많이도 가고」를 들어보자.
봄은 가난했다.
부모한테 물려받은 누더기를 걸치고
허기 속에서 듣던 뻐국새 울음,
할미꽃을 씹으며 코피가 터지고
애장으로 덮인 언덕에서는
진달래도 오들오들 꽃샘에 떨었다.
여름은 뜨거웠다.
돌과 몽둥이가 날던 포도,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눈이 쓰리던 시가,
노래와 아우성으로 설레던 광장,
우리들 쓰러진 어깨를
얼마나 많은 발길들이 짓이기고 지나갔던가.
이제 우리 겨우 그 긴 터널을 지나
누렇게 익은 들판이 바라보이는
코스모꽃 핀 큰길에 나와 섰구나.
지나간 여름을 되돌리려는 자들에 섞여,
오히려 그들에게 이끌리고 떠밀리면서.
어찌 모르랴, 이 가을이 추운 까닭을.
그 어둡던 터널을 함께 뚫고서 벗들의 얼굴을 잊어버린,
벗들의 목소리를 잊어버린, 모두들
모른다고, 그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고 서로 나서서
외치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운,
봄내 여름내 싸워서 이른 이 가을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보다도 추운 까닭을.
―「추운 가을」전문
들떠서 새 세상을 얘기하던 좁은 길에
꿈 대신 들어찬 승용차들
빌딩의 높은 벽 멀티비전의 어지러운 상품광고
길가에 나앉은 늙은 약장수들
추탕 국물을 묻힌 초췌한 수염
발에 밟히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전단들
……세상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
―「세월이 참 많이도 가고」부분
시인은 "단팥죽 사려 소리가 사라진 골목"에서 "소주방에서 몰려나오며 거는 핸드폰 소리"에 세월의 흐름을 느끼고, "60년대 말 사글세를 살던 곳"에 "스무층짜리 오피스텔"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세월이 가져다 준 괴리감에 빠진다. 이런 현실에서 아침마다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 햇빛, 바람, 나무, 돌과 꽃, 흙과 물, 새소리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향한다. 그 소리들에 취해 길을 따라가 보지만 금새 나의 눈엔 "부끄러운 내 젊은 날이 보"이고 "어리석은 내 목소리"는 나의 "목과 가슴을 옭아"맨다. "새장 속의 앵무새까지도 나를 비웃"는 것 같다. 감옥에서 나와 중국을 다녀 온 친구와 마주앉아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생각해 보지만 오로지 세월의 흐름과 세상의 변화만이 느껴진다.
계절또한 빌딩과 승용차 속에 갇혀있는 것일까. 가난한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을 거쳐 가을은 풍요로울만도 하건만, 겨울보다 더욱 추운 까닭은 무엇인가. 최루탄과 화염병, 노래와 아우성의 길을 지나 이제는 누렇게 익은 들판에 서 있지만, 눈에 어른거리는 것은 어두운 터널을 함께 뚫은 벗들의 모습과 그 벗들의 모습을 잊여버린 벗들의 모습이다. 결국 이 가을이 추운 까닭은 "이 세상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하는 두려움 때문에 함께 피를 토한 벗들
의 입술과 뜨거운 여름을 불끈 쥐던 벗들의 손을 잊어버 채, "이 세상 꽃으로 피었으면"하고 꿈꾸기에 여념이 없던 이들 때문이다. 이 나라 산과 들이 아름다운 것이 어디 꽃 때문만이겠는가. 지나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하나에도,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에도 자기 몫의 삶의 이유와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떠밀리는 세상살이에서도 자신의 어깨를 내밀어 길을 내주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바위」의 모습속에서 애잔한 아름다움을 배울 수도 있다. 그 아름다움은 "창가에 흐린 불빛을 끌어안고/ 우리들의 울음, 우리들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스스로 작은 울음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서/ 상처가 되고 아픔"(「세밑에 오는 눈」)이 되고, 그 아픔으로 인해 우리들의 상처가 어루만져지는 것이다.
3.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과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전문
노을이 물든 삼베옷을 입은 노파가 술을 거르고 누군가의 꿈을 싣고 바다에서 뭍으로 뭍에서 바다로 실어 나른 꿈들은 곱고 붉은 꽃으로 피었을 지금 사람들의 버려진 꿈은 아픈 울음으로 매달리고 세월은 파도소리에 실려간다. 어린시절의 그리움은 우리가 삶에 지쳐 숨쉬기조차 힘겨울 때 삶의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는 고향의 텃밭이 된다. 그 텃밭을 일구며 항상 그 자리에서 우리들의 발길을 기다려주시는 분, 바로 어머니시다.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모습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시절, 세상을 꿈꾸며 바다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와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잡아끄는 그리움의 숨결,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이 다시 세상의 전부가 된다. 또한 그의 눈에 남은 것이 또 하나 있으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속에서 다시 발견하게 된, 그렇게도 증오하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안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고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중략>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아버지의 그늘」부분
시인은 세상살이가 "좀체 마르지 않는/ 피와 눈물을 가슴속에 묻고/ 아물 줄 모르는 상처를/ 살갗 속에 감추"(「노고지리」)고 사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낙엽이 눈처럼 쌓이고 서북풍이 몰아칠 때 기러기는 "내 젊은 날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달빛 쏟아지는 날 "내 회한 속을"날아간다. 그 고통의 회랑을 돌아 거울 앞에 선 나는 놀라고 만다. 늘 당당하고 떳떳했던 내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 남아 있다. 팔도를 돌아다니시던 할아버지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고 개울가에 묻히시고, 산을 넘어 대처로 나가 살겠노라 노래를 부르시던 할머니는 느티나무가 다섯자쯤 자라자 할아버지 곁에 가 묻히셨다. 아버지는 큰 돈 잡겠다고 허황만 부리고는 중풍으로 쓰러져 앓다가 할아버지 발치에 가 누우셨다.「(더딘 느티나무」) 그 느티나무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달리고 뛰어왔는가. 그러나 생의 울타리가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것
인가.
최신 전자제품장수와 싸구려 기성복장수가 다투어 목청을
높힌다.
어떤 장꾼은 아침부터 시비만 하고, 어떤 장꾼은 종일 커
피전문점만 들락인다.
전대를 가득 돈으로 채우고도 소주릅은 볼이 부었고,
시금치 바구니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등 굽은 할머니는
천하태평이다.
생김새도 사는 것도 각양각색이라, 언청이와
혹부리가 길이 다르고, 꿈이 다르듯, 그러다가도
문득 국밥집에 들어와 석유난로에 얹은 손등을 보면 닮았
다.
쭈그러진 손등의 주름이 같고, 손바닥에 박인 못이 같다.
주름과 못 속으로 팬 깊고 푸른 상처가 서로 닮았다.
―「손」전문
신경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공간이 장터이다. 이웃들을 만나 소주 한잔 하기도 하고, 얼큰한 장국밥에 겉절이 얹어 막걸리 한사발 들이킬 수 있는 곳이 바로 장터이다. 신경림의 시에서 '서사성'은 시에 진솔한 맛을 더해 주어 읽는 이로 하여금 소박한 감정을 울어내어 준다. 밤새 마을의 집집마다 낮은 담을 넘어 장터로 흘러나오는 따뜻한 숨소리를 엿들으며, 성격도 생김새도 다르고 꿈도 다른 장꾼들의 질펀한 삶 속에서 서로 닮아있는 그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바로 손등에 잡힌 주름과 손바닥에 박힌 못의 "깊고 푸른 상처"가 그것이다. 힘겹게 살아온 일그러진 세월과 아픔의 흔적이 점점 무디어져 삶의 군살을 만들고 그 밑으로 푸르게 멍이 들어 있는 것이다.
큰 몽둥이 하나 끌고 쇠전에서 설치던
가마니 잘 짜던 내 족숙은 거적때기에 말리고
그 족숙 미워 시향도 피하던 다른 족형
칼빈총 멘 채 등에 칼 꽂고 금점굴에 처박히고
그놈의 높새바람 사납기도 하더니
참나무고 홰나무고 남아날 것 같지 않더니
이젠 족숙모 잡화전 모퉁이에서 국수틀을 돌리고
족형수 길 건너 노점에서 시루편을 팔고
마주치면 더러 입에 게거품을 물다가도
허허거리고 얻어온 시향떡도 나누고
그놈의 마파람 모질게도 하더니
진달래고 개나리고 다시 필 것 같지 않더니
마주치면 손톱을 세우고 이빨을 갈다가도
―「마주치면 손톱을 세우고 이빨을 갈다가도」전문
「마주치면 손톱을 세우고 이빨을 갈다가도」에서는 집안의 불화와 화해를 통해 민족의 상처와 그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한 집안의 숙질 사이면서도 서로 "마주치면 손톱을 세우고 이빨을 갈"던 두 사람이 사나운 높새바람으로 인해 몽둥이에 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었다. 이는 좌우의 이념이 만들어낸 민족의 비극이며 역사의 상흔이다.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
은 화해의 길이다. 모진 마파람 속에 굳굳히 살아가는 족숙모와 족형수는 일단 눈에 보이는 상처들이 너무 크고 삶에 지쳐 "마주치면 더러 입에 게거품을 물다가도" 이제는 "허허거리고 얻어온 시향떡도 나누"게 되었다. "진달래고 개나리고 다시 필 것 같지 않더니" 말이다.
이처럼 시향떡의 정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화해이다. 이와 같은 상처의 치유와 화해의 자리는 죽은 자들의 공간에서도 이루어진다. 우리는「묵뫼」를 통해 시인의 깊은 사고를 만날 수 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묵뫼에는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과 다리를 잃은 소년병과 나무꾼과 등짐장수와 청년단장과 그가 죽인 말강구가 땅에 묻혀 있다. 이들은 서로 이마를 맞댄 채 누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숲을 이루고 산을 이루어 이 세상을 만들고 있다. 이들은 생전에 알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바로 이웃하며 한 식구처럼 지내던 이들도 있다. 또한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인 이도 있고, 이념의 문제로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거나 심지어 총을 겨누기도 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살아생전 서로의 갈 길과 삶이 달랐다. 그러나 시인의 눈을 통해 역사의 깊은 상처와 민족의 비극적인 아픔도 땅이라는 모성성으로 따뜻하게 포용된다. 이들은 땅으로 돌아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자식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갈 터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4.
90년대의 격랑 속에서 시인은 몰락한 사회주의 현장에 가서 목도도 하고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의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기도 한다. 그가 본 현장은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물가에 "뭉그러진 시체다 떠내려"오고, "굶어 죽은 아이들의 흙빛 얼굴"이 하늘과 땅을 가득 메워 시인은 차마 그곳에서 발을 떼어놓지 못한다.
한 샤우져는 얼굴만큼 큰 귀거리를 했다.
한 샤우져는 가는 손목을 수갑 같은 금팔찌로 묶었다
내 옆에 앉은 키가 큰 샤우져는 전직이 교사
하룻밤에 받는 팁이 옛날 한달 치 봉급이다.
레인 드롭스 폴링 온 마이 헤드
한결같이 미국 노래만 부르려 드는 건
자본주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 한테는 아무래도
자본주의 본바닥 노래가 어울릴 것 같아서다
마오쩌둥을 아느냐니까 별걸 다 묻는다는 듯 키들거린다
가라오께집 앞에는 싸구려 밥집
허름한 옷차림의 중년들이 한떼 몰려나오다가
외국 사람들을 아양으로 배웅하는 샤우져들을 보고 섰다
50년전의 우리들 분노와 슬픔이 담긴 눈으로
네온에 반짝이는 굵은 금팔찌들을 보고 섰다
―「가라오께집 - 칭따오 기행」전문
그는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자본주의의 독한 병균으로 구석구석 썩어가기 시작한" 현장에서 우리들의 50전의 울분을 떠올린다. "강철 같은 사회주의자의 힘"은 오로지 "혁명으로 얻은 저희 이득을 지키는 데 쓰이고 있"다는 다리 짤린 늙은 투사의 말은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 흉직한 장갑차"와 함께 시인의 손에 땀이 배이게 한다.
호텔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니
머리에 띠를 두른 데모대가 아우성이다,
"정신대는 그네들의 상행위였다!"
"국가배상경사반대!"
화면은 바뀌어 이번에는 오사까 전자상가에
한국 관광객들이 몰려 법석을 떤다,
나라 안에서는 쪽발이 어쩌면서 치떴을 눈에
잔뜩 물욕의 핏발들이 서서.
그 미소는 저 아우성도 녹이고 말고.
아무렴, 저 뻔뻔스러움도 삭이겠지.
쿠다라 관음의 미소는 잔잔하다.
일그러진 입술, 어두운 눈빛, 그 천오백년의 잔잔한
슬픈 미소.
―「잔잔한, 슬픈 微笑 - 奈良 法隆寺에서 」부분
굽어진 역사의 허리와 삐뚫어진 민족의 눈과 입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 막 사회주의가 붕괴된 나라에서 황금빛 물결로 멍들어가기 시작한 거리와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지평은 없다"라고 쓰여진 일본의 주점 담벼락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본다. "비록 가난하지만 주체의 나라는 아름답다고 떠"들어 보지만 "주렸던 어린 날의 아픈 기억"은 역사의 울타리 안에서 이념의 체제보다 '인간'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위해 형제간에 이웃간에 총을 겨누었는가. 우리는 행복하게 살 집을 위해 울타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울타리에 맞는 집을 지어 그 집에 맞춰 살고 있지는 않은가.
5.
신경림 시는 생생한 민중의 역사요, 민중의 현장이다. 그의 시어에 담긴 아름다움은 농부의 손길에 담긴 풍요로움이다. 그의 시에는 허세와 가식이 없으며, 바짓단 걷어올려 정강이 드러내고 옷고름 헐렁거리며 손톱 밑에 때가 끼여도 바로 그 농부의 손톱 밑에 낀 묶은 때와 얼룩이야 말로 신경림 시의 참맛을 내는 진짜 손맛인 것이다.
『농무』이후로 그의 시가 30여년 동안 꾸준히 사랑을 받아오는 것은 시에 배인 '소박함'과 '진솔함'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변한 만큼 신경림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인물들의 변화를 한만수의 의견을 참고로 덧붙이자면『농무』에서는 '농민들의 분노와 좌절'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농민의 못난 모습'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다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잇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와서는『가난한 사랑 노래』를 통해 도시 빈민들의 모습은 "붉고 고운/ 질기고 단단한 열매로 맺"히고, 눈물은 "세상을 태우는 불꽃"으로 타오른다. 80년대를 거치면서 '농민과 도시빈민의 의식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시인의 사회의식이 좀더 고양되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90년대에 간행된 『길』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는가. 그들은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세상을 향해 분출'한다. 이는 민중의 의식이 능동적으로 발전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역사의 주체 세력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번『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에서는 지금까지의 '서사성'에서(주변의 객관적 삶에 대한 서사에 자신의 감정이 용해되어 있는) 조금 떨어져 나와, 자신의 내면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이번 시집에는 '서정성'이 많이 녹아 있다. 자신의 가족이야기를 할 만한 나이가 되었음은 그만큼의 삶의 '통찰성'이 더해졌음이다. 이 '통찰성'을 통해 세상의 양면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세상의 빛과 어둠을 보는 관(觀)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오늘날에 신경림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우리의 현재를 되돌아보고, 가시지 않은 민족의 아픔을 다시금 나누게 되는 자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그 자리는 세대간의 이해나 이념간의 이해를 통해 역사의 세기말을 마무리하는 한 과정이 될 것이다. 과거의 질곡에 얽매이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굳굳이 내딛고 앞으로 열심히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를 명백히 알아야하고 과거의 그늘을 확실히 알아
야 한다. 그래야 구름을 걷어내고 머리 위의 햇빛을 뜨겁게 쬘 수 있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신경림의 작품집들을 모두 정독하지 못한 채 그의 시에 대한 흐름을 논한 것은 다소 경솔함이 있었음을 밝히며, 생(生)을 논하기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연륜에 맞춰 글을 쓰다보니 부자연스러운 부분과 이해의 부족이 있음에 양해를 청한다.
(신경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창작과 비평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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