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편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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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이곳 사천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봄바람인지 겨울 바람인지 애매하였습니다.
3월이니 봄바람이겠지요.
헌데 바람이 드세고 제법 눈바람같이 차갑습니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회사 동료들이 모두들 잠바 깃을 세우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습니다.
나도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바람을 등지고 걷습니다.
사람인 나도 추운데 벗고 사는 나무의 꽃잎들은 얼마나 추울까요.
개구리가 나온다는 경칩이니 멋모르고 뛰어나온 개구리도
추위서 사지를 벌벌 떨고 있겠지요.
산에 올라 산정에 서면 바람이 무섭게 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바람은 바닷바람이 더욱 매섭습니다.
높새바람, 샛바람, 하늬바람, 엄동설한 눈바람
이런 바람 중에 진짜 무서운 바람은 중년의 바람입니다.
이건 이판 새판입니다.
말길 어른도 없고, 위아래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막가는 바람입니다.
굳이 남자에 국한되어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여 남녀 공용입니다.
바람 이야기를 하다 옆길로 새었습니다.
기분 좋은 바람은 봄바람이지요.
감미롭고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워 마치 어린아이의 볼 같은 감촉이 바로 봄바람입니다.
어느 해 봄 철쭉이 피는 지리산에 산행을 하다 꽃 그늘에서 쉰 적이 있습니다.
바위사이에 핀 고목의 철쭉은 그늘자락을 바위에다 크게 펼쳐놓았습니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꽃잎을 스치며 지나갑니다.
산행에 지친 몸이 시원한 바람이 다 허물어집니다.
아, 산에 사는 나무들은 이 바람을 맞고 잎이 피고 꽃이 피는구나.
바람의 손길이 닿으면 묵은 껍질을 깨고 연한 새 잎이 돋아나는구나.
봄바람 속에 나는 마치 무릉도원 선경에 누운 신선이 된 느낌이었답니다.
봄은 바람이 몰고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제는 봄바람이 매서웠습니다.
미친 듯이 불었습니다. 마치 술 취한 주정뱅이 술 주정 같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너무도 고요합니다.
야산 앞자락에 옹기종기 엎드린 마을에 피어오르는 밥짓는 연기는
한줄기 오랏줄이 되어 곧게 하늘로 피어오릅니다.
아침 햇살이 따뜻합니다.
어제 미친 듯이 불어대던 바람은 어디로 다 가고 없어졌나요?
술에 취해 갈팡질팡 헤매다 이제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나봅니다.
우리 어르신 살아 계실 때 어르신 술 잡수시고 들어온 저녁이면
저녁 내내 집안이 시끌벅적하였습니다.
그 시끄러움 속에도 어린 나는 잠이 들고 아침에 깨어보면
집안이 너무도 조용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아침은 마치 그런 날 아침 같은 고요하고 맑고 조용한 날입니다.
난 그 시절의 어린이 같습니다.
이런 나날이 좋습니다.
사천의 봄날 아침이 한 폭의 그림같이 평화로운 날입니다.
살아가는 나날이 이렇듯 아늑하면 좋겠습니다.
2002. 03. 07.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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