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열정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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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임팩트를 주는 무엇인가를 봤을 때 내 머리 속에는 복잡다단한 작은 생각들이 수십 가지 떠오른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인상적인 무엇인가를 조금 더 바라보고 있으면 생각들은 일종의 로드 맵으로 바뀌곤 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바라봤다면 그 로드맵 속에서 하나의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마치 이데아와 같은, 개별현상을 관통하는 커다란 결론이 떠오른다. 실제 이데아도, 결론도, 진리도 아니지만-나는 그것을 논하기에는 아직 순진하다고 해두고 싶다-이러한 일련의 작용을 통해 내 정신은 더 거룩한 것에 다가가는 연습을 한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피카소가 사물을 왜곡해서 그렸다는 표현에는 어패가 있다. 그는 말 그대로 생각하는 것을 그렸고, 그것은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 순간의 영감에 충실한 예술가였다. 서양 미술 오백년사에 일대 파란을 몰고 온 충격적이고 신선하며 자극적이고 따라서 관능적이기까지 한 화가였다.
예술가들은 역설 또는 반어법을 좋아한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피카소의 말도 그렇다. 왠지 하나의 격언 같다.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어린아이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가장 순수하고 깨끗하며 솔직한 것. 나이를 먹어 가면서 사람은 이러한 특성들을 잃기 마련이지만, 피카소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곧 그의 ‘열정의 정신’을 증명한다.
여기서 나는 어처구니 없게도, ‘바람둥이에 대한 변명’을 하나 하고 넘어가야겠다. 통속적으로 말하는 바람둥이의 뜻은 차치해두자. 피카소에게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정확히 몇 명인지 알 수 없다는 자체가 매력적이다. 누군가와의 첫 만남을 상기해보자. 그 자체로 설레고 새롭다.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모험에의 기대. 이러한 감정이 예술가에겐 끝없이 필요하다. 아니 그들은 이런 감정을 갈구한다. 따라서 바람둥이는 예술가이며 예술가는 바람둥이다. 영원히 멈추길 원하지 않고 끝없이 신선함을 원하는 정신이 부재된 상태에서 자신을 바람둥이라 이야기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 수많은 여자들은 왜 그를 사랑했을까. 그는 아마도 만났던 여자 모두를, 한 명 한 명을 특별하고 독립된, 개별적 존재로서 사랑해주었을 것이다. 모든 여자를 모두 사랑했다면, 그 사랑의 순간에 충실했다면, 이것은 어쩌면 억지로 상대방에 대한 영속적인 감정을 요구하는 것보다 진실된 것은 아닐까. 할아버지가 다 된 피카소의 곁에 머문 젊은 아가씨는 그의 열정을, 오직 그 정신을 사랑했다.
피카소를 거쳐간 여인들은 현명했다. 피카소가 ‘화가와 모델’에 몰두했던 것은 ‘그녀’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인들은 기꺼이 모델이 되었다. 피카소는 그들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눈에 보여지는 육체의 모습?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느낌’, 그녀들이 무의식적으로 피카소에게 던지는 ‘영감’이었다. 해설대로 그는 ‘사물의 외형보다는 진실에 초점을 맞춘 화가’였다. 그녀들은 피카소가 위대한 작품을 그리게 한 숨겨진 공신이었다. 그녀들은 끝까지 피카소에게 집착하지 않고, 영감을 주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피카소가 또 다른 여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결과적으로는’ 인정했다. 사랑이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열정의 반대말은 평화인 것일까? 피카소와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들 중에 프랑스와즈 질로는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고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가정다운 가정을 선사했다. 당시 피카소의 작품은 소박하고 평범한 가족의 소중함과 그에 따른 기쁨을 반영한다. 하지만 여기서 매우 결정적이고 중요한 해설이 하나 등장한다. ‘ 그러나 당시의 그림에서 질로에 대한 강렬함은 덜한 편이다.’ 일상의 작은 행복은 분명 가치있는 것이긴 하지만 역시나 열정적인 예술가가 받아들이기에는 지극히 평화로웠을까? 수없이 부딪히고 충돌하고 불안정할 정도로 색다른 것이 열정의 발산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예술가가 남과 다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말년에 피카소는 자신에게 남은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알고 더욱더 치열하게 작품에 몰두하여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인간은 죽음을 자각할 때 비로소 ‘보다 더’ 새롭게 변화하고 굳세어지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피카소는 과연 그랬을지 그건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죽음이 열정의 정신을 자극한다는 말이다. 뫼르소는 ‘뜨거운 햇빛 때문에’ 아랍인을 죽였고,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일종의 쾌감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한다. 거대한 정신의 세계를 지닌 인물은 죽음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통해 온전한 자기를 새길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겐 죽음이 필요하다. 육체가 죽었다 하더라도 정신을 가졌다면 그것은 곧 죽음에 저항한 것으로, 카네티의 말처럼 “정신이 너무나 실제적이라 죽음에 도전하며, 육체는 너무나 비실제적이라 극도로 오래 살더라도 겁낼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직 정신의 지속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전시회의 말머리에서 나는 ‘20세기를 풍미한 화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문구를 봤다. 누가 사라진다는 말인가? 그는 오히려 또렷이 살아있다.
‘그의 다양한 실험성으로 인해 그의 작품을 시기별로 분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열정의 정신이 발현된 작품을 보면서 사람들은 난해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과연 ‘난해하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겠다.”라는 단순한 해석으로는 불충분하다. ‘난해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이는 열정의 정신을 지닌 인물에 대한 일종의 존중이다. 열정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존중하게 하는 숭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림을 모른다. 내가 피카소를 찾은 것은 열정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내가 예술가를 연모하는 감정을 갖는 것은, 그들의 작품에 대한 설명적 해석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잠재된 나의 열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자극적’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런 때에 써야만 적합하다. 피카소를 통해 그려진 로드맵으로부터 열정의 정신이라는 결론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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