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농일기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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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농일기 26
<김장 배추를 뽑았다.>
주말에 기습 한파가 온다고 하더니 자고 나니 수돗가 물통이 껑껑 얼었다. 햇살이 번져 배추 잎에 온기가 묻으면 더 얼려서 망치기 전에 단속하는 게 상책이다 싶어 헌옷으로 갈아입고 낫을 들고는 배추밭으로 들어갔다.
배추 속이 차도록 이미 묶어는 놓았지만 가뭄에 서툰 농사라 속이 꽉 차지는 않았다. 어설프게 묶은 배추 속은 들어다 보일 정도로 비어 있는 녀석도 있고, 아직 덜 자라서 김장용으로 부적격자도 있었다. 그래도 한 집 김장 꺼리는 됨 직하여 작은 포기 몇만 남기고 배추 밑동을 한쪽으로 기울여 뿌리를 잘라서 마당에 옮겨놓으니 서른포기는 넘긴 숫자라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우리 어머니, 내 농사 지은 거라면 저절로 신이 나신다.
"내가 정신이 없다. 지난번에 산막에 가서 다 보고 왔는데도 지금 혼자서 언제 배추를 사러 청과시장에 가나? 몇 포기나 담지? 추위가 오니 어서 해야지 하며 김장 걱정을 하고 있다. 그래, 몇 포기나 되나? 우리 김장은 되겠지? 배추 겉은 시래기로도 별로 이니 여긴 쓰레기 처리도 마땅찮으니 대강 가려서 갔고 오이라."
내 혼자 생각에 다음 주에나 어머니 댁에 갔으면 했는데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 나니 갑자기 보고싶기도 하고 배추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도 않지만 기뻐하시는 모습이 좋기도 하여 대답을 얼른 드렸다.
"어머니, 제가 바로 꾸려서 점심 때 가겠습니다. 그 사이 성당 다녀오시면 되겠네요."
그리고는 추녀 끝 양지바른 곳에 퍼지고 앉아서 부엌칼로 뿌리 가까이 붙은 겉잎을 다듬어 내었다. 뿌리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다잡아서 자르고 나면 겉잎 몇 장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고 속잎과 깨끗한 잎들만 남게 되는 법이다.
내 자랄 적 김장철이면 기백포기씩 김장 배추를 사서 리어카로 실어 나르고 옮기고 한 이력이 있는지라 이 정도는 안보고 안 들어도 아는 일이다.
배추만 뽑을 것이 아니라 이참에 시원찮지만 저 푸른 무도 같이 가져가야겠다. 무는 늦게 심어 뿌리가 팔뚝만해야 할 것인데 겨우 손가락마디 만한 정도이다. 그래도 무는 잎을 무청이라고 좋아하실 것 같아서 손에 잡히는 데로 뽑아놓으니 대야 두 개는 담길 정도가 되었다.
승용차 뒤 트렁크에 싣고 보니 한 가득하다.
그래 이제 출발이다. 점심시간 맞추어 가서 어머니랑 같이 점심을 먹자. 내 어머니 음식 맛만큼은 내 입에 길들여진 산해진미다. 적어도 내 입에는 더 맞는 음식이 없는 것이 현실이고 사실이니 무슨 음식으로 오늘 찬을 내 놓을까?
나는 늙으신 부모님 맛있는 음식 봉양을 해 드리지는 못하고 아직도 해 주는 음식을 얻어먹을 궁리만 하는 참으로 못난 중생이지만, 내 어머니의 영원한 짝사랑이 바로 내가 아니던가. 내가 그 사랑을 받아 먹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행복하실 꺼야.
나는 어머님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아자찬에 자신만만, 희희낙락 거리면 차를 부지런히 몰고 마산 땅으로 달린다. 출발한지 꼭 한 시간 반만에 마산입구 닿아 전화를 해보니 어시장에서 바다 메기를 사고 계신단다.
"어머니 그럼 제가 시장입구로 모시러 갈 터이니 지하도 입구에서 만납시다."
헌데 시내 교통이 막혀서 내가 도착도 하기 전에 어머니께서 먼저 도착을 하셨다고 연락이 왔다.
"그럼요, 천천히 불종거리 방향으로 걸어가셔요. 제가 따라가서 만나지요."
우리 어머니 걷기 하나는 전국 선수권 자이시다. 그새 지하도 건너서 저만치 부지런히 걸어가고 계신다.
얼른 내려서 들고 있는 짐을 받자 뒤 자석에 앉으신다.
오늘 메기는 한 마리에 만원을 주고 산 놈을 사셨단다. 죽은 놈은 삼 사 천 원이면 사는 걸, 큰 맘 자시고 산 놈 한 마리를 사고 나니 미나리 가게에서 미나리 값을 치르는데 가진 돈이 천이 백원뿐이라서 돈대로 사고는 콩나물을 못 사셨다는 시장 이야기를 하신다. 들어주는 내가 있어 신이 나신 모양이다. 집 근처에서 천 원을 달라고 하신다. 못 산 콩나물을 마저 사서 가겠다며 얼른 차에서 내리신다.
차에 오르고 내리고 움직임이 칠순 노인이 아니라 젊은이 몸놀림이신 내 어머님을 뵈면 나는 참으로 다행한 아들인 셈이다.
내가 차에서 배추, 무를 내려서 집안으로 옮길 동안 메기탕을 불에 올리고 끓이는 사이에 막걸리 한 병을 꺼내 배추 속잎을 안주로 먼저 요기를 하자고 술잔을 돌리신다. 언제 사서 넣어둔 막걸리인지 몰라도 술잔에 작은 물방울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니 차긴 해도 발효가 제대로 되고 있는 막걸리이지 싶었는데 역시 된장에 찍어먹는 배추 속잎에 막걸리는 제 맛이었다.
더운 김 나는 밥 한 그릇에, 메기탕 한 그릇 마저 먹고 나니 술기운이 스르르 오르고 마음이 풀리면서 잠이 왔다.
훈훈한 방에서 혼자 노는 텔레비전 소리를 어머니의 이야기 소리인양, 정말로 오랜만에 편한 휴일 낮잠을 잤다. 부엌에서 나는 어머니의 도마소리를 자장가 소리로 여기며.
2003,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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