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에 한 23시간 지리산 종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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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 쉰 몸에서 쉰 내음 풍기면 23시간 비 맞고 걷다)
임걸샘이 있는 임걸령은 샘이 있어 야영장이 있었는데 관리공단에서 야영을 금지하여 등산로 외는 통나무 울타리로 막았다. 밤이라서 그렇지 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쪽은 풍광이 좋고 바람맞이가 좋은 곳이기도 하다. 저기 멀리 광양쪽 불빛이 가닥 가닥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허나 비를 맞고 마냥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노루목으로 오른다.
임걸령을 출발한지 한시간이 걸려 저녁 9시 반에 노루목 삼거리에 도착했다. 어디가 바위고 어디가 나무 아래이고 어느 쪽에 길이 있고 밤인들 낮같은 내 감각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는 비가 덜 맞은 나무아래에 앉아 과일 한쪽을 나누어 먹었다. 아우는 쉬는 곳마다 담배 불을 붙이고 그 사이에 나는 멍하게 어둠을 응시하는 짐승 한 마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들고 가던 후레쉬도 어느새 희미해져 다시 새 밧테리로 갈아 끼웠다. 불빛이 환하여 마치 낮같이 밝았다. 비 줄기가 드세지 않아 옷이 젖는 줄 몰랐다. 그러나 돌을 밟고 오르내리는 곳은 불빛에 의존하여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불빛을 따라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녁에 노고단까지 가는 사람들이었다.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반달곰 관찰하러 나온 사람이라도 했다. 지리산에는 야간산행이 금지되어 있어 서로가 자신이 신분을 밝혀 증명하려 하는 모양이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우린 그냥 밤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요 하니 조심하라고, 그러나 길을 잃으면 불빛 신호를 보내고 아마 자기 일행이 여기로 오고 있는 중이니 가다 만날지도 모른다고 일러주었다. 야간 산행을 하면서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이 가장 놀라워하는 일이다. 그래서 걸어가면서 사전에 이야기 소리를 내기도 하고, 신발에 종을 달아 종소리를 내기도 하고, 라디오를 켜고 걷는 사람도 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누구나 불을 켜고 걸어오기에 사전에 사람이 있다는 걸 미리 감지할 수 있었다.
뱀사골계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인 화개재 평원에 도착했다. 적막만이 산에 가득했다. 산장은 능선에 있지 않고 계곡으로 한 10분 내려가야 하기에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화개재를 지나면 토끼봉으로 오르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한 30분 땀을 흘리며 올라야 하는 길이다. 별로 땀 흘릴 일이 없는 지금 때를 만났구나 싶어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러나 언제나 속도는 줄여서 천천히 걸었다. 만약에 이 정도의 배낭 무게로 보통 나의 능력으로 걷는다면 휠씬 빨리 갈 수 있으나 우리는 밤새워 걸어야 하고 내일도 몇 시까지 걸어야 할지 모르는 거리가 남았다. 마라토너의 가장 아이디얼한 속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정 속도로 뛰는 것이다.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요, 시간을 정한 것도 아니니 오늘같이 비가 오고 날씨가 좋지 않는 날 그리고 야간에 걸어갈 때는 오직 하나 힘이 있다고 다 소진하지 말고 아껴야 한다. 아낄 때 아낄 줄 아는 사람만이 완주와 승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힘이 철철 넘치는 아우는 일부러 뒤에 세웠다. 먼저 앞서서 걸어가면 아니 따라 갈 수가 없는 둘만의 산행이니 내가 앞서서 속도 조절을 하였다.
30분이면 오르는 토끼봉을 15분이 더 걸려 10시 45분에 도착했다.
잠시 소원하던 비가 다시 내린다. 사방이 훤한 봉우리에 오르면 비가 더욱 옴을 안다. 헌데 비는 오지만 구름 속에 비치는 달빛줄기가 바다에서 일출을 시작하기 전에 빛의 띠를 두른 듯 지평선에 내린 구름 띠 위로 빛줄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쩜 하늘이 개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달이 나올지도, 운이 좋으면 비가 그치고 달빛을 받으며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일순 들었다.
산정 바위에도 비가 젖어있으니 비옷이 아닌 綿 옷이 젖을까 막무가내로 앉아 쉬지도 못하였다.
연화천 산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나오는 연화천 산장까지 나무 계단으로 길을 만들었다. 평소에는 흙 길보다 못한 나무계단길이 오늘은 걷기 좋았다. 미끄러지지도 않고 길도 반듯하니 오늘이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연화천에는 후레쉬를 들고 한사람이 산장입구에 나와 있었다. 다가서니 산장지기는 아니고 밤중에 홀로 나와 캔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나그네였다. 샘에서 물병에 물을 채우고 과일 하나를 나누어 먹고 시계를 보니 자정이었다. 산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내실 사이에 덧문이 있어 덧문밖에 비를 피해 한참을 쉬었다. 그러나 앉을 수가 없었다.
연화천에서 내려가는 길은 사방이 통나무 기둥으로 막혀 있고 한쪽으로 산길이 열려있지만 어두운지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산길을 입구를 찾는다는 것도 무리이지 싶다.
나무 잎새에 빗방울 듣는 소리
빨갛게 달군 담배 불에
어둠은 타고 있다
마음의 눈으로
엽서에 보이지 않는 글씨를 쓴다
그 자리에
빗물이 흘러
먹물이 번진다
내 마음의 엽서에.........
연하천산장 어둠 속에서 자정에
연하천 산장 앞뜰은 대궐앞 같이 넓다. 보이지 않는 마당에 숲은 크게 울타리를 쳐 두었건만 어둠은 울타리도 덮고 마당도 덮어 오직 검정 도화지이다. 그 울타리사이에 난 출입구를 찾아야 하는데 처음 온 사람이라면 그 출입구 찾는 일도 애사로운 일은 아니다. 우린 마치 내 집 마당 대문 나서듯이 어둠 속에서 남으로 난 출입구를 통하여 벽소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각자 하나씩 들고 가던 후레쉬가 이제 한 사람은 불이 없으니 하나로 두 사람이 걸어야 했다. 한 두 번 다닌 길이 아니기에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방향을 익혀 나는 앞장을 서서 길을 찾아 나아갔다. 바위 벼랑사이로 길은 참으로 오묘하게 이어져 있었다. 밧줄을 잡기도 하고 돌밭을 건너고 물기에 젖은 바위들을 조심하며 발을 옮기며 걸어야 했다. 이런 밤길을 아우와 나는 헤아릴 수 없이 걸었다. 그래서 우린 서로의 능력을 잘 알며 또 협조와 의견일치에 거의 환상적 산행 커플이다.
산 위에 오르면 건너 산머리가 희미하게 실루엣으로 보였다. 빗줄기가 가늘어지면 산아래 골짜기의 모습도 어렴프시 눈에 잡혔다. 형제봉 바위 곁을 지나면서 산사태로 길이 생겨 잠깐 길을 잃고 되돌아 나왔다.
바위가 삿갓모양으로 하늘을 비스듬히 덮어 비가 들이치지 않는 고갯마루에 오랜만에 앉았다. 비 때문에 그 동안 제대로 앉을 수도 없이 걸었다. 나란히 앉아 나도 담배 한 대를 아우에게 얻어 불을 붙여 빨았다. 숲도 하늘도 거저 어둠뿐인 곳에 빨간 불씨 두 개가 타고 있었다.
비는 거치지 않고 내리고 마음은 허공에 도는데 나는 혼자 도는 마음을 되 붙잡고 다짐을 한다. 과거는 허방다리이다. 내가 오늘 산길을 걸어온 것처럼 걸어온 과거는 그냥 버리고 말일이다. 오직 앞으로 나갈 길만 생각하면 되는 일처럼 살아온 과거는 없는 것이고 살아 갈 미래만 남은 것이다. 허나 남은 미래도 지금 내리는 비처럼 어둠처럼 결국 밝지는 못하지 싶어 마음은 또 다시 무거워지지만 그래도 나는 걸어갈 것이고 살아갈 것이다. 어떤 현실이 날 지체하게 하여도 발길을 붙잡아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벽소령산장에 발동기 소리가 산장을 알려주었다. 산모롱이를 돌아 숲 사이를 빠져 나오니 갑자기 전방에 불빛이 빗줄기 사이로 번져 나오고 밝음이 다가왔다. 산장 마당에 건 가로등 불빛이 혼자 졸고 있는 벽소령에 우리는 새벽 2시 반에 도착하였다. 취사장으로 직행을 하여 식탁에 앉아 다리를 펴고 길게 누워보니 참으로 편안함이 느껴졌다. 나는 취사장 불빛아래 누워 빗소리를 듣는다. 걸어오면서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와는 다른 소리였다. 산장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꽹과리 소리 같았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비속에서 본 귀신생각이 이제야 되살아 나왔다. 땅을 보고 걷다 형제봉 바위를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바위는 흰 얼굴을 하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은 사람인데 귀신의 형상이었다. 길가에 말뚝처럼 선 죽은 고목의 모습도 마치 원귀가 되어 살은 다 섞고 흰 뼈만 남은 인골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내가 걸어온 길에만도 수십 구나 되는 나무 귀신을 보았는데 이 골짜기 숲 속에는 얼마나 많은 나무 귀신들이 어둠을 먹고 비를 맞고 밤을 지새울까?
저 아래가 바로 화개동천의 마지막 골짜기인 빗점골이고 대성골이 아니던가? 1952년 2월의 이 산 골짜기에 있었던 민족의 대 비극인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남은 2천여명의 빨치산 중에서 3일 동안 천 수백만의 빨치산의 붉은 피가 흰 눈이 덮인 이 골짜기에서 총에 맞아 죽고 얼어죽고 굶어 죽어갔었다. 그 원귀들이 이제 저런 나무 귀신이 되어 이 산에서 아직도 혼을 뿌리며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인데 말없는 지리산에는 빨치산의 슬픈 기억은 다 잊고 산꾼이 잠을 자는 편한 산장이 들어와서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밤이다. 한밤중이다. 자정도 지나고 3시가 넘어가는 시간 나는 발걸음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내린다. 허나 오늘밤은 잘 수가 없다. 오직 걸어서 가야하는 밤이다. 아우는 짐을 내리자 버너에 불을 붙이고 라면을 끊인다. 몸을 녹여야 또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식탁 곁에 가지런히 정리된 코펠들이 놓여있었다. 나는 그 밥상처럼 놓여있는 코펠 속에서 밥을 떠 올렸다. 그래 저 속에 먹다 남긴 밥이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준비한 도시락은 아침에 먹어야 될지도 모르지. 이런 속도로 걷는다면 내일 오전에 대원사까지 내려가는 것이 어려울 것이야! 그러면 밥 한 끼가 모자라지!
나는 마음에 작은 티끌 하나 없는 단순한 마음으로 남의 코펠을 열었다. 코펠의 사이즈는 제법 컸다. 첫 번째 코펠을 열자 그 속에는 하얀 쌀밥이 반이나 담겨 있었다. 다른 코펠은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아우에게 들고 가서 라면 속에 밥 이 인분을 떠 넣었다. 남은 밥은 다시 제 자리에 두고 밥이 끓는 동안 나는 빗물이 묻어 번지는 종이의 4분의 일 조각으로 찧어서 엽서 만하게 만들어 글을 썼다. 이 밥을 남긴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적었다. 내 경험으로 이 밥은 그들이 저녁 식사후 남긴 밥이지만 양을 봐서는 아침식사로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밥이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내가 만약 밥 주인이라면 아침에 일어나서 누가 내 밥을 먹고 갔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참으로 기뻐할 것이다. 산에 가면 짐승 밥도 주고 싶은 사람인데 하물며 배고픈 사람이 먹었다는데 이 또한 얼마나 기쁜 일이냐? 이런 생각을 하니 내 마음에 먼지하나 묻지 않는 마음으로 그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비를 맞고 야간에 걸은 우리에게 더운 라면에 따뜻한 밥이라 천하의 별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비에 젖은 찬 몸이 스르르 녹아 내리고 배가 훈훈해졌다.
그래 지금은 밤이고 잠을 자는 시간인데 사람은 자야하는데 나는 왜 이런 어려운 산길 걷는 것을 즐기는 것일까? 이런 우문을 해보았다. 답은 간단히 나왔다. 그래 넌 왜 이렇게 어려운 세상을 알면서 살아가는가? 마찬가지다. 산길이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때가 있기에 걸어가듯이 인생살이도 그러하기에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사는 날까지 살아야 하는 것처럼.
산이 좋아 산을 왔는데
달은 없고 비만 오더이다
적막 속에 우는 풀벌레소리
나그네 배속의 꼬르륵 꼬르륵 소리이구나
염체 체면 불구하고
남긴 밥 훔쳐먹고 갑니다
인연이 닿으면
오늘 보시한 밥
백배 천배 갚을 날이 오겠지요
잘 먹고 갑니다.
메모 한 장에 연락처를 적어 호주머니에 남은 초콜릿 한 조각을 코펠 위에 올려두고 미련 없이 벽소령을 떠났다. 3시 40분이었다.
후담이지만 적어보면 다음날인 월요일 출근을 하였더니 서울사람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바로 이 밥 주인이었다.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나의 생각과 똑 같았다. 사천에 아는 사람이 있어 내려갈 작정이니 술이나 한 잔 사시오! 하였다. 마땅히 그럴 일이지요. 주소 하나 알려주시면 내 못난 잡글이지만 자필로 쓴 서명에 명정기 한 권을 드리리다.
남겨 주신 쪽지 시가 너무 맘에 들어 고이 보관하겠노라고 하셨다.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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