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농일기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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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농일기 22
계절은 하늘이 한없이 높기만 한 가을의 한가운데입니다.
달이 정말로 그윽하기는 팔월 한가위보다도 구월의 보름달이지 싶습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사무실에서 이것저것 챙기다 그만 마음이 자꾸 사무실 밖으로 나갑니다.
하던 일을 대강 마무리하고 사옥 밖으로 나서니 어느새 달이 올라 정원 소나무 한 자락 끝에 걸렸습니다.
달구경도 하고 싶고 익어 가는 감 구경도 하고 싶어 산청으로 차를 몹니다.
그냥 달려도 막히지 않으니 30분이면 갑니다.
출퇴근도 가능한 지척인데 매일 가지는 못합니다.
여기 아파트에서 하는 출퇴근보다는 시간도 생활도 아직은 익숙하지 못한 탓이지요.
사천에서 산청 가는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에서 지리산 인터체인지로 나와서 단성 읍을 지나면 경호강을 건너는 원지(단성)교가 나옵니다. 그러면 산청 가는 3번 국도를 만나게 되지요. 3번 국도는 우리 나라 국도 중 중요도가 3번이라는 의미인가요? 3등 안에 드는 국도이니 작은 도로는 아니지요. 물론 지금은 왕복 4차선에 80 킬로로 달릴 수 있도록 잘 정리된 도로입니다
산청방향으로 2키로 정도 가면 수월/안봉 마을로 빠지는 이정표가 나오지요. 그 길에는 삼우당 문익점 선생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제 산막은 그 곳에서 한 일 키로 정도 더 골짜기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을이름은 안봉 마을입니다. 마을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밖에서는 안 보이는 마을이라고 부르던 이름을 한자로 옮기다보니 안봉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저는 그냥 그런가 하는 정도입니다.
마을은 정말 아늑하고 조용합니다. 산자락 아래로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습니다.
산막은 마을 집들과 수백 미터정도 떨어져 독가옥으로 있습니다만 마을 사람들이 농사일로 저희 집 앞을 지나기도 하는 곳입니다.
집 좌우로 뒷산에서 흘러내린 언덕이 있고 그 언덕 아래로 개울물이 흘러서 산막을 감싸고 있는 곳입니다. 집 옆 언덕 한곳에는 수백 년은 됨직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해마다 마을에서 동신제를 모시는 곳이랍니다.
산막의 중심은 느티나무이고 그 다음은 개울물이고 그 다음은 흘러내린 산자락입니다.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부러워하기도 하고 걱정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가끔씩 와서 지내기도 좋지만 그냥 산골에 묻혀 살기는 어렵다고 걱정을 해 주는 것 같습니다. 허나 전 염려 없는 걸요. 제가 다녔던 지리산보다는 훨씬 마을에서 가깝고 전기도 수도도 마련되어있고, 전화도 들어오고, 가스도 부르면 배달이 됩니다. 지인들이 오시면 이곳의 명동인 원지(하정)에 전화를 걸면 매운탕 배달도 시켜 먹는 답니다.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다방 커피 배달도 오지 싶은 곳이니 그리 첩첩산중 지리산으로 환상하지 마셔요.
그런 대로 포장이 된 농로 소로를 돌아가면 집까지 차가 곧장 들어가기에 교통 여건은 이미 확보된 곳입니다. 다만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오신다면 주차장을 협조하여 개울건너 산모퉁이에 작은 주차장을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제가 여기에 풀꽃세상을 꾸밀 소망을 갖고 자리를 잡았습니다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주차장을 만드는 일이고 다음은 밭 자락을 손질하여 꽃밭과 연못들 만드는 일입니다.
아직 하나도 손댄 곳은 없습니다. 허나 이미 시작은 했으니 수년 안에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왜냐면, 자나깨나 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일이기에 분명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따름이고 얼마나 멋지게 되느냐 안 되느냐 정도이지만 그 멋도 사람마다 보는 안목이 다른 것이니 제 마음에 들도록 제멋대로 만들 것입니다.
밭 사이로 작은 개울물이 흘러내리는 곳이니 연못도 만들 수 있고, 폭포도 만들 수 있고, 수생식물도 키울 수 있고, 빨래터도 물웅덩이도 만들 수 있답니다.
제가 여기를 택한 이유 중에 하나를 말씀드리면 나무와 돌과 집은 돈만 있고 시간만 들이면 다 들일 수가 있답니다. 허나 산과 물과 하늘은 돈으로 옮길 수가 없답니다. 여기는 그 셋이 고스란히 자연그대로 들여놓은 곳이랍니다.
이곳은 산자락이 흘러내린 곳이니 산에 사는 나무는 이미 심겨져 있고요, 집은 다음에 제 마음대로 작은 흙집 하나 지을 생각입니다. 동네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옛날 시골 토담집을 지워볼까 합니다.
마을은 왕대나무가 무성한 마을입니다. 대나무를 구해서 대발도 만들고 담장도 엮고 장독대도 만들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 외가의 장독대 같은 돌 바닥에 흙담을 둘러치고 담장에 기와를 올려놓은 모양이면 좋겠지요.
하하 그 많은 일들을 언제 다 할 것이냐고요? 사는 동안 하다하다 못 하면 하는 만큼만 하다가 가는 것이지요.
사람 사는 일이 뭐 다 그런 것 아닌가요? 일도 끝을 보도록 하지 말라고 했지만, 말도 행동도 끝을 보도록 하지 말라고 했지요.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하지요. 그 과정에 그런 일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달 이야기하려다가 오늘은 집 이야기로 마쳐야 하겠습니다.
점심 지나고 한편 더 올려보지요. 그럼 안녕 내 벗들이여!
2003.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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