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농일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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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농일기 6
산농일기를 제대로 쓰자면 이제 산막에서 먹고 자고 해야 할텐데..
한량 기생집 드나들듯이 생각나면 들리고 시간 나면 들리는 곳이 되어서야..
그래도 주말이면 가지 않고는 못 베기는 곳이 되어버렸다.
심어둔 채소들은 장맛비에 쓰러지지나 않았을까?
키가 훌쩍 커버린 해바라기는 또 넘어지지나 않았을까?
개울물이 불어서 넘치지는, 애기감들은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지.
당최 좀이 쑤시고 궁금증이 발동하여 기어이 차를 몰고 가보는 도리밖에 이 병을 치료하는 묘책이 없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사천 진주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산청 땅으로 들어서니 장대비가 내린다.
경호강을 빗겨서 산자락으로 들어서 고갯마루 하나를 넘어서니 산중 작은 들판이 펼쳐지고 그 들판 끝자락에 동신제를 올리는 당상나무가 서있고 그 곁에 지붕 낮은 내 산막이 아담하게 엎디려 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도 그 순한 산막의 지붕을 부드럽게 타고 내릴 도리밖에 없다.
내가 순하면 상대가 악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화장실 개수하는 업자가 일을 좀 망쳐 놓아 마음이 좀 상했는데 내가 그만 다 양보하기로 마음을 먹고 전화를 걸어서 달라는 대로 하자는 대로했더니 먼저 내 마음이 편하게 되는 것처럼 저 산막 지붕에 내리는 비가 아무리 거칠고 억세어도 저리 편한 지붕 등줄기를 한번 타보고 나면 순하디 순한 물줄기가 되고 만다.
차로 개울을 건너는데 물살이 예사롭지 않다.
중간에 차를 세우면 혹 물살에 밀릴지도 모르니 저 단에 액셀러레이터를 발아 순식간에 개울을 건넜다. 오늘은 우리 집에 걸어서는 사람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다.
좌우에 도열한 해바라기 한 포기가 길가에 쓰러져 있다.
순간 차를 세우고 내릴까하니 비가 보통이 아니다.
일단 차를 올리고 수습을 하자.
지지대 하나를 들고 쓰러진 해바라기를 세웠다. 다행이 차바퀴에 깔리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부주의해서 이 가냘픈 해바라기 노란 목덜미라도 무심코 지나간다면 손마디 같은 목덜미가 덜컹 날아갔을 것이다.
여러 포기 중 생장이 좀 부실한 놈이다. 마치 내 팔뚝같이 연약한 줄기를 가졌다. 아랫도리에 돌 받침을 놓고 지지대에 줄기를 묶었다.
이렇게 다 자라서 꽃을 맺었는데 한순간 놓치면 생을 마감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이 장맛비가 그치고 해가 나오면 이 놈도 힘차게 노란 얼굴을 들고 웃음꽃을 피울 놈이다.
나랑 같이 살자고 우리 집으로 시집을 왔는데 내가 다 거두어야지.
마당가로 지나가는 냇물이 여간 아니다. 물 고랑을 반이나 채운 채 흐른다.
물 구경도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 멍하니 물을 바라보는 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물 건너 빈 밭에도 빗물이 고여 무논이 되었다. 저절로 자라는 돌미나리들만 머리칼을 파릇파릇 내밀고 있다. 저곳은 주차장이 될 곳인데 저렇게 물이 고여서야. 그 아래 낮은 도가리의 흙을 파 올려야 할까보다. 밭 건너 산자락에 자귀나무 하나가 공작새 머리깃 모양새로 꽃을 피우고 있다. 여름은 여름인가 보다. 붉은 깃을 뽐내는 자귀나무 꽃이 피는 걸 보니.
처마 밑을 드나드는 새는 여전히 분주하다. 내가 오건 말건 비가 오건 말건 들어오면서 짹짹 나가면서 짹짹 헌데 둥지를 어떻게 틀었는지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 서까래 뒤쪽에 집이 있을 것인데.
지난번에 땅을 고르고 열무씨앗을 뿌린 자리에 점점이 푸른 점들이 빼곡이 박혀있다. 겨우 한 사나흘 지났는데 싹이 올랐다. 허허, 저 고추는 이제 도저히 다 따내지 못하겠구나. 내 엄지보다 굵은 풋고추가 접힌 우산모양으로 땅을 향해 도열을 하고 서 있다. 바라면 보아도 배가 부르다. 장맛비에 그들은 무럭무럭 자라구나. 사람들은 비가 귀찮니, 싫으니 해도 나무와 풀들은 이 비가 그들이 자양분이고 에너지인걸. 두 이랑을 심은 들깨는 아직 뿌리를 제대로 못 내린 탓에 빗줄기에 넘어져 자라는 놈도 있다. 그래 그냥 두고 보자. 이 정도 비에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어차피 씨앗 내리기는 걸렀지. 살아남는 자만이 태양을 보고 여름을 넘기고 가을에는 꽃을 피우고 들깨씨앗을 맺으리다.
들판에 모를 낸 논에 빗줄기에 시야가 부옇게 변하였다. 건너 산 이름이 월명산이라고 했지. 이 여름이 지나면 달이 밝고 귀뚜라미 우는 가을이 올 것이다. 이 가을에는 지금처럼 분주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참으로 모시적삼 받쳐입고 달구경이나 할 날이 오길 고대한다.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는 것이다. 매미가 울면 세상천지 모든 풀벌레들이 밤을 새워 울어 줄 것이고 그들이 사라지면 귀뚜라미가 달빛을 타고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한가한 시간이 와 줄 것이라 믿는다.
2003.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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