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 긴 여운_봉사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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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날씨만큼 기분도 우울했다. 공연히 어젯밤 늦도록 눈 뜨고 있었던지라 늦잠을 자 버렸다. 일어나자마자 허겁지겁 재활원에 전화를 걸어 봉사 시간을 물었다. 하루에 세 번씩 , 세 시간 간격으로 일을 한단다. 나는 3시까지 가겠다고 말을 하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 썼다.
오후 2시 45분. 비는 아직도 끈질기게 내리고 있었다. 혼자 가기엔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친구와 함께 가기로 하고선, 집을 나섰다. 걸음은 터덜터덜.
친구에게 목적지는 ' 암사 재활원 ' 이라는 말을 건네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과 저마다의 목적으로 지하철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강물이 흐르는 것이 자연스럽듯,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이 자연스럽듯 많은 사람들이 제각의 모습을 하고 무표정으로 지하철에 올라 어디론가 토닥토닥 걸어가는 것이 우리에겐 더 이상 지루하지도 않은 일상이 되었다.
목적지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경찰 아저씨께 물어보자 고맙게도 사방팔방 헤매시며 도와주셨지만 찾진 못했다. 결국 버스까지 잘못타고 낯선 곳으로 흘러들어가다가 재활원에 다시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묻고 택시를 잡아탔다. 암사동 해물탕의 간판이 빛을 발하는 시끌벅적한 시내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들어가면 볼 수 있는 한적한 공간에 자리잡은 곳이었다.
비가 내려서 재활원의 운동장은 질퍽질퍽하였다. 우리가 걸어들어가자 문을 열고 한 아이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갑자기 떨렸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발표과제를 내밀 때도 떨렸고, 친구와 선생님과의 첫 대면에서도 떨렸고, 각종 자잘한 면접에서도 떨리기 그지 없었지만, 아이의 고개를 보자 문득 새로운 떨림을 느끼고는 조심스레 걸어들어갔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을 나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이고, 처음이라 떨린 것일까.
식당봉사를 하기 위해 미리 전화를 드리고 왔다고 누군가에게 말씀드리자 고개를 내밀었던 아이에게 식당가는 길을 가르쳐주라고 하였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우리를 안내하였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세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이미 일찍부터 아주머니 한 분을 돕고 계셨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나서, 봉사를 하러 왔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봉사를 하러 왔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발개졌다. 봉사가 무엇인지는 아느냐? 라는 질문을 받을 것만 같아서.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모두 다 잘 게 썰고 잘랐다. 어린 아이들과 누워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잘 게 자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아주머니의 말씀에서는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온 경륜이 묻어났다. 식당으로 와서 직접 식사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이 오기 전에 아이들과 직접 생활하는 자원 봉사자들이 와서 누워있는 아이들에게 먹일 밥을 가져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 아주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밥을 가져가는 그들의 모습이 내 눈에 여지껏 내가 할 수 없었던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로 비춰졌다. 무엇이든 조금만 여유롭고 깊게 생각하면 세상 모든 일들, 아주 작은 일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나의 동공을 겨낭한다...
아이들이 밥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분주해졌다. 아이들이 들어오자 작은 식당 안이 꼬마들의 이야기소리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아주 맛나게 밥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과 자원 봉사자들이 식사를 하는동안 빈그릇을 나르고 식탁을 닦았다. 모두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라 제대로 말을 하진 못했지만, 난 오랜만인지 또는 처음인지 진심으로 정성껏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노력했다. 꼬마아이들에게 맞추어 내 키를 낮추고 귀를 입가에 가까이 가져갔다. 빈그릇을 나르는 동안, 한 남자 아이가 나에게 ' 누나, 나도 다 먹었어. 가져가 ' 라고 이야기했다. 제대로 말할 순 없는 아이었지만, 그 한마디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처음 본 사람들에게 선뜻 친숙한 단어를 건넬 수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아이의 한마디가 난 지금 작지만 중요하고 소중한 일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에 와서 자신들을 돕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선뜻 ' 누나 ' 라는 말을 건넬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나만의 추측에. 갑자기 내 마음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엄숙해졌다.
나는 그 동안 왜 시작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나...
남자아이들이 밥을 다 먹고 나갔지만,아직 꼬마숙녀들은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어떤 자원 봉사자는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아이를 안고서 목에는 수건을 채우고 밥을 떠먹였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직접 눈으로 그 장면과 맞서면... 힘든 일이었다. 또 다른 자원 봉사자는 바르게 밥을 먹지 않는 꼬마숙녀에게 꾸중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곧 잘못을 깨닫고 식사를 계속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이 아주,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들에겐 낯선 사람인 내가, 아직 처음이라 서툰 나를 잠시 멈추게 할 만한 힘을 지닌 그런 자연스러움...
꼬마숙녀에게도 내가 서툴 게 보였는지 한 아이가 우유팩은 이곳에다 두어야 한다, 밥그릇은 이리로 가져가야 한다며 일일이 내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나는 작은 손이 가리키는 데로 따라갔다. 몸에는 장애가 있고 나이는 어리지만, 나보다 무언가를 잘 알고 있는 꼬마 숙녀의 손동작과 말에 귀를 귀울여보았다. 야무진 꼬마숙녀.
착한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사람, 봉사에 헌신적인 사람은 이성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다. 무엇이 다른이들과 자신에게 합리적이고 유익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 착하다' 또는 ' 착한 일 ' 이라는 관념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의문을 가져보았다. 우리가 소위 ' 착하다 ' 라는 표현이나 ' 착한 일 ' 이라고 규정짓는 잣대는 가상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돕는다는 일 또는 봉사라고 이름지어진 일의 내면을 꿰뚫는다면 실제로 ' 너는 봉사를 열심히 했으니 착하구나, 착한 일을 했구나 ' 라는 것은 가상의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봉사를 한다는 것은 착한일이 아니라 ' 유익한 일 , 이성적인 일' 이다.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을 도왔다는 대가로 나 자신의 성숙을 이루어낼 수 있다. 계산이 잘 맞아떨어지는 일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서, 봉사라는 것의 내면을 꿰뚫었다면 봉사는 착한일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똑똑한 일을 했다는 표현이 훨씬 잘 맞아떨어진다는 사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봉사의 의미를 안다면 그것은 희생적으로 착한 일이라는 것을 하는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일 게다. 오는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어 이해타산이 맞고, 나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덤으로 얻을 수도 있으므로 결국엔, 남을 도우면서도 나를 더욱 위하는 길이 아닌가. 나를 위해서라면 어떤 인간인들 무엇을 하지 않겠는가. 학생들이 미래의 자신들을 위해 당연히 공부를 하는 것처럼 봉사도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이 모두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지라, 사람들이 봉사라는 것을 비이성적인 자신들의 기준에서 ' 착한 일 ' 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짓고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에 봉사는 어느 날 ' 대단히 희생적이고 어려운 일' 이 되었다. 봉사자는 ' 착한 일 '을 했다는 이유로 칭송을 듣는다. 그들이 별로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 아니라, 봉사라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나 자원봉사자들이 칭송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 이성적인 사고 '를 했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한 일을 나는 여태껏 하지 않았으니, 나를 위한 소중한, 근본적인 영양분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오늘은 불과 첫날이었다. 아직도 내가 갈 길은 멀고, 어여쁜 아이들을 진실로 감싸주기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그들에게 밥을 주고, 식사 후를 담당하는 것이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그것을 통해 아이들을 이해하고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 첫 날 ' 인 오늘 했다. 내가 봉사를 한 시간은 겨우 세 시간 남짓이었다. 하지만 여운은 길다. 그 여운이 길어 이렇게 글로 흔적을 남기고 있지 않은가. 짧은 시간 , 긴 여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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