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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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이 지났다. 나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큰집에서 설날을 보내고 청주에 있는 외가로 갔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줄곧 큰외삼촌댁에서 명절을 보내고 있다.
올 명절에는 유난히 외할머니의 말씀이 소중하게 느껴졌다.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그 공부라는 핑계를 대고 명절에도 가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공부 한 자 보다 80년 넘게 인생을 살아오신 할머니의 말씀을 듣는 게 더 가치있는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외할머니는 내게 특별한 존재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모두 일찍 돌아가신 내게 조부모님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뿐이고, 엄마는 외동딸이다.
" 수경아, 이제 가서 자야지."
나는 대답을 드리는 대신 정말 오랜만에 할머니 옆에 누웠다.
할머니 냄새가 났다. 할머니랑 소꿉놀이 하던 기억, 솔방을 주우러 다니던 기억, 할머니가 해주신 옛날얘기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 아이구 기특혀. 수경아, 그래두 건강이 최고인겨. 항상 조심하고, 차 조심하고, 사람도 조심하고."
" 네. "
" 예전에 엄마가 너 낳았을 적에 간호사가 '할머니, 돈 버셨어요. 애기 쌍커풀이 진하잖아요.' 라구 그렸어. 그게 엊그저께 같은데 어이구 벌써 대학을 갔어."
그날 밤 할머니께서는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해주셨다.
" 예전에 할머니 학교 갈려구 그러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여자애가 배우면 못쓴다' 호통을 치셔가지구,학교 안가구 집에서 있으면 할머니 엄마가 '아이구 불쌍한 내새끼' 이렸었어. 할머니 오빠는 학교 끝나구 와가지구 먼저 나를 찾아갖구서는 손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 할머니가 '오빠, 왜?'라고 물으면 '아니야, 그냥 니가 불쌍해서. 학교 가고 싶은데 못 갔잖아.'하믄 내가 '아냐, 괜찮아.' 그러구. 느이 엄마는 양장점 차리고 싶다고 해서 의상학과 보내줄려구 했는데 그 때는 또 형편이 어려워서 못 보내구. "
나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주지는 않는다. 우정, 동지애, 정, 이성간의 느낌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하기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목적, 이유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다.
오래 전에 할머니의 희생이 있었고, 또 엄마의 희생이 더해져 오늘날의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나를 사랑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오늘을 산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는 오늘을 사는 우리를 위해 그렇게 살아오셨을 것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가족 없이 살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개인은 우선적으로 스스로를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 사회적 성공을 이루어 그로부터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를 반복한다. 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이 주는 공허감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 그러나 인간은 모든 걸 다 가졌다고 해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지 않으면 , 또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이런 와중에서 끝없이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끝없이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은 가족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족을 통해 그 공허감을 줄일 수 있고, 내 존재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족 없이 살기 힘든것이 아닐런지.
이렇게 우리에겐 가족뿐임에도 불구하고, 냉랭하게 변해만 가는 명절의 풍경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불가능한 것인 줄 알지만 이 소원을 다시 되뇌어 본다.
' 내가 할머니될때까지 우리 할머니 오래오래 살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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