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땅 광양 백운산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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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지리산 남부능선을 타고 내려와 하동 악양면 토지마을 뒷산인 형제봉에서 바라본 산. 섬진강물이 산길을 잘라 놓아 갈 수가 없었던 산, 백운산을 가리라고 마음먹은 지 불과 한달 만에 백운산으로 갔다. 때마침 3월 경칩 지나면 백운산의 고로쇠물이 전성기이고 섬진강 강마을 매화마을인 다합에서는 매화꽃잔치가 열리는 계절이니 한해의 적기가 지금이라 꽃구경 산 구경 고로쇠물 산행으로 길을 나섰다.
인터넷으로 백운산을 찾으니 우리 나라에 백운산이란 명산만도 다섯이 넘는 백운이란 이름이 예사이름은 아닌 모양이다. 초행이고 안내자가 없으니 자료나 지도를 뽑아 들고 가야 되니 여기저기 지도도 모으고 산행기도 모아서 읽었다. 그러나 정작 떠나는 날 아침에 지도며 자료 한 장 없이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전날 어디에 두었는지 찾아도 없어 빈손으로 가게 되었다.
차는 광주 가는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광양제철소 인터체인지를 지나 동광양으로 잘못 빠졌다가 되돌아 나와 광양 인터체인지에서 광양땅으로 들어섰다. 까만 밤은 어느새 걷히고 광양땅에는 조용한 새벽이 열리며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다. 그날도 우리는 정군이랑 둘이었다. 정군은 운전을 하고 나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언제나 처럼 맡아하는데 오늘은 내가 지도를 아니 가졌기에 머리 속으로 이쪽 저쪽 하면서 가다 세워 물으며 갔었다.
오늘 계획은 광양시 봉강면 하조까지는 시내버스로 타고, 하조마을에서 내려 성불계곡의 성불사를 경유하여 형제봉 도솔봉 또아리봉 한재 백운산정상 매봉으로 해서 섬진강 다합마을로 하산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지도한장 없이 그 길을 찾는다는 게 쉽지도 않고 하조 가는 버스는 6시에 떠났으니 다음 차는 7시 40분이라니 기다릴 수도 없어 우린 승용차로 옥룡면 소재지에다 차를 두고 버스를 기다렸다. 6시 30분에 논실까지 가는 버스에는 운전사 혼자였다. 우리 둘만 태우고 긴 계곡길을 하천을 타고 올랐다. 동곡리 동동마을을 지나고, 병암마을도 지나서 산아래 첫 마을 논실까지 차는 가주었다.
이제는 계획이 바뀐 것이다. 논실로 오면 형제봉 도솔봉은 지나온 셈이 되니 그냥 참샘이재로 오르자 논실마을에는 산골마을답게 아침 짖는 연기가 고요히 피어오르고 아침 공기가 차기는 하나 이제 그 매운맛은 없었다.
마을에 들러 샘물을 얻고 7시에 아주 천천히 산행을 시작했다. 길은 임도를 따라 마을 우측으로 크게 나있었다. 산길은 포장되지 않은 도로였다. 옅은 산 안개가 가냘프게 지피는 임도를 따라 둘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걸어 올랐다. 새벽에 초행길을 지도없이 오느라 빠졌던 얼을 이제야 겨우 찾았던 것이다. 산길은 아침햇살에 산주름을 펴고 길은 평탄했다. 서울농대 남부연습림이라고 잘 가꾼 잣나무 숲이며 온통 고로쇠나무가 산을 덮어 자라고 있었으나 물통이며 호스는 보이지 않았다. 고로쇠물이라도 마시려면 물통이 달려야 마시지 나무만 있으면 그림의 떡이라 이를 두고 노래가사처럼 인천 앞 바닷가 사이다가 되어도 고푸없이는 못 마신다고 하듯이 나무만 쳐다보고 침만 삼켜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채 20분도 못 가서 저쪽 숲속에 물통들이 줄을 서서 앉아있었다. 얼마나 반가운지 그중 한 통의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니 한 통에 다섯 말을 나올 만큼 들어있었다. 선 채로 그 자리에서 한 병을 마시고 큰 병 하나에 물을 비우고 고로쇠물로 채웠다. 신선한 물맛이 약간 달짝지근한 맛에 술보다 물보다 더 잘 넘어갔었다. 둘은 마주보고 실큰 웃고 다시 통 뚜껑 잘 덮어주고 발 밑에 잣 솔방울이 수도 없이 차이는 잣나무 산길로 올라섰다. 한시간이나 걸려 고개에 오르니 한재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그러니 참샘이재로 간다는 것이 그만 한재로 올라왔던 것이다.
더운 김을 푹푹 내쉬고 고개 위에 앉아 고로쇠물을 꺼내 한 모금 통 채로 삼키니 이게 고로쇠 물맛이 갑자기 왜 이렇지? 목구멍에 넘어가던 고로쇠물이 순간적으로 내뱉으며 이건 약물이 아니고 독물로 바뀐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가? 그 사이에 약이 독으로 변했단 말인가? 반 모금은 마셨고 반 모금은 볕었고 옆에 정군은 나의 반사동작에 왠일인가하고 놀랐다. 병을 자세히 보니 소주를 pp병에 부어왔는데 깜짝 잊고 술병을 물병이라고 거침없이 마셨던 것이었다. 아이구, 아까운 술을 버리다니. 그러나 술맛이 이렇게 쓴 줄은 정말 몰랐었다. 소주란 언제나 마셔도 그 맛이 당기는 신비의 맛이었는데 소주 맛이 이렇게 쓰고 독할 줄이야 예전에 정말 몰랐었다. 정녕 이 맛이 소주의 참 맛이라면 다시는 소주를 아니 마시리라. 그래서 그날 나는 준비해간 소주를 남겨오는 전대미문의 산행이 되고 말았다. 한재를 지나 오른쪽 비탈길을 접어들었다. 심한 된비알이 계속 되었다. 쓸어져 넘어진 잣나무의 부러진 가지에서 향긋한 솔 내음이 흩날리는 잣나무 밭이 비탈길에 계속 되었다. 잣나무는 나무줄기의 아랫부분을 산을 바라보고 다리를 벌려 갈려져 서 있었다. 모든 잣나무들이 다 같은 자세로 산 위쪽을 향한 곳은 아래가 갈라지고 반대쪽은 기둥모양으로 둥글게 그대로였다. 산에서 물이 흘러내리면 벌어진 사이로 물이 고이도록 벌리고 있는 듯 하니 이도 자연 생태의 한 모습이리라. 우리는 장난
스레 나무 사이를 꼬챙이로 찔러보면서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나 나나 이런 곳에서는 어린아이가 되곤 하니 미상불 허물이 될 일이야 없지. 고목이 되어 넘어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았다. 산새가 나무 속을 구멍을 내어 집을 짓고 있었다.아름드리 나무가 이렇게 무성히 자라주고 있는 이곳은 아마도 학교 연습림이니 조림을 하고 또 가꾸고 실험하고 있는 곳일 것이나 이렇게 멀리 이곳을 연습림으로 택한 이유는 이곳이 나름대로 나무의 생육에 알맞은 환경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이곳까지 오르면서 주로 보아온 수종은 자생하는 고로쇠나무와 조림한 잣나무가 대부분이었다. 40여분을 오르니 산마루에 헬기장이 두 개나 나왔다. 우리가 올라온 동곡계곡 건너편으로 산줄기가 시원하게 열렸다. 제대로 갔었다면 지금쯤 올랐을 도솔봉과 또아리봉 그리고 호남정맥의 산맥이 전라도 땅을 뒤흔들며 흘러오고 있었다. 전라도 진안 부귀산(806.4m)에서 출발한 호남정맥은 남해안으로 치달아 내려오다 급작스레 동쪽으로 그 방향을 바꿔 여기 광양땅 백운산으로 와서는 저 섬진강을 건너 형제봉 삼신봉 세석고원의 백두대간 줄기와 다시 만나야하나, 물은 산을 넘어나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니 그 산자락을 악양땅과 다암땅에서 끝나 섬진강줄기로 젖어들었고 그 산의 여러 자락들은 광양만으로 흘러들었다.
부연 연무속으로 광양의 갯마을이 하나씩 보이고 광양제철소에는 허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바다는 희미하여 보일 듯 말 듯 하고 섬들만 그 형체를 알 수 있었다. 어느새 해가 떠올라 능선길에 햇빛이 솟아져 내렸다. 능선 왼쪽 북동쪽으로 기나긴 산 능선이 긴 획을 그어놓고 있었다. 아, 저곳이 지리산 종주능선이구나. 그러고 보니 저 아래가 악양땅 형제봉(성제봉)이고, 산자락 앞이 악양 들이고, 그 위의 긴 능선이 내가 지난달 걸어온 남부 능선이구나. 그렇다면 그 아래 섬진강이 보여야하나 강물은 보이질 않았다. 신선암 바위를 우측으로 돌아서 조금 더 오르니 바로 백운산 정상이 큰 바위를 이고 앉아있었다. 바위 봉우리엔 바람이 일어나서 스산한 아침이었다. 바람을 피해 동쪽으로 앉아 건너 하동을 바라보니 푸른 강물이 바다로 꼬리를 담그고 있었다. 눈으로 그 꼬리를 집고 올라오니 강물은 산봉우리 사이에 희끗희끗 한 조각씩 나타났다. 그리고 강 마을들이 여기저기 산 아래에 앉아있었다. 우리가 가야할 다합 매화마을은 섬진강 西岸(서안)이니 여기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저기 매봉이 보이니 그 아래 섬진강변에 있을 것이다.
지나온 신선대는 신선의 대머리 같기도 하고 달마상의 머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보니 건너 악양의 신선대도 바라다 보였다. 성제봉의 신선대는 그 바위 절벽이 바로 이곳 백운산을 바라보고 그 큰 모습을 내보이며 서 있었다.
정상에 올라서 벌써 소변을 두 번이나 했다. 아침 식전에 네 번이나 자연에 거름을 했었다. 아, 이 산에서 얻어먹은 만큼 내어놓고 가라는 자연의 요청인가보다. 고로쇠물이 그 순환이 이렇게 빨라 벌써 한 회전을 다하고 배설하고 있으니 비뇨기 순환에는 좋은 약이 되겠구나. 그러나 나에겐 이 비뇨기가 별로 용도가 없고 탈도 없으니 그 효험을 논하기가 적합치가 않겠구나.
정군이 준비해온 도시락과 라면 국물에 늦은 아침을 먹었다. 사이에 중년의 남자 사오 명이 도착했다. 그들은 구두신고 빈손으로 와서 목이 마르니 물을 좀 달라고 했다. pp병 한 통으로 라면 끊이고 나머지 반 통은 점심까지 써야하나 목마른 사람이 물 달라는데 나중 생각하여 아니 준다면 이는 내 산행 철학에 오점이 되니 두말 없이 주었다. 그들도 우리 형편을 아는지 목만 축이겠다고 조금씩 마시고 돌려주었다. 아무리 물 인심이 심한 산마루이지만 이렇게 야박할 수야 없지. 한 모금씩 더 마시라고 다시 권했더니 시원하게 마시고 돌려주었다. 그들은 저 아래 논실마을에서 민박하고 밤새워 고로쇠 물 마시고 고스톱 치며 밤샘하고 준비 없이 여길 왔다나? 참 대책 없고 사려 없는 사람들이구나. 그 고로쇠물을 방에서 끙끙이며 마실 일이 어디 있나? 여기 올라오면서 한 통씩 지고 오면서 목마르면 마시고, 또 마시면 얼마나 시원하고 잘 마셔지겠느냐? 어찌 밤새워 마셨으면 목이 좀 마르더라도 참든지, 좀 지고 오든지, 하나같이 빈손으로 불알 두 쪽만 차고 꺼떡꺼떡 왔단 말인가?
9시 정상에 도착하여 10시 20분에 정상을 출발하니 긴 아침을 먹었다. 여기서 다시 산행 계획을 수정했었다. 저 아래 섬진강으로 내려간다면 2시간이면
다합마을로 갈 것이니 이래서는 오늘 산행은 반쪽이 되고 말일이다. 그래서 남으로 그냥 이어진 산줄기를 타고 내려가기로 했었다. 그러면 우리가 온 동곡계곡의 우측 산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된다. 저만치 억불봉이 보이고 그 뒤로 산줄기가 광양으로 긴 꼬리를 내리고있었다. 이제는 산길이 녹아 질퍽거리고 미끄러지니 걷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 끼도 때우고 오후 산행할 몫도 마련했으니 한껏 힘이 나서 나는 펄펄 날 듯이 앞장
서서 내려갔다.
온 산에는 春色이 완연했다. 바위 곁에 잠깐 앉아 꽃망울 지어 오르는 진달래 한줄기를 바라보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다시금 느꼈다. 가냘프고 기다란 작은 진달래 가지에 달린 갈색의 꽃봉오리는 이제 그 갈색을 벗고 푸른 옷을 내비치며 春風에 몸 맡겨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은 아무리 불어도 봄바람이었다.아! 봄은 바람을 타고 오는구나! 이 가지 끝에 매달린 봉오리는 이 부드러운 봄바람에 간들간들 속삭이듯 애무하는 봄의 손길에 감각이 살고 정염이 되살아 오르니 꽃은 바람의 손길에 피어나는구나!부드러운 봄의 숨결에 나무는 물을 부르고 그 신경이 발아래 뿌리로 연결되어 수분을 공급받으니 뿌리는 부지런히 물을 빨아 올려주는구나. 그리하여 물이 오르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자연의 이치이니 봄은 바로 바람이 가져다주는 것이다. 억불봉까지 이어진 능선 작은 산봉우리에는 온통 진달래 밭이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이제 진달래가 필 것이다. 붉디붉은 진달래가 피를 토하듯이 대한민국 온 산에 만발할 것이다. 진달래는 군락을 이루어 사는 산 꽃이다. 그 잔가지는 쉽게 부러진다. 누가 발길이 스치기만 해도 가지는 뚝뚝 부서지고 꺾인다. 그래서 진달래는 무리 지어 사는 법을 배웠다. 가지와 가지가 서로 엉기어 짐승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빽빽이 들어서 살고 있다.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는 산 꽃이다. 그리고 온 산에 붉디붉은 꽃을 봄마다 피우는 우리의 꽃이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 우리 산하에 진달래 피지 않는 산은 없으리라. 우리 산에는 봄꽃인 진달래가 참 많다. 그러나 그 진달래가 유난히 크고 많고 산이 있다. 바로 마산근교의 낙남정맥의 줄기인 서북산과 여항산이다. 이 봄에 진달래가 피면 그 산으로 가서 진달래 나무 기둥이 벌리고 선 넓은 가지 줄기와 흩트지게 핀 진달래를 보고 그 이유를 되새기고 싶다. 아마도 그 산이 6.25 한국내란에 산하한 인민군, 국군, 그리고 유엔군과 억울하게 죽은 우리 삼촌과 아저씨 아주머니의 죽은 혼의 빛깔이어서 그 산하에 진달래가 유난한지 물어보리라.
12시에 억불봉아래 헬기장 삼거리에 도착했었다. 억불봉까지는 바위 봉우리를 두 개나 넘어야했다. 철사다리를 타고 올라 밧줄을 타고 내려서서 다시 바위 절벽을 겨우 겨우 올라섰다. 이 오름이 끝이겠지 하고 올라섰다. 그리고 우린 아연실색이 되어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었다. 올라다본 하늘에 저만치 억불봉이 어젠 옮겨가 앉아있었다. 억지처럼 억부 부리는 산이라고 억불봉인가? 하는 수없이 그 봉우리에 앉아 좀 쉬었다. 봄바람은 쉬지 않고 살랑살랑 불었다. 바람도 지금이 무척이나 바쁘구나 이 수많은 나무들 꽃 송이송이 마다 일깨워 주어야하고 건드려 주어야하기에 그리고 쓰다듬어 주어야하니 얼마나 바쁘랴! 산은 이제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기 강마을 아래로 백사장이 하얗게 반짝이고 푸른 강물은 봄심을 담고 흐른다. 섬진강물은 지리산의 고을고을 골골이 물을 담아 흘러내리고, 강물은 산을 감고 돌아 굽이굽이 흐른다. 한바탕 철사다리를 잡고 내려가 다시 억불봉으로 올라 들어서니 봉우리 위에 넓은 평지와 사방으로 좋은 바위 망루들이 가장자리에 앉아있었다. 망루에는 등산객이 한두 명씩 자리를 했었다. 남녘의 바위에 앉았다. 바위는 천애의 절벽을 이루어 섰고 나는 그 위에 앉아보았다.
눈앞에 하동의 강마을과 섬진강이 펼쳐 보였다. 그 위로 지리산 종주 능선이 하늘과 맞닿아 이어져 있고 푸른 벌판이 강과 산 사이로 넓게 앉아있었다. 악양 들판이구나. 남녘으로 보기 좋게 자리한 곳 악양땅에는 보리가 파릇파릇 살아올라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종이를 꺼내 내 생애 첫 작품인 그림을 그려보았다. 산과 하늘과 들과 강 그리고 마을을 그려보았다. 내 재능에 오직 하나 恥(치)자를 붙인다면 난 色恥(색치)가 분명한데 어찌 오늘은 그 색을 구별하고 그 구도를 잡아 연필로 메모지에 그려보고 있으니 미술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배치와 풍경을 남길 방법이 없어 혹 머릿속 기억으로는 새겨가지 못할까봐 色치가 어설프게 정경을 옮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참 바라보는 눈 맛이 천하일품이구나. 봄이 오는 산하의 풍광. 여기가 과연 남도의 절경인 억불봉이구나.
앞에는 바다요
뒤로는 산이라.
좌로는 강이요
우로는 들이라.
시절은 봄이요
바람은 부는데.
첩경단루에
홀로 바라보니
강촌 물빛에
春色이 흐른다.
아무리 쓴술이라도 여기서 아니 마시면 어찌 풍류를 안다하리오. 깊숙이 두었던 술병을 찾아 병 채 한 모금 깊게 들이키고 다시 한번 더 바라보니 그 사이에 묏부리는 더더욱 오뚝하고 강 빛은 한층 푸르렀다. 저 아래 산골 마을에는 한마당 매화가 희끗희끗 피었다. 정군은 어느새 햇살 좋은 무덤가에서 단잠이 들었다. 나는 그저 그 눈 맛 좋은 경치에 넋을 잃고 혼자서 술을 마시며 연신 참 좋다. 그 경치한번 기가 찬다는 소리를 혼자 지껄이며, 언제나 이 때쯤이면 발동하는 버릇이 나왔다.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앉아서 혼자서 즐거워하는 나의 山 버릇말이다. 과거도 미래도 다 잊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도 다 잊고 무념무상으로 바보처럼 앉아있었다. 이럴 때 나는 정말로 여기서 이대로 지내고 싶다. 저 아래 세상으로 돌아가기가 싫은 시간이다. 항상 이런 자리에 앉으면 그런 아이 같은 버릇이 생기는 것을 버릴 수가 없다. 억불봉 옆의 부처처럼 선바위로 절벽길이 있어나 우린 그 봉우리는 버리고 다시 되돌아서 헬기장 삼거리로 돌아왔다. 노랭이봉으로 치달아 올랐다. 몇몇 등산객이 있었다. 그들은 순천서 왔다고 하면서 부산서 왔느냐고 물었다. 오늘 내려가야 할 저 까마득히 아래로 산의 줄기들을 바라보며 성불계곡과 동곡계곡이 나누어지는 옥룡면 면소재지를 눈으로 짚어보았다. 이따금씩 길섶에 춘란이 보였다. 한두 포기 뽑다 그만두고 적당히 넓고 햇살이 온화한 재에서 자리를 잡았다. 바람도 불지 않는 따스한 곳이다. 긴 점심을 먹고 그 자리에 길게 누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푸른 소나무는 바람에 하늘거리고 누런 억새가 흔들리는 마른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파아란 하늘과 푸른 바람과 푸른 소나무가 보였다. 마른 억새풀에서 훈기가 등으로 전해오고, 따사로운 햇살이 마냥 편안하고 아늑하였다. 아! 편안하고 평화롭구나.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구나. 시간이 한참 지나갔다. 산의 오후는 별로 쓸 시간이 없다. 내려가면 저물고 저물어 내려가면 또 한바탕 차를 몰고 돌아와야 하니 산에 살면 이 걱정을 버릴 수가 있겠지만 속세에 사는 우린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그래 떠나자! 오늘의 산길도 저 아래에 가야 끝이 날 것이니 부지런히 걸었다. 오름도 내림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러나 길은 어느새 묻혀 방향만 있지 길은 없어졌다. 그래도 능선은 버리지 않고 희미하게 붙잡고 걸었다. 지나가서 돌아보니 내려서야 할 능선을 놓쳐서 되돌아 올라와 어느 능선을 하나 다시 붙들고 걸었다. 이제 길이 끊어졌으니 이 능선길이 틀려도 어쩔 수가 없다. 길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잖는가?
버리고 오는 길에 온통 산능선 밭이 춘란 밭이었다. 포기포기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진달래 군락처럼 난의 군락지였다. 긴 잎사귀며, 넓은 포기자락이며, 그 푸른 풀잎의 빛깔이며 그 사이에 낀 꽃대의 꽃망울을 살피느라 우리는 이제 산길 잃은 것도 잊고 기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정군의 작은 배낭에 난 포기를 집어넣을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했다 이제는 아무리 훌륭한 난을 발견하더라도 뽑지 않겠다고 손가락 걸어 약속을 했다. 그렇지 않으며 더욱 싱싱한 놈에 매료되어 또 뽑아갈 것이니 약속을 하고 걸었다. 그러나 그 이름 모를 산 하나는 그 산을 다 내려올 때까지 난의 천국이었다. 산아래 농장이 있었다. 언덕빼기에 밭도 있었다. 무덤도 나왔다. 길섶이고, 무덤가고, 과수원안의 바윗돌 아래도, 어디 하나 춘란이 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마을에는 난을 무어라고 부를까? 여기의 소들과 염소는 겨울 한철은 난을 먹고살지 싶었다. 그 동네 사람들이 우릴 보면 그 풀을 어디에다 쓰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무슨 풀이기에 애지중지 모셔 가느냐고 궁금해 할 것이다. 내 생애 온산을 다녔건만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에 본 난 수보다도 그날 오후 한나절에 본 난의 수가 많았고 앞으로도 이렇게 많은 난의 군락을 볼 수가 만약 있다면 나는 춘란에 관한 한 아주 특별한 복을 받고 태어났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산을 다 내려올 때까지 그 많은 난들 때문에 바보처럼 입을 헤헤 벌리고 거저 내 것도 아니면서 마냥 기뻐하는 얼간이가 되었었다. 그 산에는 그 난 밭에는 송림이 거물처럼 지붕을 이었고 지붕 아래로는 잔가지가 전혀 없어 바람이 술술 지나갈 수가 있으며 땅은 솔잎이 쌓여 양탄자처럼 발이 푹푹 빠지도록 곱고 가지런한 곳이었다. 그 마른 솔잎위로 푸른 잎사귀 길고 넓게 펴고 그들은 싱싱하게 봄을 맞아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이곳에 난 꽃이 핀다면 이 산에는 난 향기가 진동을 하겠구나. 그 때를 맞추어 왔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이 난 향에 취해본다면........
그러나 여기가 어딘지 내려가 보면 알 수도 있겠지만 오늘 온 이곳은 꿈속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다만 몇 포기 채취한 것으로 만족하고 잊기로 했다. 이런 곳이 알려진다면 저 경상도 보리문둥이들이 알아낸다면 트럭을 몰고 올 일이니 그냥 武陵桃源(무릉도원)이 아니라 白雲蘭園(백운란원)에서 자다 깨어난 이야기라고 해두고 싶구나.
산을 내려오니 가기로 했던 다합마을은 아니라도 비탈진 밭머리에 매화가 만개하여 우릴 반기고 있었다. 매화야 너 참 반갑구나. 매화마을 매화만 매화더냐? 가까이 다가가서 꽃송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니 그윽한 蘭 향기가 피어올랐다. 梅花 향기랑 蘭 향기랑 냄새가 같은 줄 이제야 알았었다. 그대들은 아시는가? 매화의 향기를, 그대들은 아시는가? 蘭의 향기를.水路에 봇물이 꽐꽐꽐 흘렀다. 발을 씻었다. 차가움이 더운 발목에 집히었다. 손발을 대강 씻고 어찌어찌 찾아서 차를 두었던 옥룡으로 되돌아왔었다. 돌아오는 차 속엔 매화의 향기가 그윽하게 지피고 나를 기다리던 창원의 놀이패 친구들은 벌써 모여 야단들이었다. 빨리 오라고 그러나 여기서 창원까지는 한 시간은
더 걸릴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라 내 사랑하는 친구들아. 한시간이나 나를 기다려준 나의 친구들에게 나는 매화꽃 향기와 멀리서 구해온 난의 봉지를 꺼내 그들에게 주었다. 내가 오늘 자네들에게 줄 아름다운 선물이니 마음에 드는 보기 좋은 놈으로 골라서 가져가라고 주었다. 귀한 선물을 주고 나니 내
몫은 없더라도 중한 것을 주고 나니 기뻤다. 나누는 기쁨이란 이런 것이구나. 아무쪼록 나의 성의로 주었으나 죽이지 말고 잘 키워주었으면 좋으련만....
백운산에 가서 도솔봉은 못 가도 고로쇠물도 먹고, 잣나무 솔 향기도 맡고, 춘란의 군락도 보고, 매화꽃도 보고 왔다. 그리고 그 귀한 곳에서 가져온 봄의 꽃 春蘭을 나누어주어 기뻤다. 섬진강 백운산의 봄은 그렇게 춘란과 고로쇠와 매화가 가져다 준 常春의 산행이었다.
2000. 03. 21. 이학근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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