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명정기

명정기

두칠이

28. 산골 아줌마랑 노랫가락에



	28. 산골 아줌마랑 노랫가락에 지리산 거림골 산골집 노부부를 안 지는 한 15년이나 되었지 싶다. 그때의 거림골은 지금의 거림골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15년 전의 거림골을 그리며 상 상으로 정경을 옮겨보겠다.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서 중산리로 15분 더가면, 좌로 다리를 건너는 곡점이라는 마을이 나 온다. 오래된 초등학교도 있고 큰 개울 둘이 만나니 이제부터 개울은 강이 된다고 할까? 아 직은 덕천강이라고 부르기가 좀 어색하나 중산리 계곡물과 거림골 계곡물이 여기서 만난다. 지금 지리산 양수발전소의 아래 댐이 건설되는 곳이다. 그 거림골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천이 흐르고 우로 산길이 꼬불꼬불 비포장으로 있었다. 한 마디로 도로가 아니고 그냥 산행길 오르는 산골 마을길이었다. 금방이라도 하천으로 떨어질 것 같은 언덕이며 흙이 무너져 내린 황토언덕으로 자갈돌이 길을 메웠고, 길 위로 자라 내 려선 나무 가지는 어깨를 덮었다. 길바닥은 오래되고 너무 커서 없애지 못한 미끈한 바위가 맨들맨들 길바닥에 치솟아 있었고 모롱이 돌아가면 하나 둘씩 마을이 길 건너, 길 아래로 나왔다. 그런 도로로 하루에 두어 번 정기버스가 진주서 내대까지 다녔고, 내대에는 오래된 분교가 나오고 그곳에서 또 걸어서 층계 논 사이로 한 30분을 오른다. 논에는 집채만한 바 위가 여기저기 앉아있고 손바닥만한 논으로 개울물이 돌담에서 흘러 길을 적시었다. 오르는 길은 흙이 없는 돌길이고 가끔씩 나오는 묶는 논에는 여름이면 수박과 참외로 밭을 가꾸어 서 지나는 산악인들에게 요기하라고 그저 주던 곳이다. 어쩌다 길가에서 행상을 만나면 산 에서 딴 산 호도며 산 머루 그리고 산 복숭아를 팔던 아주머니가 앉아있었던 곳이다. 길의 끝에 제법 큰 마을 마당이 나오고 좌우로 산골 민가 십여 호가 모여 사는 두메산골이 거림 마을이었다. 지리산 세석고원으로 오르는 가장 가까운 길이라 철쭉이 피는 6월이면 이곳은 산군으로 북 적거리나 한달 정도이고 철이 지나면 일년 내내 외지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심심산골이 이었다. 어느 가는 봄 세석의 철쭉을 보러 그곳을 갔다가 내려오면서 그 아주머니가 파는 막걸리 파 전에 인연을 맺었다. 그런 후 그곳을 지날 때면 인사도하고 쉬었다가 가고 한 것이 세월이 흘러 십 수년이 지났나보다. 지금의 나 나이보다 젊었을 그들 부부는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진주로 가고 그냥 학비 마련으로 토종벌을 키우며 철 오면 등산객에게 막걸리 담아 부침전 과 나물로 안주 파는 길거리 노점상이었다. 과년한 딸이 있어 좋은 도회지 총각 나오면 중 신 좀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던 아주머니였고, 어느 날은 우리 일행이 내려와 막걸리 독 채 내와 비워 주었더니 노래 가락 장단 맞추어 주시던 아주머니였다. 술을 못하는 두 부부 는 그래도 우리 산군 술꾼들 비위도 잘 맞추고 마음씨 곱고 인정이 많아 좋은 후배 총각이 었으면 중신이라도 해 주고는 싶었으나, 자고로 중신은 잘하면 술이 석잔, 못하면 뺨이 세 대라고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세월이 흘러 지금의 거림골에 예전 같은 곳은 하나도 없다. 한마디로 양수발전소가 들어서니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마을 끝까지 되었고 그 계곡 곳곳에 산장이고 민박집이고 외 지인이 들어와서 이제는 그 옛날의 빨치산의 남부군이 밥 얻어먹으러 내려온 역사의 현장이 고 돌부리 차며 걷던 산골 마을도 아니었다. 산정 세석까지 가는 산길도 길 넓히고 다리 놓 고 이정표 붙여 사방팔방 사람 냄새로 모두가 그 옛날 일, 아, 옛날이여! 마을이야 변했지만 인정과 사람은 그대로이니 그날 그 곳에서 하룻밤 묶게 된 것은 나의 의 지가 아니라 순전히 운명의 계시였다. 작년 말이었다. 나이 들어 이제서야 산행 맛을 겨운 익힌 후배랑 세석에서 남부능선을 타고 섬진강까지 횡주를 계획하고 토요일 오후에 거림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에 세석산장에서 자 고 다음날 일찍이 남부능선으로 내려가야 오후 늦게 섬진강 아랫마을인 악양면 평사리 섬진 강변 도로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초겨울 입산금지 기간에 그만 입산이 불가했다. 하는 수없이 거림골 민박집에서 자 고 다음날 새벽 2시에 일어나 매표소를 피하여 세석고원까지 올랐다가 다시 남부능선 타고 내려 갈 계획으로 저녁을 보내게 되었다. 산골 노부부 집에는 때 마침 몇 일전에 결혼시킨 큰아들이 어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오늘 에야 가족들 모두 도회지로 보내고 이 산골에는 노부부만 빈집을 허전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가 들어가니 반가워서 자꾸만 쉬어 가란다. 그러잖아도 쉬어가야 하는데 신발 벗고 안방으로 들어서니 잔칫집 후렴음식이 한 상 가득 나왔고 술을 못하시던 아저씨가 술 잔을 돌렸다. 이제는 끊었던 술을 자신다고 하시며 주인장이 내어놓은 소주 한 병, 내가 내 어놓은 소주 한 병 한자리서 마셨다. 홍어회며 돼지 수육에 잔치 떡이 나오니 시장한 우리 는 잘도 먹고 마셨다.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가 되어서 우리는 황혼이 짙어 가는 초겨울 거림골의 저녁 정취를 즐 기러 계곡 길로 어시렁거렸다. 산아래 묵밭에 산장이 서고 산장마당에 모닥불 연기가 가느다랗게 지펴 오르는 바람 없는 골짜기에서 나무 타는 향기를 맡으러 모닥불가로 갔다. 잘 마른 소나무의 송진 냄새가 불 옆에서 피어나는 산장 마루에는 어디서 이사를 왔는지도 모르는 이방인이 산중 주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 먼저 와서 살며 그가 나보다 주인이지, 내가 먼저 지나갔다고 주인이라 할 수 없지 않는가? 새벽길 갈 지형을 살펴두고 내려와서 저녁을 지어먹었다. 그리고는 대청마루에 크게 앉았더 니 부엌일 끝난 아주머니가 노래방 기계 자랑을 했다. 그리고는 노래 책과 앰프 전원을 연 결해 주면서 한 곡조 불러보라고 권하지 않나? 돈주고 찾아가서라도 이런 날 밤이면 한 잔 하고 한 곡조 뽑아야하는데, 놀아달라고 자리 펴 주는데 마다할 수 없지 않는가? 그런데 막 상 노래를 부르려니 빈방에서 맨 정신으로 노래를 부르려니 무언가 빠진 것 같아 어색하였 다. 전주(前酒)가 있긴 하나 무슨 노래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노래자랑 나온 것도 아닌데, "막걸리 한 주전자 하실라오?" 아주머니가 분위기를 잡는다. "시원한 걸로 합시다" 재빠른 솜씨에 막걸리가 뚝배기에 조랑박 띄워서 안주와 한 상 차려 올라왔다. 그렇지, 이 렇게 쭉 한잔 들이키고 노래 한번 불러보자. 노래부르고 놀아달라고 주인이 나서는데 객이 눈치 볼 일 어디 있더냐? 노래 책 펴놓고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상다리 잡고 젓가락 뚜드리며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 는데, 그 아주머니의 노래 실력이 과히 수준 급이고 r거기다 내 후배의 노래 실력도 상급이 니 노래라고 제목 달면 모르는 가사가 없고 이제는 아주머니 십 팔 번을 따로 쫙 적어둔 공 책 꺼내니 노래 제목과 번호 찾을 것도 없이 나왔다. 그나저나 내 좋아하는 남인수 노래가 총망라되어 나오니 아주머니도 신이 났고 나도 흥이 났다. 落花流水(낙화유수), 무너진 사 랑탑, 꼬집힌 풋사랑,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청춘고백, 등등 그 곡명을 어찌 다 적으리요. 소리가락에 정이 겨운 아주머니는 자기는 한잔도 못하는 막걸 리를 동이 나기가 무섭게 퍼오고 자꾸만 마시라고 권했다. 산중에 노래 소리는 계곡물소리 에 묻히는 것인지 아니면 이웃이 다 이해를 하는 것인지 내가 알 바 아니다. 장단과 가사에 모든 곡들을 마스터하니 시간은 어느새 자정이 지나 버렸다. 어찌되었는지 나는 내일 산행이랑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마치 노래부르고 놀러 온 사람처럼 놀기에 빠졌고, 같이 온 후배는 나의 이런 행동이 이상했는지 자자고 재촉을 하였다. 아주 머니는 뚝배기 한가득 막걸리 채워놓고 사라졌다. 그냥 이대로 취해서 밤을 세우고 싶었다. 잠에 취한 후배를 먼저 방으로 보내고 혼자 책상다리하고 남은 막걸리 마시며 하염없이 명 상에 잠겼다. 아니지 무념무상에 취하여 오락가락 나 홀로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4시였다. 아차 이럴 어쩌나? 어쩌긴 무얼 어째? 어제 밤 잘먹고 잘 놀았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지? 아무 후회 없었다. 술 깨지 않은 머리를 들고 별만이 총총한 밤에 길을 나섰다. 산행로 입 구는 폐쇄되었고 우회하여 산을 타니 염소우리가 나왔다. 불을 비추니 그 순한 염소들이 천 진한 눈으로 그 순한 얼굴로 멍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 놈도 울지 않고 놀란 표정도 아니고 그냥 맑은 눈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참 순한 동물이 염소이구나. 어찌 뛰는 놈도, 놀라는 놈도, 우는 놈도, 움직이는 놈도 없이 저렇게 가만히 있을까? 조용히 염소우 리를 나와 길로 접어들었다. 산중에 여러 짐승이 산다만 염소 같이 순하고 착한 짐승이 있을까? 이 산중 사람들 저 염소 를 닮았을까? 염소가 산중 사람을 닮았을까? 나도 이렇게 산에 오래 다니면 저 염소처럼, 산중 사람처럼 될까? 세석고원 오를 때까지 우린 취해서 갔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남부능선을 다 횡주하지 못하고 삼신봉거쳐 쌍계사 불일폭포로 내려오 니 오후 4시가 넘었다. 섬진강까지 횡주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 다시 가면 되지만, 그날처럼 기분 좋고, 술맛 나는, 즐겁게 노래부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이게 운명이고 하늘이 주신 복이라 생각한 다. 아무쪼록 누구에게나 놀기 좋은 기회가 오면 그 때를 즐기며 살아서 좋은 추억이 되길 바랄 뿐이다. 2000. 0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