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에 한 23시간 지리산 종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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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 쉰 몸에서 쉰 내음 풍기면 23시간 비 맞고 걷다)
지리산,
내가 지리산을 다닌 지 이십 년도 더 지났다.
그런 지리산을 아직도 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산을 두고 당신은 왜 산에 오르느냐는 질문을 주고받는다.
산이 그거 있기에 산을 오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산이 좋아 오르고, 산은 오르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지만 또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닌 지리산에 대하여 한 두 번 쓴 산행기도 아닌데 또 산행기를 쓰자니 내심 말이 아니긴 하다만 이번 지리산 산행에 대한 감회는 남다른 데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휴가를 받고 보니 전국의 명성고적지는 인산인해라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그나마 조용한 산길을 찾았다. 하루 저녁은 지리산 취밭목 산장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에 천왕봉을 향했는데, 그 시간에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산장에서 올라가는 길이고 그들은 산의 정상인 천왕봉을 지나서 내려오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산에서 만나면 안녕하셔요? 수고하십니다. 거의 다 와 갑니다. 이런 인사를 주고받는다.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사람 중에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아저씨들도 있었다. 나는 단순한 생각으로 천왕봉 근처인 장터목산장에서 자고 일찍 떠난 모양이구나 했다.
"어디서 주무시고 오시는지요?" 하고 내가 물었다.
"잠을 못 자고 오는 길입니다."
"어디서 출발하셨는데요?"
"노고단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온 겁니다."
"언제요?"
"어제 저녁 6시경에 출발하여 밤새 걸어 여기까지 온 겁니다. 얼굴이 사람 모양이 아니지요? 저 아래 대원사근처에 목욕탕이 있는지요?"
"덕산까지 가셔야 공중 목욕탕이 있습니다. 철야 산행을 하셨다니 덕산 가는 길에 여관이나 모텔이 있을 겁니다."
사람들을 보내고 생각하니 그들은 지리산 종주 산행을 당일로 했단 말이었다.
산을 잘 타는 사람은 당일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와서 중산리로 하산하는 종주를 하지만, 야간을 이용하여 천왕봉에서 대원사까지 완전 종주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그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여 년을 지리산을 다닌 나, 산이라면 아직은 웬만한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개인적인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는 그만 놀라움과 새로운 사실에 한참동안 그 사람들의 말이 정말일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꼭 10년 전 내 나이 마흔 되는 해, 지리산을 다닌 지 십 년이 지난 해, 종주만도 여러 번 하였던 그 때, 나는 당일 종주의 꿈을 이루어 내었다.
노고단 산장에서 자고 새벽부터 걷기 시작하여 일몰을 천왕봉 정상에서 보고 중산리마을로 내려오니 밤 9시였다. 새벽 5시에 출발하여 16시간동안 걸어서 하산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헌데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했던 대원사까지 무박 당일 종주는 지리산의 능선을 잘 아는 나로서는 실로 경이로운 사실이었다.
그래, 내 눈으로 보고들은 사실이야! 기회가 오면 도전을 해 보리다. 그 동안 좀 더 열심히 산행을 하여 몸을 만들어서 도전하리다. 저 사람들이 해 내는 일인데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아니 꼭 하리다. 더 나이 먹기 전에, 내년 여름이면 좋겠지. 야간에 걷는 일은 밤이 짧은 여름철이 기온도 낮아 걷기 좋을 거야! 이런 생각을 했었다.
지난 주중에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아우 장화가 전화를 해 왔다. 아우는 지난 수년동안 나와 영남일원의 산들을 다닌 오랜 산 동료이다. 전화가 없던 아우가 전화를 한 이유는 안부를 묻고 내 건강이 좋아졌다면 가을이 왔으니 산행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토요일은 오전근무를 하니 일요일 일찍 출발하도록 전날 저녁 사천으로 와서 나와 같이 자고 지리산으로 가자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렇다면 그 일을 해보자!
몸을 만들고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이십 년을 산 다니면서 만들어져 있는 몸, 차라리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시행하는 것이 나은 일이다.
나는 아우를 오는 토요일 진주 개양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날이 오길 기다리며 남은 며칠을 일찍 잠을 자는 일밖에는 별다른 준비가 없었다.
2002. 9월 14일 토요일. 12시 퇴근시간에 맞추어서 회사근처 보신탕 집으로 갔다. 산행 전에 배속을 든든히 해 두는 것이 요령이다 싶어 보신탕 한 그릇을 비우고, 할인 마트에서 야간 등산시에 밤새 사용할 후레쉬용 건전지 두 벌을 더 샀다. 그러니 예비용 후레쉬까지 두 개를 준비하고 이미 장착 된 것까지 모두 4조의 건전지를 준비하였다. 이번 산행에서는 산에서 취사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했으니, 이제 세끼 김밥을 사면 되는 일이다.
등산양말에 등산화를 신고 등산복으로 챙겨 입었다. 가능한 짐은 줄여야 했다.
성삼재에서 대원사까지 산길로 50키로에서 60키로미터 거리이다. 그것도 잠을 안자고 걷는 일이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완주를 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산장에서나 중간에 비박을 하지 않는다. 여벌로 내의 한 벌과 추위를 대비하여 방풍용 자킷을 넣고 배낭을 들어보니 취사도구가 없는 탓에 한결 가벼웠다.
김밥 아주머니는 내일 아침까지 김밥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했다. 여름 날씨에다 지금이 겨우 낮 2시인데 내일 아침까지 김밥이 상하지 않는다는 보장는 불가하단다.
"얼음주머니를 하나 넣어주셔요."
김밥 일인 분에 이천 오백 원하는 걸 팔면서 친절한 아주머니는 냉장고에서 얼음이 된 팻트병을 하나 넣어주었다. 물통이 하나 들어 무거워지긴 해도 저녁이 되면 얼음은 녹을 것이고 산에는 기온이 내려가니 저녁에 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창원서 승용차로 오는 아우의 위치를 확인하니 마산을 지나 남해고속도에 진입하였다.
목 감기 기운이 남아서 약국에서 아스피린 한판을 사 넣었다. 나는 해열에는 아스피린으로 넘기는 체질이다.
사천에서 진주 개양까지 가는 길에 차창에 빗방울이 지고 있었다. 지금 비가 오지만 산에 비가 올 것인지 안 올 것인지는 산에 가봐야 아는 일이다.
산도 위치에 따라 오는 곳도 있고 안 오는 곳도 있는 일이니, 비가 오는 일과 우리가 산행으로 걷는 일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비가 오고 안 오고는 산행을 가느냐? 마느냐? 하고는 무관한 일이었다. 나도 아우도 언제나 그렇게 산행을 해 왔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일기예보를 보고 판단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고, 그런 일에 의견 조율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떠나 버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아우가 개양 버스 정류장 근처에 차를 두고 정류장에 도착하여 채 2분도 안되어 하동행 버스를 탔다. 하동까지 한시간, 하동서 구례까지 한시간, 버스 연결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나 하동서 구례 가는 버스를 4시경에 타면 5시 10분에 출발하는 성삼재 막 버스를 탈수가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7개월만에 만난 우리는 포옹을 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을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우는 언제나 카우보이 모자를 썼고 나는 앞창이 있는 모자를 썼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산행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대개 그러하다. 그러나 산에 정말 매료되면 건강을 위해서는 두 번째나 세 번째의 목적이 되고, 산이 좋아 산에 가고 산에 가야 마음이 편안해 지기에 산행을 한다. 정말 건강만을 위한다면 몇 시간을 차에서 시간을 소비하는 장거리에 산을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산을 가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운동이 목적이라면 적당히 걷고 내려와야 되는 일이다.
그러나 산에 혼이 빠지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내 몸과 산을 동화시켜서 하나로 만들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다. 땀이 온 몸을 적시고 체력이 소진하여 정신력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무거운 배낭을 한가득 지고 발걸음을 옮겨 산을 향해 오르는 것은 자신의 인내심을 키우고 산의 꼭대기에 올라서 배낭을 내리고 다리를 풀고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언할 수 없는 감회 때문에 그렇고, 이루어 냈다는 성취감 또한 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동 가는 버스에 오르자 아우는 빈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나도 맞은편 옆자리에 배낭을 놓고 혼자 앉았다. 헌데 오랜만에 만났는데, 좌석도 남았는데 각자 배낭을 끼고 따로 앉을 일이 아니라, 나는 아우의 배낭을 내 자리로 옮기고 아우 곁으로 갔다. 그리고 그 동안 못 다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 시간동안 풀고는 동행하지 못한 모씨 아우 흉도 한껏 보면서 희희낙락 거리며 하동으로 갔었다.
하동에 도착하니 10분 후에 출발하는 구례행 버스가 우릴 기다린 듯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동서 구례 가는 길은 실로 우리 나라에서 몇 안 되는 아름다운 길이다.
서울 사는 사람들은 북한강을 따라 춘천 가는 경춘가도를 아름다운 강변도로라고 하지만, 지리산과 광양 백운산을 끼고 모래톱을 쌓고 흐르는 섬진강을 한번이라도 와 본 사람이라면 자연의 아름다움은 경춘가도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각설하고, 버스는 하동 배 밭을 지나고 악양 들 평사리를 지나서 화개장터가 있는 쌍계사입구에 도착할 무렵에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그래, 아름다운 길은 아름다운 사람만이 다닌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이 다니는 길은 아름다운 길이 된다. 그래서 이 길을 지나는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이고 아름다운 길이다.
자다 깨다 어느새 구례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진주에는 오던 비가 하동 구례에는 오지 않았다. 허나 하늘은 흐려있었다. 배낭이 젖으면 짐이 무거워지니 배낭커버를 하나씩 샀다. 그리고 이미 두 번이나 사용한 일 천 원 짜리 일회용 비옷이 배낭에 있기에 이제 330원 짜리 일회용 비옷이 되었다. 비가 온다면 이 비옷이 비를 막아 줄 것이다.
성삼재 가는 군내버스에는 운전사와 우리 두 사람이 전부였다. 앞자리 양쪽으로 나란히 앉아서 화엄사를 지나서 노고단 가는 성삼재로 버스는 출발하였다. 천은사 근처에서 버스는 정차를 했다. 또 문화재 관람료와 지리산 국립공원 입장료를 내란다. 이제는 이 문화재 관람료 때문에 진절머리가 나서 만원권 한 장을 주고는 아무 말 없이 주는 대로 거스름돈을 받고는 운전기사에게 메모용 백지를 구하니 가진 용지가 없다고 했다. 운전석 위에 엽서 몇 장이 꽂혀있었다. 아마 교통불편신고용 엽서이지 싶지만 두 장을 꺼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산행 중에 떠오르는 글귀라도 생기면 단어라도 적으면 기억하기 싶다. 꼬불꼬불 성삼재로 오르는 길에는 보랏빛으로 수수밥 같은 싸리꽃이 피었다. 해발 일 천 고지를 넘으니 완연한 가을이다.
1300고지 성삼재에서 1500고지인 노고단까지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는 포장도로이다. 허나 차량출입은 통제가 되고 있었다. 저녁 6시가 되기 10분전이다.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사람보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다. 대개는 저녁에 노고단산장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산행을 할 사람들이다. 허나 우리에게 산장이란 게 의미가 없는 날이었다. 산장의 숙소가 필요하지 않고 추위를 피해 비를 피해 밥을 먹을 수 있는 취사장이 필요한 날이었다.
얼기설기 화강암을 반듯이 깎아서 박은 도로를 밟고 오르는 길섶에는 가을꽃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여름 꽃들은 다 지고 이름 모르는 가을꽃들이 길 마중을 나왔다.
"이런 이쁜 꽃들을 길가에 심었구나!"하고 아우를 보고 말하자.
"심다니요? 저절로 자란 것들이지요."
"저절로 자란 것이 어디 인나? 다 하나님이 심은 것이지."
"해 참. 내가 못 이긴다니까. 맞아, 성님 말이."
화엄사에서 올라오는 코재를 지나 차가 올라가는 길이니 이리 꼬불 저리 꼬불 돌아서 2킬로를 한 삼십 분 걸려서 노고단 산장 취사장으로 직행했다.
취사장에는 한참 식사를 마련하는 산꾼들이 가득하였다.
우린 가장자리를 두고 중앙 식단에 둥근 통나무 의자를 하나씩 차고앉아서 김밥을 꺼내 김치랑 밥상을 차리면서 아우가 라면이라도 하나 끓일까요? 했다.
그냥 옆집에 찌개 끊는 냄새가 구수하니 먹고 남으면 얻어나 먹자.
이런 농담 삼아 진담 삼아 했더니 그 말을 들은 이웃집 아가씨는 찌개가 끊자마자 한 그릇을 선 듯 내어놓았다. 훈훈한 참치 찌개를 얻어서 김밥으로 저녁을 마치고 커피 한잔을 끊여 마셨다.
지난여름 월드컵 4강 전이 있던 날, 산행 온 초면의 사람들과 돼지 수육으로 소주를 마신 기억이 있지만 오늘은 떠나야 했다. 수통에 물을 채우고 취사장을 나서니 사방은 이미 어둡고 가랑비가 나리고 있었다. 후레쉬를 켜고 노고단 정상을 향해 돌계단을 오르는 길에는 휘껏 휘껏 불빛에 빛나는 등불이 서너 걸음마다 길가에 꽃 초롱을 밝혀들고 마중을 나와있었다.
불빛에 화사한 구절초가 한창이었다. 그 흰빛이 불빛에 불 밝히니 밤이 아니면 연출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꽃들도 밤에는 잠을 잘까? 안 잘까? 그러나 오늘 저녁에는 이 구절초들은 내가 올 것을 알고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다. 사계절을 기다려 이제야 제철 만나 피는 구절초인데, 어찌 아쉬워서 잠을 잘 수가 있단 말인가? 구절초들은 꽃무더기로 피어서 어두운 길을 밝혀 주었다.
구절초 등불 켜고
님 마중 나온 꽃들아
밤이 깊어도
새악시 초야 같은 밤
어찌 잠을 오랴!
임걸샘 물소리
하늘에는 빗소리
밤새워 걷는 나그네
목마름을 축여주네.
8시 30분 아우 장화는 비속에서 담뱃불을 붙이고
나는 젖은 통나무 담 기둥에 기댄 채
걸어가야 할 길을 셈하다 그만 두었다.
어차피 산길은 거리를 걷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걷는 것이다.
언제나 예상한 시간이 되어야 그 자리에 가는 일이 산길을 걷는 일이다.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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