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명정기

명정기

두칠이

4. 비 내리는 바닷가 (가버린 형을 그리며)



	4. 비 내리는 바닷가 (가버린 형을 그리며) 이 이야기가 내 명정기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이야 기는 술을 마시긴 했어도 얼마나 마셨다는 술에 대한 명정의 기억보다는 감상적이고 약간은 인생의 쓸쓸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와 분위기 그리고 형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유독 형처럼 지낸 억지 형이 한 사람이었다. 그 형은 10년 전에 병으로 죽었다. 마 흔도 채 못 넘기고 못 쓸 병이 걸려 야속하게 죽고 말았다. 그래서 나에게 이제는 억지형이 라도 없다.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우리 외가로 양자 온 나이 두 살 위인 외사촌형이다. 형 과 나는 소학교 입학 전까지 외가에서 같이 자랐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고 나서는 방학이 되면 만나서 촌놈들과 노는 법을 가르쳐주고 또 도시 사는 동생이라고 보호도 해주고 잘 지 냈다. 물론 형이라고 깍듯이 대접도 했다. 그 형이 고등학교를 다니고 나는 중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여름방학중 어느 날 형을 따라 형 친구인 ㅂ형이 사는 반동이라는 바닷가 어촌 마을에 갔다. ㅂ형은 형과 시골 중학교 동 창이었으나 외가에서 산을 넘고 바다를 따라 한참을 가야하는 아주 외딴 바닷가 마을이라, 버스길은 험하고 어려워 배를 타야 도회지로 타지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여름 장마비가 몇 일을 계속해서 반동 바닷가에 내리고 있었다. 창원군 구산면 반동만의 푸 르고 잔잔한 바다에는 양식어장을 만들어 논 하얀 유리 부레가 여기저기 둥둥 떠 있었고, 점점이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은 비 내리는 저녁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였다. 형들과 나는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나 인적 드문 해안을 따라 십리나 걸어서 외딴집이 있는 바닷가 오두막에 비를 피해 들어갔다. 오후 내내 비를 맞고 해안을 헤매다 겨우 도착한 곳이었다. 장마 비라 오전에는 비가 그쳤든지? 오후부터 비가 왔든지? 빈 몸에 장대비를 흠뻑 맞았었 다. 돌아오는 길이 멀기도 하고 비는 금새 그치질 않아 ㅂ형이 아는 집이었고 그 외딴집에는 젊 은 아낙이 혼자 살고 있었다. 바닷가 외딴집 젊은 아낙 혼자 사는 집. 내가 생각해도 묘한 곳이었다. 그녀는 형들을 보고 무척 반가워했고, 곧이어 소주병과 금시 잡은 생선을 촌스럽 게 엉성엉성 칼질을 한 생선회가 올라왔다. 주린 배에 비를 맞고 걸었으니 춥기도 하거니와 배도 고팠다. 우린 그 싱싱한 회를 안주로 소주를 막 마셨다. 그 시절에 활어 양식은 없었 다. 주로 조개류만 양식을 했었다. 생선의 이름은 모른다. 그냥 잡어라고 하자. 그래서 지 금도 어디 횟집가면 그냥 잡어회 한 접시 달라고 주문하곤 한다. 어석어석 뼈가 약간 씹히 는 자연산 시방 잡은 잡어회의 맛을 어찌 잊을쏜가? 처마 밑이 바로 바닷가로 이어지는 약간 절벽의 산아래 비탈진 곳에, 바닷물이 나면 마당처 럼 마루아래에 갯벌이 약간 나오지만 물이 들면 집 아래 축대까지 물이 올라오는 그런 집이 었다. 따스하게 온돌에 불을 올린 방의 문을 여니 눈 아래 반동만의 잔잔한 수면으로 여름비가 빗 살을 그으며 하염없이 나리고, 젖은 옷을 벗고 흩은 머리를 말리며 따스한 방의 훈기를 허 벅지로 느끼며 알지도 못하는 소주 술맛을 익히느라고 나는 따라 마셨다. 수면에 바로 떨어지는 장마 비를 아무 상념 없이 바라본 적이 있다면 그대의 진정 인생의 의미를 모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시절 그 나이에 무슨 티가 먼지가 있었겠느냐? 순결하고, 순수하고, 순진하고, 해맑음 그대로 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고 그 형들도 그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형 들이 나처럼 그러하였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 주막의 외딴집 젊은 아낙을 생각해보 니........ 지금 생각하니 그 형들은 신분이 고등학생이었지 나이도, 모습도, 마음도, 행동도, 이미 어 른이었다. 비를 맞고 물이 든 바닷가의 바윗길로, 갯벌 길로, 또 물길로 옷이며 신이며 몸 다 젖어버 린 어스름 해 기운 길 없는 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돌아온 그 길이 그 바다가 지워지지 않는 영상으로 각인 되어 있고, 양철지붕을 울린 두 칸짜리 방에서 따뜻한 웃음으로 우리들에게 술과 회를 준 그 아낙이 눈에 선히 떠오른다. 그 곳이 어디일 것이라고는 아나, 어디인지는 모른다. 내가 그 곳이 산이라면 꼭 다시 찾아가 볼 것이지만 바다이고, 아무도 지금은 알려 줄 이가 없으니 그리고 기억해 낼 수도 없는 곳이니, 그냥 사람은 가고 장소의 기억도 없으 니 그냥 꿈속에서 가본 곳으로 또 꿈속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해 버리련다. 형아! 형아! 가버린 형아! 꿈속에서 본 사람들이라고 아무리 생각하려도 형만은 내 어린 추억과 같이 살아있는데 어찌 꿈속에서 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나? 형아! 형아! 그리운 형아! 산에 가서 나무하고 물에 가서 고기 잡던 밤이면 사랑방에서 화투놀이 술래 잡던 형아! 세월이 흘러 어언 십 년이 흘러갔구나. 형의 두 아이들만 저만치 자라 그 때의 형만큼 자랐으니, 모습이야 형 본 듯도 하다 만은 형은 정녕 아니니 형아! 형아! 나의 형아! 우리 언제 다시 만나 그 곳으로 가보려나? 소주 맛을 알려준 가버린 형을 그리며..................... 2000. 02.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