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 인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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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진주의 아름다움을 갖고 싶은 소녀가 되려합니다 』
CF광고에 등장했던 장면이 하나 생각이 난다. 며느리가 될 참하고 고아한 아가씨가 아들과 함께 집으로 인사를 왔다. 어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예비 신부를 바라본다. 아가씨가 돌아가자 어머니는 옥가락지를 낀 손으로 곱고 고운 비단을 손으로 쓸어본다.
침대의 머리 맡에 두고서 ,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 한번씩 손으로 쓸어보고 싶은-보드라운 살결을 가진 어린 갓난아기의 살구빛 볼을 쓰다듬듯이-책이 있다. 피천득의 ' 인연 ' .
국어교과서에서도 ,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 좋은 글 ' 에서도 피천득 선생님의 글은 항상 조용히 우리를 맞아 감동을 준다. 아사코와의 코가 찡해지는 아련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 수필은 청자연적이요 ,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조용한 길과도 같다는 글을 나는 오래전에 읽었다. 우둔하게도 ' 인연 ' 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당황하였다. 이런 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유창하고 격정적인 언어는 정치가, 웅변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요 , 어렵고 못 알아들을 언어는 학자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말이요 , 번지르르하고 화려한 말은 사업가들에게서나 나오는 말이다. 어머니의 약지에 끼워져 있던 옥가락지와도 같이 기품 있고 , 애절한 , 볼을 대어 느껴 보고 싶은 말이 그리우면 이런 것은 다 제치고 수필가가 쓴 글을 찾으면 될 것이리라.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 ' 인연 ' 은 쓰다듬어보고 보듬어 보고 싶은 책이다. 진주를 담고서 입을 벌린 조가비가 하이얀 배경 안에 품어졌다. 궁서체로 정성스레 쓰여진 ' 피천득, 인연 '이라는 제목을 보면 쏟아져나오는 도서들 속에 숨겨져 있다 해도 눈을 돌려 힘겹게 찾고 싶은 책이다.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조용하다. 추운 겨울 , 이따끔 세찬 바람이 문을 두드릴 때 따뜻하게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경대 하나 놓여 있는 방 안에 앉아 우리의 벙어리 장갑을 뜨개질하시는 할머니의 세월 어린 두 눈 , 자신의 서재에서 파이프 담배를 물고 사색에 잠긴 하얀 서리 내린 머리의 연구자의 마음과 같이 조용하고 깊이 있다.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제대로 펴지지도 않는 보송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갓난 아기의 까만 두 눈동자처럼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우며 그래서 품에 안아 보고 싶은 글이다.
선생님의 글은 조용하며, 사랑스러우며 , 고결하고, 순수하며, 깨끗하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책장으로는 두장도 채 안되는 문장들 속에서 깊은 연륜과 삶의 경험이 배어나온다. 전통 조각보 예술가들이 하듯이 양파 껍질로 만든 염색물에 비단을 담그면 그 주홍빛 우아하고 단아한 빛깔이 향기로운 자태로 천천히 스며드는 것과 같이 나와 같은 어린 아이는 쓸 수 없는 세월과 삶의 흔적. 그것이 군더더기 없는 알맹이, 옥구슬처럼 하나 둘 굴러나온다.
청초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추억 , 사랑스런 딸 ' 서영이 ' 에 대한 정성 , 잊지 못할 인연으로 묶인 아사코에 대한 아련함 , 상해에서 유학을 하고 보스턴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배움의 길들이 그것이다.
' 인연 ' 이라는 말이 뿜어내는 향기가 그렇듯 , 책의 감상은 동양적이고 심미적이다. 앞에서 말했거니와 옥가락지와 같은 아름다움이고 , 비단 조각으로 곱게 정성들여 만든 전통 조각보와도 같고 , 갓 만들어진 진주가 아닌 빛 바랜 진주와도 같은 조용한 광채이며, 난초와 같은 우아함과 기품이다. 세월 속에 담겨진 추억과 회상들이 뭉쳐져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렇게 조용하게 말없이 하지만 지혜롭고 고결하게 삶에 대한 뜻을 전달한다.
하지만 나는 책을 가슴에 품으면서 이렇게도 생각한다. ' 인연 ' 의 주인공인 어린시절의 아사코처럼 , 책을 읽으며 , 책을 보듬으면서 더없이 ' 소녀적' 이어지고 싶다고.
지금도 나는 아무것 모르는 , 철없는 열여섯 소녀이지만 바람이 조금은 쌀쌀하게 부는 늦가을에 길을 걸으며 노란 단풍잎 하나를 ' 인연 ' 이라는 책 사이에 갈피로 끼워넣고 살랑거리는 진한 흑색의 앞머리칼을 넘기며 혼자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채 걸어가고 싶다.
나만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 아직 어린 나는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를 읊을 수 있는 지혜롭고 아름다운 어머니와도 같은 여성이 되기 전에 피천득 선생님의 ' 인연 '을 품고서 더없이 소녀적인 감상으로 책을 읽으며 내가 앞으로 꼭 가져야 할 삶의 향기-그것은 바로 빛 바랜 진주의 아름다움이다-를 그리는 소녀가 되보려 작은 시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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