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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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춘기를 뒤흔들어 놓은 인물은 단연 전혜린이다. 그녀는 작가도, 교수도, 엄마도, 아내도, 딸도, 여자도 아니었다. 온전히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사유 혹은 정신만을 가지고 훗날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일제 시대 고급관리였던 아버지를 둔 전혜린은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1953년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다. 수학을 0점, 다른 과목을 모두 만점을 받아 서울대학교 입시위원회를 당황케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전혜린은 3학년 재학 중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나 본인의 감수성에 꼭 들어맞는 독일에서 공부한 후 몇 몇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독일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던 전혜린은 1965년 31세의 나이로, 7살 난 딸 정화를 남겨둔 채 돌연 자살하고 만다.
전혜린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명동백작으로 불리던 이봉구를 찾아갔다. 그야말로 한국 문화계의 내로라 하는 이들이 모여 생을 노래하다 죽어갔던 명동이 사그러드는 것을 보며 그녀는 한 마디를 했다.‘명동도, 선생님도 맹물 같이 되어버렸네요’라고.
1분 1초도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은 채 생의 면면을 곱씹듯 치열한 청춘을 보냈던 전혜린은 그렇기 때문에 산다는 것이 때로 힘겹고 괴롭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치열함의 아름다움에 반해 노을 지는 창에 볼을 대고 울며 생에 집착했던 사람이 바로 전혜린이다. ‘레몬 빛 가스등’에 반했던 사람, 비가 오면 비를 맞는 낭만을 즐길 줄 알았던 사람, 본인이 번역하는 독일 문학 작품의 세계 속에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던 사람.
이토록 예민하고 여린 정신을 소유했던 전혜린에게 한국사회는 너무 버거웠다.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이건 돌아온 후에건 전혜린은 사회가 씌워놓은 여성이라는 굴레와 결혼 생활이 강요하는 평화,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숨막히는 답답함에 힘들어하면서도 끈질기게 반항했다. 나는 누구이며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고민한 아픈 흔적들이 그녀의 글귀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래서 자살한 것은 아닐는지 우리는 추측할 뿐이다. 그 시대가 아까운 인물 하나를 희생시킨 것은 아닐까 할 만큼 그녀의 정신은 날카로웠다.
전혜린이 제대로 된 수필집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유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후 그녀의 동생과 지인들이 그녀의 글을 정리하여 출판한 것이다) 우리가 그녀를 안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 그녀의 정신 그 자체 때문이다.
탈냉전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태어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풍요로움을 보장받으며 자랐던 우리는 지금 그런 정신을 지니고 있을까? 자살을 동경하는 것도, 강요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자살을 행할 용기도 없다. 그러나 사회와 시대의 부조리에 굴하지 않는 예민함, 그 부조리에 ‘상처 입을 수 있는’ 순수함,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낭만을 즐기고 그것에 심취하며 원 없이 생을 사랑하다 그만 울어버릴 수 있는 유리 같은 감수성이 있을까.
나도 너도, 우리 모두는 태어나기 전 이미 보장되어 있던 안락한 의자에 앉아만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20대 젊음인 우리가 청춘을 너무 빨리 망각한 것은 아닐까.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은 모자람 없이 똑똑하고 도전적이며 영민하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너는 삶을 얼마나 꼼꼼하게 살고 있느냐고 너는 정말 누구냐고 너는 그 무엇도 개의치 않은 채 정말로 자유롭냐고 반문할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가는 나 역시 의심스럽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영어를 배우고 학점을 취득하고 취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래야만 하는 날들이 오기 전에 독립된 개체로서의 나를 그리고 생을 발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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