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으로 향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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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색 카펫이 깔린 작은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워싱턴 조지아 애버뉴의 밤은 이미 깊었다. 고릴라를 살리기 위해 우간다로 떠난 후 젊음을 다 바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간간이 페이지 넘기는 소리만 들린다.
고기, 초콜렛, 콜라는 전혀 먹지 않고, 곡물, 야채와 생선으로 식사를 하며 아침엔 미숫가루와 요거트를 챙겨먹는다. 여섯 시에 기상하여 채비를 마치고 학교로 향하며 모든 수업은 이른 아침에 시작되어 점심 시간 이전에 끝난다. 점심은 도시락으로 대신하고 5시까지는 귀가하며 집에 와서 저녁을 준비한다. 옷과 신발 구매는 하지 않고 카드와 택시 이용도 삼간다. 책이 필요할 시에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피치 못할 경우에는 인터넷에서 중고를 구매한다.
옷을 입을 때는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화장을 하지 않으며 하이힐을 신지 않는다.
보고 싶은 사람들과는 바람이 선선할 때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하기보다는 듣기를다짐하며, 말을 끊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큰 소리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함부로 조언하기를 삼가되, 격려하거나 위로한다. 챙겨주고 싶을 때는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한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이유로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 술을 들이키거나 불편한 자리에서 억지 웃음을 짓는다거나 혼자 있는 시간에 사색을 한다는 명분으로 담배를 피우는 일은 하지 않으며, 주로는 사람 만나는 일보다 혼자 있는 쪽을 택하되, 미안해요, 고마워요, 천만에요, 그리고 좋아해요라는 말을 많이 쓰고자 한다.
말 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하고, 읽을 때는 한 줄씩 손으로 짚어 문장을 곱씹고 행간을 보고자 한다. 쓸 때는 한 단락 마다 숨을 쉬어가며 되돌아 가 실수는 없는지 확인한다. 졸업과 취업을 염두에 두고 공부하던 한미관계와 국내 정치는 잠시 미뤄두고 문화와 환경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새로운 문제들을 본다. 그 어떤 교수도 학우도 나를 알지 못하는 다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다만 내가 어떻게 책을 읽었는가를 이야기하고 그들은 어떻게 책을 읽었는가를 듣는다.
배짱과 포부를 갖되 자만하지 않고 꿈과 이상을 높이되 가족과 친구를 잊지 않으며 성공을 열망하되 잔인하거나 빠른 길을 삼가고 목적과 수단을 헛갈리지 않도록 한다. 여성으로서 넘고 싶고 넘어야만 하는 벽을 염두에 두되 남성을 비난하거나 깎아내리지 말 것이며, 사회의 부조리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패배를 맛볼 수 있대도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않고자 한다.
나는 달라졌다. 무엇이 나를 달라지게 했고 어떤 과정을 통해 달라졌는가? 앞으로 나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익숙한 생활습관,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사고방식, 익숙한 세계관, 이 모든 관성으로부터의 인위적 탈피는 나로 하여금 더 넓은 세계를 보게 했고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삶의 방향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자유와 방종이 습자지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한 가지 방식을 고집하는 것만이 진정한 나의 청춘이자 열정인 줄로만 알았던 젊은이에게는 낯섦과 외로움을 동반한 새로운 경험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종종 청소나 요리를 하고 작은 선물을 하거나 편지를 쓴다. 영화와 연극을 보는 등 취미를 공유하고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날 좋은 때에는 공원을 걸으며 내일, 혹은 일주일 후, 한 달 후, 일년 후를 함께 계획하고 함께 먹을 거리나 물건을 사러 다니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낯 간지러운 행동에 서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매일 만나 서로를 방해하기 보다는 서로가 바쁠 때에는 이유를 정확히 알거나 정확히 짐작하고 스스로의 할 일에 골몰한다. 고민과 스트레스가 있을 때에는 용기를 주거나 안심시키되 간섭하거나 주권을 침해하지 않으며 가까이 하되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불만이나 슬픔을 이야기할 때에는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의연하게 하되 상처주지 않고자 한다.
이제 와서 그 옛날 일들은 사랑이 아니었고 나는 바보였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사랑이고 어떤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식의 부질없는 구분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사랑을 눈에 보이는 물질처럼 인식하고 손아귀에 넣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과 한없이 사랑받는 것은 너무나도 다르다. 오늘을 사는 나는 불행하기보다는 행복하며 불편하기보다는 편안하다. 힘들고 외롭고 괴로운 순간을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일들을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는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온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던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떨림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 혹은 열정이 변했다고 울부짖는 어리석은 행동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 부딪히고 싸웠다 다시 만나며 파도에 휩쓸리듯 해야 사랑인 줄 알았던 믿음은 이제 버려도 된다. 서로의 열정을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열정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때로 사랑도 차분하고 조신해져야 한다. 사랑은 단지 감성만의 산물이 아니며 이성과 감성이 함께 할 때 현실의 것이 된다.
‘너를 향해 흔들리는’ 그 순간의 짜릿함은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지만 인간은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순간을 원하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짜릿함 이상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그러한 지혜 혹은 현명함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온다. 전에 없던 빛나는 눈동자는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때 온다. 그리고 그 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이 모든 익숙한 것으로부터 나를 벗어나게 하고 나의 모든 면면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우주의 생애에 비해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의 삶이 과연 이 세상에서 어떠한 가치를 가질 수 있을지, 그런 의심이 사그러든다. 산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느껴지다가도 새롭고 경이롭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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