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에 한 23시간 지리산 종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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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 쉰 몸에서 쉰 내음 풍기면 23시간 비 맞고 걷다)
드디어 천왕봉에 올라 아우와 얼싸안고 한동안 감격해 하다, 안개비에 묻히고 바람이 부니 오래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소주 한잔을 천왕봉 비석 앞에 부어놓고 둘은 나란히 서서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한동안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라는 새긴 표지 석을 쓰다듬다 마음을 가다듬고 중봉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가는 빗줄기지만 잠깐 비를 피할 자리에 앉아 담배 한 대를 나란히 물고는 비에 젖어 잘 켜지지도 않는 라이터를 가슴에 품어서 아우는 불을 댕겨 주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온 몸이 다 젖어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되었다. 내림 길을 걸어도 걸어도 취밭목 산장은 멀기만 했다. 한기가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이렇게 장시간을 걸어본 적도 없거니와 밤새도록 비를 맞고 걸어본 적도 없었다. 빗줄기는 더욱 드세어지고 있었다. 나는 우의를 입지 않고 파카를 입은 채였다. 거의 물도 마시지 않았는데 소변은 자꾸만 마려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 속에 빠졌다 나온 사람모양 온 몸이 젖어있었다. 중봉을 지나 써레봉으로 가는 사다리 길을 걷는데 다리가 후둘 후둘 떨리고 한기에 온 몸이 떨렸다. 쉬고도 싶었고 따뜻한 물 한 모금이 간절하였다. 어서 취밭목산장으로 가야 하는데.......... 비에 젖은 바위에 잠깐 기대어서 쉴 뿐이었다.
이십여 년 산행을 했었는데 산행 중에 마음이나 육체의 고통을 이렇게 실감해 본 적은 없었다. 내 얼굴을 누가 본다면 사람의 얼굴이 아닌 악마 모양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마음이 아니라 괴로움이 가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물에 젖은 바위와 나무 등걸은 잘못 밟기나 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내려가는 길도 좀체 진도가 나지 않았다. 아우는 앞서서 저만치 먼저 달아나고 있었다. 아우도 이미 젖어있을 것이다. 그러니 추위를 이기는 법이란 게 빨리 걸어서 몸을 데우는 길인데 체력이 거의 소진되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한계시간을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비를 안 맞고 평범한 산꾼이 걸어도 아침 10경이면 취밭목산장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우리가 산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쯤 하산하여 쉬어야 할 시간인데도 우린 겨우 취밭목에 도착하였다. 어제 저녁 6시부터 걸었으니 여기까지 밤을 세워 걸은 시간이 20시간이 경과되었다.
산장 취사장에는 버너로 더운 국을 끓여서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산장지기인 민씨를 찾아 커피를 끊여 달라고 부탁했다. 이 산장에는 원두커피를 끊여 파는 커피 전문 산장이다.
"어디서 걸어 왔어요?"
민씨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노고단에서 밤새 걸었는데 아이고, 비가 오니 어둡고 한기가 들어서 혼 낫습니다."
"아니 집에서 쉬면 될 일인데 뭐 한다고 이렇게 비를 맞고 멀리 걸어 왔나요? 취밭목산장으로 바로 올라오는 길은 노고단에서 오는 길보다 대원사로 오는 길이 빠르고 가깝습니다."
"여기 사는 민형이야 길을 잘 아니 대원사에서 바로 오시겠지만 저는 아는 길이 노고단에서 취밭목으로 오는 길뿐이니 하는 수없이 밤길을 헤매고 찾아왔지요."
우리는 농담 속에 뼈가 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허허거리고 있었다.
민병태씨는 여기 산장에 올라온 지 십 년도 더 지났고, 지리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산을 사랑하는 산 사나이이다. 그러니 말도 아닌 말들을 하면 우린 잠깐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사이이다. 그러나 만나는 횟수가 여러 번이고 보니 서로 알게 되었다.
마치 속옷을 비닐에 싸서 넣어온 것이 있어 옷을 갈아입었다. 아우에게 라면을 끊여서 밥을 말아먹자고 하니 침상에 쓰러져 있던 아우는 겨우 겨우 일어나 버너 불을 붙였다. 나는 더운 커피를 배속에 부었다. 한잔을 마시다 몸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남은 커피를 한 장 더 마셨다. 커피 맛과 향이 이처럼 향긋하고 몸을 녹일 줄을 비로소 알았다. 라면에 밥과 김치를 넣고 라면국밥을 끊여서 미친 듯이 퍼먹었다. 정말로 식품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재료임을 실감했다. 소주가 한잔 그리웠다. 허나 아무도 술 한 잔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창원 모 산악회에서 종주를 하였다는 일행들이 취사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새재로 하산한다고 했다. 우린 차편이 있으면 새재로 가고 싶었다. 버스를 이용하자면 대원사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개인 차편으로는 새재가 가까운 거리였다. 그들은 새재 가는 길을 물었다. 나는 길을 안내하겠다고 하면서 혹 좌석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한시간도 더 기다려 그들은 식사를 하고 하오 3시에 취밭목을 출발하였다. 비는 거칠게도 퍼부었다. 허기사 여름산중에 비가 어찌 그리 간단히 그칠 일인가마는 그래도 이제 힘이 되살아났다. 몸도 많이 회복이 되어 나와 아우는 앞장을 서서 그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이미 부상병이 생겨서 발을 끌고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거의 2시간을 걸어서 새재에 도착했다.
드디어 우리들은 목표를 달성하였다. 우연히 지난여름 휴가에서 만난 사람들이 지리산 야간 종주산행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나선 나의 지리산 야간 종주 산행길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장장 23시간을 비 맞고 무박으로 걸어 지리산의 종주를 이루어 낸 것이다.
비는 산간 마을 새재와 조개골 골짜기 하늘을 통 채로 감싸 내리고 있었다. 건너 산줄기들이 비속에 아늑하게 숨을 죽이고 잠을 자고 있는 듯하였다. 비는 산천을 잠재우는 그리고 목마름을 적시는 감로수임을 종주를 마치고 바라다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비는 우리 산꾼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이 산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저 나무들에게는 어머니 밥 같은 것이었다. 산에는 나무가 사는 곳이다. 산에는 산짐승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또 추위가 오고 어둠이 있고, 별과 달이 사는 곳이다.
빗물은 조개골 개울을 채워서 흘러내렸다. 나는 손발을 담그고 얼굴을 씻었다. 비에 젖은 얼굴이 어느새 말라 있었다.
오늘은 이렇게 비가 하염없이 내리지만 내일은 어느새 마알간 하늘아래 빛나는 얼굴로 산은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산처럼 나도 오늘은 이렇게 궁하고 추한 모습이지만 내일은 말쑥한 모습과 마알간 얼굴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있을 것도 분명한 일이다.
내 나이 마흔이 되던 해 나는 당일로 지리산 종주를 했다. 이제 내 나이 쉰에 나는 마흔 때보다 긴 코스로 밤을 새워 비를 맞고 걸어서 종주의 꿈을 이루었다.
여기 붙인 부제처럼 쉰 살에 쉰 몸에서 쉰 냄새 풍기면서 23시간 비를 맞고 걸었다.
꿈은 이루고자 하는 자에게만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몸으로 체험한 산행이었다.
산행일지
2002. 9. 14일 오후 아우 정군과 진주 출발
버스로 하동 구례 성삼재까지 감
9. 14.(토) 6시 성삼재 출발
9. 15.(일) 5시 새재도착
2002. 9.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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