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농일기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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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농일기 27
<동짓달 달 보러 가요>
오늘은 달이 좋은 날인데, 바람도 세찬 게 여간 아니고 하늘이 저토록 맑으면, 비수 같고 얼음 같은 달빛이 산 속 분지에 가득 담기는 날인데, 달력을 보니 큰 숫자 아래 작은 숫자가 15이다. 양력으로 12월이지만 시월 보름달은 지난번에 본 것 같으니 집어보니 섣달이다.
1월은 정월이라 부르는 대보름 달이 있고, 8월에는 한가위 달이 있고, 10월은 시월 상달이라 부르고 11월은 동짓달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12월은 섣달이라고 우리말로 부른다.
오늘이 바로 그 동짓달 보름이니 달빛이 여간 아닐 거라는 생각에 저녁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달을 보러 갈 곳은 있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는 것이다.
무슨, 달을 보러 혼자 가면 되지 품을 내고 삯을 들이려고 작정을 하나? 하고 물을 것이나 혼자 가고자 하니 오늘 날씨가 너무 설렁하여 산막 빈집이 춥고 어시시 할 것 같았다. 같이 갈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으나 마땅히 가자고 청할 사람이 당장은 없었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운동복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가서 혼자 걷기를 하고 있는데 마치 내 앞을 뛰어가는 사람이 회사동료이다. 가족은 김해에 두고 나처럼 여기 혼자 사는 ㅈ씨였다. 아침저녁 회사 식당 밥 같이 먹고 호형호제하면 지내는 사이라 뛰고, 걷기를 마치고는 가벼운 투로 말을 걸었다.
"날이 춥지는 않지. 하늘에 달이 엄청 좋은데 달구경 가지 않겠나?"
"예? 아, 예."
"차를 좀 가져 올 터인가? 차를 타고 갔으면 하는데."
그는 어딜 갈 것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전에 같이 ㅈ씨와 동숙을 하였지만 지금은 가족과 살고 있는 ㅅ씨를 데리러 갔다. 아파트에서 저녁 달리기를 하고 들어오는 그를 붙잡아 차에 태우고는 산청 산막으로 향했다.
ㅅ모씨는 전에 산막에 한번 가 본 적이 있었고 ㅈ모씨는 전혀 어디로 가는지 분간도 없이 내가 가자고 하는 방향으로 운전을 하였다.
막걸리 몇 병을 싣고는 산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자 산 위 한 뼘쯤 떠오른 보름달은 마을 분지의 개울과 논바닥에 그 기운을 쏟고 있었다.
나는 산막 마당에다 장작불 피웠다. 바람이 있긴 해도 기온이 찬지라 그렇다고 달 보러 온 사람이 방에서 놀 수도 없는 일이니, 마른 고추 대, 콩 대를 불소시게로 감나무 장작을 내어 불을 피워놓고는 통나무 둥근 의자에 앉아 막걸리로 마시며 불 구경을 시작으로 달구경을 하였다.
가로등이며 전깃불을 모두 끄고는 달빛과 장작 불빛만으로 마주 앉았다. 열린 하늘에는 흰 구름조각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훌훌 나뭇잎 옷을 벗어버린 느티나무의 겨울 가지들은 달빛에 실루엣이 되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작불 기운에, 술기운에 기분이 제법 고조되어 노랫가락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달은 어느덧 중천에 올라 더욱 밝게 빛을 토해 내었다. 서리가 내린 듯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에는 흐뭇한 달빛이 출렁거렸다. 내 노래 소리에 춤을 추듯 말이다.
오늘밤에는 저 달을 보고 우리들처럼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을 터이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어 달을 보며 그리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가슴속에 크다란 멍에 하나 끼고 사는 사람은 그 멍든 가슴 쓸어 내리면 소원을 비는 이도 있을 것이고, 첫사랑 잃은 슬픔 가눌 길 없어 애태우는 심정을 달에게 하소연하는 사람도, 저 달을 보고 변치 말자고 명세를 하는 청춘 남녀도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명세가 쓰레기통의 휴지가 될 지언정 사랑을 속삭일 때는 달이 매개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달을 좋아하고, 달 중에서 보름달을 좋아하고, 보름달 중에서도 겨울 달을 유독 좋아한다. 겨울밤은 날이 맑기에 그러하고, 차갑기에 그러하고, 달 색이 붉지 않기에 그러하다. 달빛이 붉은지 흰지는 모르겠으나 겨울 달은 분명 투명하거나 우윳빛으로 보인다.
내가 아는 어느 여인은 시베리아의 설원이나 빙판에서 보름달을 보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저 차가운 달이 더욱 차가운 동토에서 보면 더욱 차고 애절하리라는 로맨티스트이기에 그러하지 싶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도 밝고 훤하지만 겨울 산 능선을 쓰다듬으며 산 고갯마루에서 올라오는 달도 아름답다. 달은 음의 기운이 있다고 여인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달은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달은 그믐달과 초승달이 있고 반달이 있고 보름달이 있다. 그믐달은 새벽에 그 모습을 보여주고 초승달은 초저녁에 잠깐 서쪽 하늘에 나타났다고 사라지는 달이다. 그러나 보름달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떠 있으며 여름보다 겨울철에 더 오래 하늘에 머무르는 달이다.
동짓달 보름달을 산막에서 훈훈한 사람 불러다 모닥불 피워놓고 하룻밤을 지새운다는 게 나에는 여간 감미로운 일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 자정 무렵에 우리 나라 청소년 축구팀이 일본과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모두들 그 시간에 텔레비전 앞에서 게임의 승부에 시선을 놓지 못하는 시간, 텔레비전이 없는 내 산막에 달구경을 한 것은 그날 게임 시청을 하신 분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전혀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삶의 기쁨이 보름달 구경에 있었는데 말이다.
자정도 넘긴 시간이 되어서 불 마무리를 하고 나무 차 탁자에 둘러앉아 지난 주말 차를 사랑하는 지인이 두고 간 細竹茶를 우려서 마시고는 잠이 들었다.
따뜻하게 깊은 잠, 한숨 자고 일어나니 5시 반, 아! 새로운 하루가 기다린다.
일어나 가자! 생활의 일터로!
2003. 12. 8.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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