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명정기

명정기

두칠이

27. 중산리 유주용씨



	27. 중산리 유주용씨 때는 봄이 스멀스멀 끝나가고 산중 초여름의 더위가 밀려오는 철이었으리라. 지리산의 철쭉은 6월이 되어야 피니 산에는 철쭉들이 희끗희끗 피어나는 산 꽃이 피는 좋은 계절이었으리라. 이른 산중 저녁이 한참 지난 시간에 중산리 주차장에 막버스로 도착하여 생면부지의 유주용씨를 전화로 불러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기다리니 짚차 한 대가 도로 따라 내려오더니 라이트를 끄고 내 앞에 멈추어 섰다. 그가 지리산 중산리 순두류지기인 유 주용씨였다. 까만 밤에 별빛만이 초롱초롱한 산 계곡 마을에서 선 채로 수인사를 나누고 나 는 그를 따라 순두류마을로 갔다. 그는 얼굴이 매끈하고 피부가 하얀 30대 청년이었다. 그 러니 그 시절 내 나이보다 대여섯은 어린 나이였다. 중산리 매표소 못 가서 주차장 우측의 언덕을 넘으면 순두류 이주민이 사는 일자형 판잣집 서너 채가 나온다. 그 집중 하나가 그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방에 드니 아내와 꼬마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촌부 차림에 그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으나 집안 살림에 생 계까지 꾸리는 억척여자였다. 유주용씨는 그냥 먹고 노는 산중거사였다. 젊어서 배운 게 없 어 도회지로 떠돌다 주먹세계에서 밥 먹다 나이 들어 겨우 손 씻고 세상과 등지고 산다고 고향으로 다시 들어와 그냥 철 따라 지리산 산 속으로 들어가면 몇 달씩 지내다 집으로 내 려와서 세월 보내는 건달이었다. 산골 허름한 토방에 들어서자 부인이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그녀와 나도 생면 부지의 사이이나 내가 여길 알고 찾아온 연유가 더욱 궁금하고 소개를 받았다는 그의 의동 생 정환이를 안다는 게 더욱 반가웠던 것이다. 막걸리에 주 한 상이 들어와 그와 나는 오래 된 사이처럼 손 두부와 푸른 김치에 이가 시리도록 마셨다. 그러던 중에 자동차 소리가 들 리더니 부산서 왔다는 젊은 내외가 그들을 찾아왔다. 우리는 그들이 준비해온 고기 안주와 술마저 마시고는 마침내 술이 동이 났었다. 나는 도대체 취하지 않는 술을 마시는 것 같았 고 유주용씨도 그런 나를 대하고 앉았으니 잘 마시던 술 실력이 나왔나보다. 아내를 부르더니 술 심부름을 보내는 것이었다. 도시도 아니고 산골의 외딴 마을인데 술 사 러 갈려면 고개 넘고 언덕 넘어 차를 타던지 동행이 있어야 할 터인데 시키는 그나, 딴소리 없이 떠나는 그녀나,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 나나, 셋 다 한 무리에 한 족속 같았다. 그녀가 막걸리를 받아왔다. 우리 일반인 상식으로 심야에 손으로 들고 올 수 있는 양이 얼마나 되 겠나? 그녀는 한말을 통에 담아 들고 왔었다. 참 간 큰 남자에 통 큰 여자였다. 그리고는 안주 챙겨 상에 올려주고 먼저 잔다며 건너갔다. 그와 나는 그 말술을 옆에 두고 얼마나 마셨는지 확실한 기억은 없으나 마치 뱃속에 물길이 술 길이 뚫린 것처럼 부어넣어도 넣어도 들어가 주었다. 젊은 시절 도회지서 구두 닦으며 뒷골목 사나이들의 애환이며 그들이 어찌하여 그 세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 등, 그 리고 산 속에서 처사생활이며 취미로 모았던 괴목과 수석과 지리산 유물들 온갖 그의 일대 기 이야기로 밤 깊어 가는 줄 모르고 놀다 그 자리에서 둘 다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산중 해가 산 위로 올라왔으니 늦도록 잠을 잤었나보다. 해장국에 아침을 먹고서 나서려니 그는 집을 짓고 있었다. 통나무로 절간처럼 큰집을 동녘으로 중산리 계곡을 바라 보며 큰 집 한 채가 지붕까지 올라간 집을 짓고 있었다. 그가 직접 수개월에 걸쳐 혼자 짓 는다는 것이었다. 저 큰집을 혼자서 설계하여 친구들 불러 일군으로 쓰며 모아두었던 괴목, 수석, 유물, 전시할 박물관을 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건너편 지붕 위에서 손 흔들고 있는 그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졌던 배낭을 내리고 그에게로 갔다. 못 통을 들고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랐다. 술 먹은 다리가 후들후들했 다. 그가 시키는 데로 땀 흘리며 한나절 도와주고 그녀가 지어준 새로 담근 김치에 솥에 불 지펴 한 밥으로 점심 맛있게 먹고 나는 천왕봉 산행을 떠났다. 그 길로 세석까지 가서 세석 고원의 철쭉을 보고, 봄마다 피는 철쭉을 봄마다 보고, 거림골로 하산하는 길이었다. 그 뒤로 그 집에 다시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엔 유주용씨는 없었고 집만 크다랗게 있 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이 놀고 있었다. 기별 없이 찾아갔기에 막걸리 몇 병 사들고 갔었는데 그는 없었다. 그녀의 청에 못 이겨 내가 사온 내 술로 혼자서 몇 잔 마시 다 나왔다. 그녀의 말인즉 그는 또 그 방랑벽으로 집 나간지 수개월이 되었다나? 그녀는 이 제 그 일이 습관처럼 되었는지 언제 올 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는 빈말을 했다. 달이 뜨면 얼마나 좋을꼬? 중산리 계곡이 달이 오르면 아마도 이 유주용씨 집에 제일 먼저 달이 떠오르리라. 동녘으로 앉은 아래가 훤히 트인 그 곳에 달이 가장 크고 밝으리라. 그러나 그와는 그때 만나 후로 다시 만난 적이 없으나 내가 그를 기억하듯이 그도 나를 언 제나 기억할 것이지 싶다. 그 술 잘 마시고 이야기 즐겨하던 이 선배를.... 그는 나를 선배라고 그날 밤 불러 주었으니..... 언제가 만나겠지, 그리고 그날처럼 "이 선배님 술 한번 잘 마십니다." 하던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2000. 0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