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건너서 창원으로(낙남정맥 종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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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금 오봉산에서 바라다본 낙남정맥의 형상은 다음과 같았다.
태백산 영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낙동강을 타고 남으로 남으로 칠백리를 흘
러서 삼량진 포구까지 내려오다 남해 바다로 바로 빠지질 못하고 남해안쪽
산맥에 부딪친다. 강물은 삼량진까지는 내려오다 무척산에 막혀 남하하지
못하고 여기서 물길은 좌우로 흔들다 삼량진 용당 나룻터를 만들고 西쪽으
로 흘러가 한림정, 진영, 수산으로 평야를 만들고 동쪽으로 빠져서 김해평
야를 이루다 마침내 낙동강 하구 을숙도 지나 다대포항으로 흘러 바다로 빠
져들었다.
그 과정이 정말 예사롭지 않아 김해 무척산으로 혹은 낙남정맥을 흔들고 밀
고 때려보다 뚫지 못하고 마침내 강물은 오봉산과 동신어산 사이로 밀고 넘
어서 큰 물길을 만들어내었으니 이곳이 바로 저 물금의 물금나룻터라 지금
의 물금취수장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 물금역이 있는 양산군 물금면 오봉산
과 낙동강 건너 김해시 상동면 고암리 동신어산은 이 물길이 있기 전에는
산세가 이어져 있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낙동강물과 낙남정맥은 즉 산과 물은 그 세력을 겨루다 결국 물이 산을 넘
었으니 "물은 산을 넘어나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
다.
내가 지난번에 영남 알프스를 타고 이곳 오봉산까지 와서 산행을 마무리하
려고 했다가 이 지형을 바라보고, 낙동강도 생기기 전에는 여기 강물 위로
산의 맥이 연이어져 있었을 터인데 여기 와서 보고 이를 알고도 낙남정맥을
아니 탈수가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혹 영남 알프스의 남쪽자락인 원동
토곡산에서 물금 오봉산 산행에 관심이 있으시면 "원동에서 물금까지"라는
산행기를 보기 바란다.
지난번에 토곡산 오봉산을 타고 물금역까지 왔으니 오늘은 물금역에서 시작
해야 하니 일요일(99. 12.12)아침 7시 50분 창원발 부산행 통일호에 몸을
실었다. 창원역까지 가는 직행버스는 열차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도착
하여 역에 들어서니 동행할 정군은 기다리다 눈도 튀어나오고 입도 삐쭉이
나와 있었다. 그러나 기차가 도착하려면 2, 3분은 남았기에 커피를 뽑아 마
시고 프랫트홈에 들어서니 열차는 아주 느리게 마산역에서 들어왔다. 마산
서 창원역까지는 불가 4Km도 안 되니 열차가 어찌 속도를 낼 수가 있겠느
냐. 일요일 아침열차에 통일호이니 차는 실내가 텅 비어있었다.
이 얼마나 상쾌한 여행이드냐. 아침공기가 싸늘한 수정 같은 맑은 겨울날,
마음 맞는 벗이랑 완행열차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산행을 떠나는 심정을 이
해 할 수만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사람 중에 한사람이 틀림이 없다. 오늘
산행과 여행할 길은 안내도 방법도 없다. 다만 오봉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낙동강 푸른 강물이 너무나 평화롭고 온화하여, 흐른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고 호수처럼 잔잔히 고여 있었고, 산아래 直壁을 이루어 협곡을 이룬 낙
동강 물금나룻터와 그 강 사이를 한줄기 선으로 잇는 외나무다리인 부설 철
교를 보았기에 우린 그 다리를 목표로 가고 있었다.
오전 9시경에 열차는 물금역에 도착하니 바람이 일고 있었다. 역 앞 가게에
서 라면과 소주 한 병을 사면서 낙동강을 건널 다리의 위치를 묻자 가게 주
인은 여기엔 다리가 없고 구포까지 내려가든지 삼량진까지 올라가던지 둘
중 하나의 방법밖엔 없다고 했다. 나룻배가 없냐는 질문에 나룻배 사라진지
는 아주 오래 되었다는데, 우린 그만 주저앉을 것인가? 산 위에서 바라본
다리를 묻자 그 다리는 지금은 통행이 금지되어 아무도 그 다리를 건너가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아, 이제 되었구나 건너고 안 건너고는 그 사람들의 경험한 일이지 내가 건
너고 못 건너고는 지금부터 시도 할 일이다. 다만 다리만 있으면 되지 않느
냐. 얼마나 가면 되냐고 되묻자 한 10여분 걸으면 간다니 가보자. 강변을
따라 밭둑 길을 걸었다. 강바람이 드세어 양 볼이 매섭도록 차가웠다. 오버
트라우즈의 모자를 쓰고 저만치 외줄로 강물 위에 서있는 다리를 보고 바람
을 맞서서 걸었다. 그런데 진작 그 곳에 가니 다리는 안보이고 공장 건물
같은 담장이 강변을 막고 있어 다리로 갈 수가 없었다. 강의 상하 어느 쪽
도 다리로 연결되는 길은 없었다. 담에는 높다란 망루가 있고 경비가 보이
기에 뒷문을 통과하여 찾아 들어갔다. 그 건물 안쪽으로 다리가 보였다. 다
리 위에 철조망으로 입구를 막았으며 다리는 녹슬어 사람이 걸으면 당장이
라도 바스러질 듯 하였다. 다리 난간 아래로 수도용 철제배관이 달려 지나
가고 있었다. 건다가 무너지더라도 보내만 준다면 가보리다. 이 겨울에 저
푸른 강을 헤엄쳐갈 수는 없지 않는가. 경비 초소로 올라가서 사정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강 건너편으로 가야하는데 방법을
알려주시오! 경비 아저씨도 이 질문에 해 줄 수 있는 대답이 너무나 묘연하
여 그도 한참을 말없이 듣다가 하는 말이 여기는 보안구역이니 민간인이 그
냥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다.
"여기가 어딘가요?"
"낙동강 물 관리 공단 물금취수장이라오."
그러니 부산 김해지역 수돗물 공급처란 말이군.
"나룻배가 없나요?"
대답은 없고 여길 나가야하니 정문으로 가면 반장님이 계시니 상의하라고
귀띔을 준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 반장님 성씨가 무엇인데요?"
"수고하십시오."
인사를 마치기가 바쁘게 왔던 길을 돌아 정문으로 가니 반장이 있었다.
가면서 정군에게 다짐을 받았다. 반장과 상담 중 내가 가자고 하기 전에 절
대로 먼저 가자고 하지 말 것이며,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고 말
다짐을 받았다. 만약 내려가서 구포다리를 건너 다시 올라오려면 오전 한
때는 다 지나도 소용이 없을 터이니 여기서 끝장을 보는 시간이 아무리 걸
려도 그보다는 빠를 것이며, 또 우리가 산맥을 타고 왔는데 여기서 끊어진
산맥의 강물 위를 타지 않으면 지나갈 낙남정맥의 길이 무의미하니 헤엄을
치든 나룻배를 타든 저 다리를 건너든 결판을 내야 할 것이니 혹 정군이 조
급하여 중간에 일을 그르치면 안되니 다짐을 한 것이다. 그리곤 아주 천천
히 반장님께 내 소개와 그 동안의 우리 산행의 설명과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산줄기 설명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강물이 내가 가야할 저 산맥
을 끊었다는 설명을 듣든 말든 하고 하고 또 설명하였다. 이 강물 때문에
내가 가고자하는 저 산맥을 못 탄다는 것이다. 나는 가야하고 강물이 길을
끊어 내 뜻이 깨어지게 되었다. 겨울만 아니면 헤엄쳐서라도 갈 터인
데.....
나는 여기 초행이라 잘 모르니 여기 계시는 분들은 건널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니 좀 가르쳐주시오?
앉지도 않고 문밖에 서서, 그냥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꺼내고 한 30분을
하니 정군이 얼굴을 찡그리고 조급하여 발을 굴리고 있었다. 나는 시종 웃
으면서 어제는 저 오봉산에서 자고 오늘은 김해 신어산까지 갈 것이니 우리
의 앞길을 막아보았자 서로가 피곤하지 않겠느냐? 우린 건너가야하고 우린
방법을 모르니 우리는 어찌하면 될 것인가?
드디어 반장님은 아무대답도 없이 전화통으로 무어라고 지시를 했다. 전화
가 안쪽에 있어 난 무어라고 말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내 짐작으로 방법
이 제시된 것을 직감했다.
"왔던 길로 올라가면 나룻터가 있으니 그리로 가시오."
"대단히 고맙습니다. 반장님."
혹 마음이 그 사이에 변할까 뒤도 안 돌아보고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떠났
다.
취수장 담 길을 걸어가며 둘은 얼마나 붙들고 웃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찼다. 나룻터에 도착하니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
듯이 왔다. 젊은이 세 사람이 내렸다. 그들은 모터보트 한 대를 물위에 띄
웠고 시동을 걸더니 뱃머리를 부둣가 선착장에 알맞게 붙이었다. 마치 제임
스 본드가 나오는 007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 선장 한사람이 우리를
태우고 햇살 빤짝이고 江心(강심) 푸른 물금나루를 가르며 배는 순식간에
건너갔다.
신어산이 가까워지고 오봉산이 멀어지면서 물금은 사라지고 김해가 나타나
면서 취수장 물통을 매단 물금 외다리를 비껴 지나쳐서 사뿐히 강을 건넜
다. 배는 모래알이 사금처럼 반짝이는 모래톱에 밀리듯 닿았다. 내리면서
그 반장의 이름과 이곳 주소를 물어 보았다. 그리고 강 건너 취수장을 바라
보며 손을 흔들어주고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아까 헤어질 때 못한 절을
그 반장이 바라보거나 말거나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맑은 하늘 아
래 아침나절이 햇살에 반짝이는 행복하고 즐거운 낙남정맥 산행을 시작하였
다.
모래밭길 사이로 얕은 개울이 흐르고 부러져 넘어진 철조망을 지나니 마을
이 나오고 도로가 나오고 다리가 나왔다. 경남 김해시 상동면 고암리 매리2
교 지점 삼거리다. 다리에서 20m 남쪽으로 나와 서쪽 골짜기로 접어든다.
이곳은 골짜기를 공단으로 조성한 상동면 고암리 공장지대이다. 골짜기가
길 것 같아 올라가는 승합차를 세우니 해장술이 취한 50대 중년이 운전하는
차를 탔다. 술이 거나해져 아주 기분 좋은 모양이다. 스스로 술이 취해 운
전하는 것이니 단단히 붙들고 있으라고 주의를 주더니 혹 시간이 나면 공장
으로 가서 한잔 하지않겠냐고했다. 한 10여분 말상대를 해 주다 내렸다. 왼
쪽은 하천이고 산은 골짜기 좌우로 앉아 있으나 우린 오르기 쉬운 오른쪽
산으로 길을 찾아 올랐다.
지도 한 장 안내문 한 장 없이 보고 듣고, 지도 머리 속으로 그리며 동신어
산을 상상하며 또 가면 신어산을 만날 것을 그리며 참나무 숲이 우거져 비
탈길이 미끄러운 길도 없는 길을 오르고 있었다. 오르다보니 여기저기 춘란
이 파랗게 그 긴 잎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군이 이를 알고 소리를 하기에
살펴보니 그 수가 하도 많아 마음먹고 채취한다면 한 자루는 캘 것이나 몇
포기 캐다 갈 길이 멀어 일어섰다. 능선이 오르니 희미하나마 길은 있으나
참나무 잎으로 길을 쓸며 걸어야 할 지경이다. 산너머 북동으로 김해로 연
결하는 도로인지 밀양으로 연결하는 도로인지는 모르나 신작로가 보이고 그
곳도 여기저기 공장들이 있었다. 사각사각 낙엽을 밟으며 걷다 그만 길에
크게 누우니 정군은 낙엽을 모아 내 몸 위로 덮어 동그랗게 낙엽 무덤을 만
들어 주었다. 낙엽 속은 따스했다. 그리고 가볍고 아늑하였다. 그대로 잠이
들고도 싶었다. 아, 좋은 무덤자리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어찌 죽은
자가 알 수가 있겠냐마는 산 자는 좋고 나쁘고를 알지. 또 다시 우린 능선
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정말 우린 잘도 걷는다. 어디 산길 걷는 대회라
도 있다면 출전해도 되리라. 어디가 동신어산인지 어디가 신어산인지 생전
처음 온 땅에서 동서남북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하나로 창원까지 갈 작정
이다. 물론 오늘은 김해까지만 가고 다음에 연결하여 낙남정맥 길인 창원
용지봉으로 해서 우리는 창원 땅으로 입성하면 이번 목표는 달성한 셈인 것
이다.
저만치 남서로 제법 높은 산이 있기에 그냥 봉우리를 보고 나아갔다. 그러
다 고개를 만났다. 다음에 알고 보니 생명고개라고 했다. 김해서 밀양 가는
국도인가? 아니다 임도가 낮은 재를 넘으니 고갯길이 되었다. 길을 횡단하
여 과수원 사이로 낙남정맥 리본을 찾아 오르다 탕건바위 대문바위에서 남
쪽을 바라보고 점심식사를 했다. 바위 위 적당한 곳에서 라면을 끊이고 찬
밥을 꺼내 국물에 말아 배를 채웠다. 오후 2시에 신어산 정상에 올랐다. 산
불 감시초소엔 감시원이 무전기로 상황보고를 하고 있었다. 겨울 바람이 하
도 거칠어 신어산 정상을 뒤로 하고 서봉으로 갔다. 서봉까지는 아주 길이
넓어 편안히 걸었다. 그러다 정맥은 급경사를 타고 김해 가야 골프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오늘의 종착지는 저 골프장으로 하산하면 된다. 내려가니 3
시 반이고 김해 가니 4시였다.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고 세기가 바뀌고 천년이 뀌어 새 천년 2000년 새해
가 밝았다. 천왕봉 일출에 여기저기 다니느라고 잠깐 남게 두었던 낙남정맥
김해 창원코스를 밟기로 작정한 날이 2000. 01. 08(토) 오후였다. 오전 업
무 마치고 바로 온다는 정군은 30분이나 늦게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그래
도 오니 반가웠다. 창원 김해간 버스로 김해 도착하니 2시 반이었고 가야
골프장까지 택시로 갔다. 영운리 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한 시간이 좀 늦은
오후 3시였다. 그러나 오늘 걸어두어야 내일은 남은 창원까지 거리를 마칠
수 있다는 내 판단 때문에 오후이지만 나섰다. 여기서 창원까지는 30km는
족히 되는 거리니 아무래도 내일 당일로 마치기엔 무리였다.
고개 지나 왼쪽으로 낮은 인도가 나오고 따라 오르면 기도원이 있었다. 뒤
로 오르면 바로 정맥의 능선이 이어지고 리본들이 한들한들 반겼다. 아주
낮은 야산들이 줄지어 서있고 다만 멀리 무척산과 신어산만 큰산으로 바라
다 보였다. 남녘으로 부연 겨울의 연무가 서리어 불모산의 흔적만 어설프게
보이나 리본이 없고 길이 사라진다면 길 찾기 어려울 것이다. 산 위 작은
고원이 나오고 묵은 논밭이 있었다. 낮으나 깊은 곳이었다. 스러져 가는 움
막이 한 채 빈집으로 있고 예전에는 그래도 여기서 채소나 약초는 재배하여
살았던 곳이리다. 새삼 여기에 와서 사는 이가 없으니, 저 아래 세상이 그
렇게 좋은지 알 수가 없구나.
사방으로 산이 아니라 마을이고 공장이고 돌 깨는 엔진 소리가 요란하다.
산을 올라서니 벌써 부연 돌가루가 앞을 막고 석재 냄새가 불어왔다. 김해
밀양간 1017번 지방도 지나는 나발고개를 지나니 석산 채석공장이 정맥을
무너뜨려 산이 하나 사라지고 있었다. 우로 돌면 길은 있을 것이나 저 날리
는 돌가루를 마시며 가야하니 길이 없더라도 돌가루 안 날리는 좌로 황폐화
된 돌밭을 사막처럼 걸었다. 마치 영화 보면 나오는 간첩의 도주장면처럼
주위는 전쟁으로 온산이 폭발해 버린 장면이 연상되었다. 예비군 훈련 교장
이 나오고 산정에는 남녘이라 가끔씩 춘란도 보였다. 짧은 해가 어느덧 사
라지려고 하니 빠른 걸음으로 국도로 내려서야 하는데 길은 자꾸만 갈라져
결국 잘못 들고 말았다. 이대로 가다가 국도도 못 만나고 빠지니 그냥 마을
이 보이니 내려섰다. 망천 마을의 빈들을 가로질러 14번 국도 올라서니 5시
가 조금 지났다. 차들이 토요일 저녁이라서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아무래
도 창원시내로 갈려면 다시 김해서 창원 가는 편이 빠를 것 같아 김해까지
시내버스로 돌아갔다. 김해 창원간 직행 버스로 창원 오니 7시였다.
다음날인 1월 19일(일) 아침 7시에 창원역 39사단 정문 앞에서 진영을 지나
어제 걸어온 김해 망천 마을까지 부산행 완행버스를 탔다. 망천고개에서 7
시 40분에 산행을 시작했다. 길은 도로가 끊었으니 길이 없어 과수원으로
바뀐 정맥을 타고 올랐다. 감나무 밭이 나왔다. 까치 밥으로 남긴 홍시가
간밤에 얼어 달콤했다. 여기의 특산물이 단감이니 모두 단감 밭이구나. 자
원재생공장을 지나 밤나무 밭길을 올라 평이하게 가니 낙원공동묘지가 나왔
다. 묘지를 돌아서 산을 넘어서니 덕암공동묘지가 또 나왔다. 산이 온통 묘
지로 다 망가졌다. 자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공동묘지가 자연을 완
전히 황폐시켰다. 내가 보기엔 개인묘지도 산을 차지한다지만 분산되어 있
고 산의 높은 곳에 자리하여 오래되면 묘지 위로 나무도 자라고 묻혀 사라
지니 오히려 빠른 자연의 회복은 적당히 분산된 묘지가 저렇게 한방에 산
전체를 망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잔뜩 찌푸린 날씨는 마침내 진눈깨비를 뿌린다. 희끗희끗 날리는 눈발을 맞
으며 을씨년스런 묘지의 殘影(잔영)을 완전히 뿌리칠 수 있는 산 속으로 접
어들었다. 소나무 숲이 야트막히 펼쳐진 조용하고 고요한 평지에 우리 일행
은 앉았다. 그날에 우리는 3인이었다. 정군과 가끔씩 동행하는 ㅁ모씨를 청
했던 것이다. 간단히 간식을 먹고 반듯하고 좌우가 잘 조성된 숲길을 걸었
다. 산은 낮아 전방이 보이질 않고 길은 묻혀 그냥 남으로 걸었다. 그러다
길이 사라지고 크고 넓은 굴참나무 숲으로 내려가는 길이 계속되었다. 나침
반으로 방향만 잡고 눈발 그친 숲 속에서 가시나무, 싸리나무, 진달래 엉킨
길 없는 하산을 계속했다. 건너 높아 보이는 산이 있어 우린 그 산을 잡으
러 내려갔다. 작은 개울에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고 갯버들은 벌써 눈망울을
크게 부풀리고 있었다.
아! 이 골짜기는 봄이 왔구나. 누가 무어라도 여긴 봄 냄새가 나고 있었다.
건너 산을 향해 쉼 없이 올랐다. 길이 없었다. 온통 마른나무가 엉키고 낙
엽이 쌓여 미끄러지고 산허리에 올라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은
좀 채 없는 경우였다. 나는 중간에 서서 그냥 주저앉았다. 뒤 따라 오던 ㅁ
씨도 서고 말았다. 앞서서 길을 찾아 헤치고 가던 정군도 힘이 부치어 쉬고
우린 그냥 어디로 가야하는지 정말 몰랐다. 지도 한 장 없고 가보지 않았던
산 속에서 머리 속으로 그려진 방향만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말았다. 오르
던 이 산 위만 가면 그래도 앞이 바라보이니 그리고 멀리 불모산이라도 나
오면 짐작을 할 터인데 이곳에선 그냥 작은 야산 속에 파묻히니 그리고 싸
리나무인지 키 작은 잡목 속에 앉으니 이제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먼저 올
라가 보겠다는 정군을 불러 저 아래 보이는 마을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숨
도 좀 돌리고 아직 오전이니 재정비를 해서 출발하자고 했다. 그래서 오던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그 산을 다시 내려와 개울을 타고 재를 넘어서 마을로 접어들었다. 푹 파묻
힌 아주 잘 생긴 곳에 자리한 마을이었다. 여길 오려면 어디서 올라오는지
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골짜기 마을이었다. 마을 아래 동구 밖에서 마을
로 들어갔다. 노부부가 사는 집으로 가 마을이름과 이곳의 위치를 물었다.
황새봉도 물었다. 그러나 그들도 이 마을 본토박이가 아니고 이곳으로 이주
한 사람들이었다. 겨우 겨우 장유, 진례, 진영, 김해의 방향을 물어 그들이
가라는 반대로 올라갔다. 그들이 사는 고모마을 뒷산이 황새봉이었으나 그
들은 산 이름을 몰랐다.
우리는 남진하다 좌로 산길을 잡았어야 했는데 우측에 불모산이 있으니 우
측으로 전진했으니 장유로 바로 갈 뻔했던 것이었다. 낙남정맥은 진례의 냉
정 인터체인지 삼거리로 가야 하니 오히려 덕산쪽으로 가야 맞는 것이다.
힘들게 황새봉으로 올라 끊여온 커피 한잔을 마시고 산불이 나서 고사목이
즐비한 억새밭 평지를 지나 내려갔다. 시계는 벌써 1시를 넘었고 다시 눈발
은 날리었다. 하늘은 찌부등하게 흐리고 우린 점심을 먹었다. 라면을 끊이
고 김치를 넣고 찬밥을 넣어 김치국밥을 만들었다. 그 뜨거움과 매움에 이
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배불리 한 그릇씩 비우고 소주한잔 마시고 오
후 길을 재촉하였다. 길을 찾으랴 2시간은 소비했을 것이다. 고속도로를 찾
아가는 길은 산길이 능선으로 잘 보여 노래도 부르고 신바람도 잡으며 정신
없이 내려가다 보니 고속도로는 왼쪽 어디로 사라지고 이곳으로 가면 진영
벌판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러다 점점 먼 곳으로 떠나니 더 가면 안 된다.
노래부르며 내려오던 길을 망설임 없이 돌아서서 올랐다. 남쪽의 능선으로
다시 내려가야 용지봉으로 갈 수가 있었다.
드디어 산허리를 절개하여 고속도로를 만든 계곡 위에서 도로와 차들을 내
려다보았다. 부산쪽으로 100여m가니 고속도로 아래로 통과하는 인도가 나왔
다. 건너서 들을 건너 1042번 지방도에 도착하니 눈은 펄펄펄 함박눈으로
내렸다. 바람은 불어 눈발이 드세어지고 가야할 용지봉과 대암산 산맥은 창
원을 막고 누워있었다. 시계는 어느새 3시를 지났다. 동행한 ㅁ씨는 여기서
창원으로 귀향하고자 했다. 정군과 나는 목표가 있었다. 오늘 이 능선으로
창원까지 입성해야 임무완수를 하는 것이다. 5시면 어두워질 것이니 용지봉
까지 가야 길을 알 수가 있는데 2시간만에 여기서 용지봉까지 올라야한다.
정경부대의 철조망 왼쪽을 따라 올랐다. 나무 계단을 밟고 오르는 길이 여
간 가파르지 않았다. 안부에 올라 과일 한쪽 먹고 리본을 잡고 오른다. 눈
은 비가 되어 왔다 갔다 했다. 몸도 옷도 다 젖었다. 오를수록 진영들과 장
유들 그리고 김해들이 보이고 우리가 걸어온 산들이 조망되어 왔다. 산능선
으로 방화로가 나고 리본은 잘려나가 없었다. 그러나 능선길은 빤하니 멀리
보이는 용지봉의 산능선을 헉헉거리며 올랐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부지런
히 걸어야했다. 정군이 뒤에서 신발이 발뒤꿈치를 상처를 냈다며 새 신 신
고 온 후회를 한다. 여간해서 불평하는 성격이 아닌데 거리도 멀고, 길도
헤매고, 날도 저물어 속도를 내야하니 짜증이 나나보다. 그러나 사정없이
내 특유의 마지막 스파트를 하면서 앞서서 끌었다. 해가 이미 없어졌고 이
곳은 초행이니 길도 모르고 또 어두워서 오르면 길이 얼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여간 낭패가 아니니 조금이라고 어둡기 전에 올라야하니 사정없이 치
고 올랐다.
그러길 한시간여 더 오르니 드디어 용지봉의 억새가 찬바람 눈보라 맞으며
하늘하늘 거리며 어두워져 산아래 창원시의 불빛이 아롱아롱거리는 창원의
진산 용지봉에 올랐다. 우리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예정대로 하오 5시
였다. 멀리 산해원(山海原) 종주 능선이 화폭처럼 펼쳐져 있었다. 봉림산,
대암산, 불모산, 장복산, 그리고 무학산, 천주산이 아스라이 보였다.
아! 나의 고장 창원, 우리의 목적지 창원, 그리고 우리는 그 밤에 산의 능
선만 희미하게 보이는 칠흑같이 어두운 가랑비 나리는 밤에 대암산 억새 밭
을 지나, 내린 눈이 얼음이 되어 미끄러운 대암산 A코스를 허우적허우적 거
리며 내려왔다. 온몸과 옷이 다 젖은 채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내려
왔다. 그래도 그 길은 많이 다닌 길이라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추위와 기
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왔다는 성취감밖에 무엇이 있을까?
그래도 그냥 헤어질 수는 없지.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싶었다. 식당에 들
러 양해를 구하고 젖고 흙으로 진 탕이 된 채 맥주에 소주잔 띄워 타이타닉
으로 돌려서 마셨다. 얼었던 몸이 서서히 풀리고 얼굴엔 화기가 오르니 살
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저 낙동강 물금나룻터에서 시작한 낙남정맥 줄기, 창원까지 거리가 얼마일
까? 한 50km쯤일까? 거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어떤 상황으로 어떻게 달성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렇다, 우리 인생도 결과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만 결과보다도 더욱 값진 것은 과정이다. 그 과정에 얼마나 열심히, 충실
히, 보람있게 살았는지가 더욱 값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비록 낙남정맥의 한 구간이지만 내가 사는 고장이고 나의 주변 산
하이니 내 발로 내 눈으로 살펴둔 것에 만족을 느꼈다.
2000. 02. 15. 이학근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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