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의 경계에서 - 그리운, 아련한것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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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레나를 보면, 열 세 살 먹은 사춘기 소년 레나토의 아름답고도 순수한 기억들이 하나 둘 펼쳐진다. 말레나를 정욕의 대상으로만 보는 어른들과 달리 소년 레나토의 눈동자에는 말레나라는 여인은 지켜주고 싶은 사랑의 대상으로 비춰진다. 그리고 레나토는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지만, 말레나. 그 여인만은 잊지 못하고 가슴속에 담아둔 채 살아간다. 유년의 기억이라는 것, 그렇게 순수하고도 강렬한 유년의 기억이라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가슴아픈 순수함으로 몰아넣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나의 유년의 기억... 그런 것들이다. 나의 유년의 기억은 80년 후반부터 그리고 90년대까지. 아직 어려 유년의 기억이랄 것도 없다. 그저 어릴 적에 어린이였을 적에의 그런 기억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소중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듯 훗날 자라났을 때 어릴 적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돌아보면서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리라. 1년전의 사진만 봐도 그리움의 눈물이 차오르고 반가움의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하루하루 성장해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지나면 모두 허공의 뜬구름처럼 허탈하고 시원섭섭한 그것들에 대하여.
나의 유년의 기억이라 함은 이런 것들이다.. 100원을 넣고 타던 길거리의 목마,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플라스틱 목마들... 온 몸이 헝겊으로 되어 있고 눈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던 머리칼 굵은 나의 소중한 ' 순이 ' 인형, 하얀 스타킹을 신고 별 모양의 왕관을 쓰고 춤추던 기억 그리고 부채가 너무 무거워 떨어뜨렸다 다시 주우면서 추던 부채춤의 기억, 재롱잔치,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 나와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많았던 그 당시의 패셔너블한 신발은 바로, 가운데에 꽃이 달려있는 고무로 만들어진 신발이었다. 주로 분홍색이 많았고.. 꽃은 해바라기 비슷한 것들이 달려있었고 그물망처럼 만들어졌던 그 신발, 기억나는구나. 그리고.. 엄마와 함께 골랐던 플라스틱 머리띠 , 유치원의 벼룩시장, 아이들 모두 엄마가 신던 그 뾰족구두를 차지하기 위해 티격태격했다. 그리고... 유치원 미술시간마다 그렸던 풍차 그림, 머리가 분홍색인 여자아이들 그림, 스크래치... 동생의 유모차를 얻어 타던 기억...
그리고 초등학교... 엄마가 만들어준 스커트를 입었다. 겨울날, 초등학생들 아니, 국민학생들의 필수품은 털실내화였다. 강아지, 토끼, 다람쥐 여자아이들이 많이 신는 것이었고 남자아이들은 곰발바닥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실내화를 질질 끌고 다녔다. 위험하고 지저분한 털실내화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아꼈다. 그리고... 내 볼에 뽀뽀를 하고 도망친 그 아이, 36색 지구본 색연필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그 아이, 분리수거를 하지 않아 야단맞은 기억 , 100원짜리 명찰, 수없이 사모았다. 문방구에 꽂혀있던 ' 이달학습' , 국민학교 1학년때. 학교를 들어와 처음 산 준비물, 바로 산가지와 크레파스... 우리들은 1학년이라는 한글을 배우는 책,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공허할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나만의 '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칡덩굴처럼 섞여버린다. 너무나 허탈하고 공허해서 슬픈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그리고 2003년 2월 12일 졸업식, 활짝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지만 가슴은 아프다. 졸업. 새로운 시작이건만, 나는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 든다. 왜 그럴까.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뭔지는 몰라도, 그런 비슷한 어떠한 허탈감, 공허함이 가득 가득 밀려온다. 이유는.. 그것이리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미련과 아련함.. 아직 열일곱이지만 , 우습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성숙하기 시작한 초등학교 고학년, 친구들과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수학여행에 가서 '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와 ' 남행열차 ' 를 열창하고 막춤까지 춰댔던 6학년 1반 반장이 나였다. 지금 그애들은 나를 기억해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온다. 그애들은 나를 기억할까.... 내가 과거의 기억들을 바쁜 일상속에서 조금씩 잊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애들도 나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무섭고 슬픈 상상.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기억으로 유년을 장식하면서 각인되어져 온 것일까 하는 생각들.... 그러다가 가끔 옛날의 일상들을 들춰내면 반성하는 마음 반, 그리워하는 마음 반으로 슬픔이 밀려온다.
지난 시간이 헛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나의 성숙을 도와준 고마운 시간들이기에. 그러나 그 시간들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내가 그것들을 잊어버리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 곁을 스쳐지나가니 난 실감하기 어렵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서 보냈다고 생각해도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다보면 그저 아련할 뿐이구나....
중학교 1학년 , 먼지 폴폴나는 시골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시간들 , 넓디 넓은 운동장에서 저 먼 발치로 친구가 좋아하는 선배를 힐끗 바라보던 기억, 시간과 바쁨이라는 것에서 자유로워 친구들과 여유있게 시골길을 걷던 기억, 막연히 먼 세상을 동경하면서 상상에 잠기던 기억, 그리고 떠나는 나를 보며 울어준 너무나 고마운, 친구라는 말이 남용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그 친구들. 지금은 나를 기억할까.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이제 겨우 2년 남짓한데. 잊지는 않았겠지...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친구라는 말을, 우정이라는 말을,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나 남용하고 있다는 생각. 그때는 진심으로 그들을 친구, 우정, 사랑이라는 말로 포옹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왜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아마도 더 공허하고 텅 빈 공간의 소름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내심 바라고 있다. 그 빈 공간의 소름조차도 훗날 바라볼 이 시간, 훗날 ' 유년의 기억' 이라고 이름붙일 이 시간을 아름답고 아련하게 만들어주길, 눈물을 흘리어도 좋으니.... 혼자만 만들어간 기억일지라도 고이 간직해둘 회상거리로 승화되길 바라고 있다.
이제 , 입시를 실감하고, 예전엔 막연하고 플라토닉적으로만 생각했던 성이란 존재를 농담으로 받아치고, 친구란 말을 남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나, 이제 나는 너를 좋아해라는 감정을 넘어 그 사람의 그림자에서 몇발치 더 물러나 작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 사춘기의 여학생이 되었다. 훗날 내 유년기를 나누면, 나중에 이것들은 아련하게 남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해고 일상을 살았던 시간들과 항상 나중에 이것들은 그리움, 아련함으로 남겠지, 그리고 나는 그렇게 기억될 이 일상들을 외롭고도 아름답고도 슬프게 만들어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시간들로 나뉘게 될 거라고 짐작해본다. 시작과 끝의 경계에서 공허한 이유는 아마 이런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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