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에 한 23시간 지리산 종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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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 쉰 몸에서 쉰 내음 풍기면 23시간 비 맞고 걷다)
벽소령 산장 취사장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젖은 몸이 아니었다. 간밤에 벽소령산장에서 자고 새벽에 출발하는 서울서 어제 낮에 들어온 인원들이었다. 그들도 삼삼오오로 길을 떠나고 우리도 갈 길을 재촉했다. 하벽소령인 산장에서 상벽소령인 고개까지는 평지를 걷듯이 평온하게 걸어가면 되었다. 길가에는 가을꽃인 구절초와 쑥부쟁이들이 까만 밤에 후레쉬 불빛에 하얀 소복을 입고 길을 따라 나섰다. 걸음이 술술 잘도 걸어졌다. 숲길 몇몇을 돌고 도니 어느새 우리는 섬비샘까지 걸어왔다. 샘 소리가 철철 넘쳐 산을 에운다. 비가 많이 그치고 이제는 오는지 안 오는지 분간이 없다. 저 아래로 광양만 제철소의 불빛이 비쳐 하늘이 열려 보였다.
마음에 화두 하나 쥐고 걸었다.
많은 多자 한 자이다. 多 多 많을 多 많으면 어떤가?
많으면 좋은가 나쁜가? 사람들은 많길 좋아한다.
그래 그럼 많은 다 자는 저녁 석(夕)자 두 개가 업혀져 있다.
우리는 많은 다 자를 쓸 때 위에 놓인 저녁 석 자는 작게 쓰고, 아래 누운 저녁 석 자는 크게 쓴다. 나는 그 반대로 위에 석자를 크게 마음으로 써 놓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웠다.
위의 夕자가 남자야! 아래가 여자야!
남자 아래 누운 사람이 여자 아닌가?
허니 잘못 된 글씨야. 이제부터는 위의 석 자를 크게 써 주어야지. 저녁이면 남자와 여자는 나란히 눕는다. 누워서는 사랑을 한다. 남자는 위에서 여자는 아래 누워, 그리고 많이 하여 많이 생산하라는 뜻이다. 자식을 많이 낳아 라는 뜻 글이다. 주: 석고봉 도사 두칠이 이론임.
산모롱이 하나를 돌아 오르니 남녘의 산하가 눈 아래로 펼쳐 시원하다. 첩첩이 겹친 산들이 그윽한 곡선을 그은 등을 내고 누웠다. 나도 배낭을 내리고 평 바위 하나에 몸을 뉘어 놓고 여명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정표에 적힌 이름을 보니 명선봉이란다. 새벽 5시 반, 명선봉에는 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 서늘하였다. 덜 젖은 바위를 찾아 기대었다. 잠이 스르르 왔다. 아직은 밤이다. 헌데 순간 잠이 들다 깨었다. 나는 잘 수가 없었다. 눈을 뜨니 그 잠깐 사이에 하늘이 열리고 밝음이 천지를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리 잠이 오고 눈이 무거워도 잘 수가 없다. 이 열리는 아침을 보지 않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다시 들고 밝음이 찾아오는 여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루가 열리고 그렇게도 어두웠던 밤이 지나고,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열리고, 하늘이 열리는 순간을 본다는 감격에 나 스스로 감동에 목이 메이고 있었다. 불가 오 분도 아니 순간에 날은 밝아지고 새소리가 들려왔다.
숲길에는 남색 투구 꽃이 간밤 비에 더욱 유난한 색을 띠고 피었다. 길 위로 비스듬히 누운 숲에도 투구 꽃이 가득하고 산새 한 마리가 꽃 그늘에서 뛰어 나오니 뒤 따라 또 한 마리가 폴짝 폴짝 따라 나와 꽃가지에 앉는다. 저 산새들은 이 밤 저 투구꽃 아래서 밤새워 사랑을 속삭이다 날이 밝아오는 줄도 모르고 사랑하다 내 발자국 소리에 얼른 그늘을 박차고 나온 모양이었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다 사랑하다 죽어도 좋도록 사랑하라. 그 정열이 있고 그 열정이 식기 전에 사랑하다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투구꽃 피는 산길
내가 하고픈 말은,
밤새워 비가 오는 날
그 비를 다 맞고 지리산 일 백리 산길을 걸었다오
혹자가 있어
무엇 때문에 걸었소 하면
어떤 이는 산이 거기에 있기에 오른다고 했지만
밤새워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었노라고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또 혹자가 있어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칠흑 같은 밤이 지나고
여명이 산 능선을 넘어 피어오를 무렵
구월이면 능선에 피어나는
하늘보다 푸르고 바다 빛보다 짙은 투구꽃 꽃밭에서
밤새워 사랑을 속삭이다 동트는 소리에
수컷 따라 꽃가지에 폴짝 나온 암컷 한 마리의 혀뿌리가
투구꽃 쪽빛보다 더 멍이 들었더이다
내가 하고픈 말은,
밤을 새워 비를 맞고
산길을 걷는 내내
한없이 한없이 행복했노라 는
이 말 뿐입니다.
비에 젖은 메모 쪽지에 적힌 세 단어 참새, 사랑, 그리고 투구 꽃에서 위의 시가 나왔다.
하하하...
잔 돌밭 세석고원에는 벌써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바라다 보이는 광활한 평원에는 철쭉꽃은 아니 피었지만 내 눈에는 꽃들이 선하였다. 대성골과 거림골을 가르는 백리길 남부능선 산줄기가 눈 아래로 보였다. 금낭화가 아름다운 삼신봉, 섬진강이 바라다 보이는 형제봉, 아직도 아득하기 만한 천왕봉 종주능선, 그리고 세석의 천단(天壇)인 촛대봉,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가을꽃이 지천으로 핀 세석평전이 바로 천상의 화원이었다.
강이 흐른다
푸른 산줄기 타고
산을 넘어
달팽이 기어가듯이
강이 흐른다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한다고
산경표에는 말하는데
이 아침에 황금능선을 넘어
중산리 마야골짜기를 건너
거림 골짜기를 지나
남부능선을 은근슬쩍 넘어가니
느릿느릿 넘어도
대성골 아래 花開洞川이구나
강이 흐른다
찬란한 이 아침에
흰 버선발로 산 안개는
강이 되어 흐른다.
산이 깨어나는 아침의 깨끗함은 밤을 새워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한 겨울이 지나자마자 잎도 피기 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이 세석의 철쭉꽃 한 송이도 해마다 피는 꽃이기에 그냥 피어나는 줄 알았는데, 나는 겨우 하룻밤 비 맞았지만 간밤에 온 비 다 맞고, 아침에 산 안개 피어나는 이슬 맞고, 여름철 소나기 한줄기 피하지 못하고 다 맞아야만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사실을 이 아침 밤을 새워 걸어 보고서야 나는 알았다.
우리 인생도 다 알고 사는 것처럼 해도 정녕 우리가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아랴?
우리도 인생을 다 알려면 저 철쭉나무처럼 사계절 풍상 다 맞아야 피어나듯이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살아보아야만 알 수 있지 싶구나.
우리는 세석산장 가는 길은 버리고 지름길로 촛대봉 가는 길로 올랐다. 세석에서 장터목까지 그리고 장터목에서 제석봉 지나고 통천문 지나 지리산 상봉인 천왕봉을 오르는 길은 정말로 눈을 감아도 잡을 수 있는 길이지만 이제 어두운 밤도 다 지나고 간간이 지나가는 산꾼들의 스침으로 그냥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밤과 낮의 구별이 없었다. 오직 걸어가는 일이 나의 소명인 듯, 장터목에서 라면 하나 끊여, 지고 온 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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