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수필

두칠이



조동수필(校洞隨筆) / 청상의 우물 4
   
   
 
4.


조동마을은 경주 이씨 집성촌이었다.
면장 집도 친척이어서 넓고 좋은 면장 집으로 외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갔고 할머니들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면 업혀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면장 집에는 솟을대문은 아니었지만 대문도 기와집으로 덮은 나무 대문이었고 행랑채와 안채 그리고 사랑채 곳간채도 있어 양반집 가옥으로 잘 지은 집이었다.
사랑채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담과 사랑채 사이에 뜰이 있었다. 키가 담을 넘는 나무들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자랐으며 축담 위 흙으로 빚고 짚으로 지붕을 씌운 토종벌집에는 벌들이 왱왱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벌에 혹시라도 쏘일까 겁을 무척 낸 일이 기억이 나나 그 사랑채에 어떤 이유로 들어갔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할머니를 따라서 갔을 리는 절대로 없고 외할아버지를 따라서 면장어른을 면전에서 배알하고 사랑채 구경도 했었지 싶은데 고지식하기가 여간이 아니신 외할아버지께서 날 인사를 시킨다고 데리고 갔을 리는 만무하고 사랑 출입을 하거나 종사 일에 우연히 동행하였지 않나 생각된다.
안채에서는 저녁이면 할머니들이 모여서 이야기로 소일을 하시면 부엌일 하는 어멈은 밤참으로 계절 음식을 넣어주었다. 아마도 난 그런 음식 먹을 욕심으로 외할머니를 따라 다녔고 외할머니도 손자에게 좋은 음식 맛을 보일 심정으로 날 데리고 다녔지 않았나 생각한다.

음담마을과 양담마을을 나누는 공동우물옆 재를 넘어가는 길은 면장 집 왕대가 무성한 대밭이었다. 내가 대나무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 시절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니 대나무와 얽힌 이야기들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기회가 오면 하기로 하고 오늘은 면장 집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면장 집에는 좋은 상수도가 있었다. 마당에서 대밭 쪽에 있었는데 이 물은 마을 공동우물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었다. 공동우물 속을 들여다보면 물의 높이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물이 샘솟는 곳은 우물 중앙에 오목하게 파진 곳으로 깨끗한 자갈을 넣어 두었고, 샘의 위치가 이미 사람 한길 아래에 있으니 물이 차서 올라오면 우물 턱까지 올라올 수도 있는 일이다. 우물가에 앉아 바가지를 집어넣으면 닿은 위치에 땅 바닥 밑으로 작은 구멍을 내어 수로를 만들고 그 물이 수로를 따라 흘러서 면장 집 상수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 때는 그냥 면장 집이라 좋은 식수가 대나무 대롱을 타고 사철 철철 넘쳐흐르는 모양이다 하며 생각을 했었다.

면장인 분이 언제 면장을 했고 면장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도 그 때는 몰랐었다. 내가 말과 글을 따로 배워서 같은 말과 글을 맞출 줄을 아직도 모른다고 하면 설마 하겠지마는 사실이 그러하다. 내가 쓰는 사투리는 그냥 사투리 말로 사용하고 내가 아는 표준말은 그냥 또 다른 뜻의 표준말인줄 알았다.
내 어머니 택구가 조동 댁이라고 하니 어느 분이 택구의 표준말은 택호라고 했다. 나는 택호의 뜻은 알았다 허나 택구의 뜻은 몰랐다. 그냥 어른들이 내 어머니 택구는 조동 댁이라고 하여서 무슨 댁하며 부르는 것을 택구라고 하는가 했었다. 택호라는 것은 배운 기억이 날 뿐이지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으니 글을 쓸 때 택호라는 단어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면장 집도 일반명사로써 면장 집이 아니라 고유명사로써 면장 집이었다.
그 분이 면장을 지낸 시절은 해방 후에 잠깐이었고 내가 그곳에 살 때는 다만 갓 쓰고 한복을 곱게 입고 출입이 거의 없으신 분이셨다.

외할머니는 노래를 잘 하셨다.
노래로 나를 잠재우고, 당신의 시름을 달래고, 주위 사람들의 흥을 돋우셨다.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멍멍 개도 짖지 말고 꼬꼬 닭도 울지 말라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이런 자장가를 가냘프고 고요하게 천천히 불러주면 잠이 저절로 왔고,
석탄 백탄 타는 데는 연기도 폭폭 나지만
이네 가슴 타는 데는 연기도 내도 안 나네.
하시며 외할머니께서 구구절절이 청승스럽게 노래를 부르시면 한이 가슴에서 저절로 솟아올랐다.
외할머니의 입은 쉴 사이가 없었다. 이야기를 하거나 노래를 하거나 하다못해 밥을 드시는 시간도 갖은 심려와 잔소리로 하루 종일 틀어두는 스피커 같았다.
할머니의 노랫소리를 나도 따라 불러 가사를 익혔는데 어느 날 외할아버지께서 면장 옆집 방앗간 재윤이네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 집에는 손자가 둘 있었는데 그들 형제는 나와는 나이가 한둘 위와 아래였다. 방앗간 할아버지는 두 손자에게 창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나도 배워보라고 해서 몇 번 가서 배운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부르는 '청산리 벽계수야'를 배워서 창은 어떻게 소리 내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일도 혼자 가서 배울 수는 없고 배우는 시간이 정한 것이 아니라 몇 번으로 끝나고 말았다.

외숙모는 왜정시대 학교를 다닌 적이 있어 일본글과 한글은 읽고 쓰기를 잘 하셨다. 내가 한글을 깨우치도록 글공부를 시켰고 나는 칭찬에는 신이 나는 아이라 한글 자음과 모음을 다섯 살 이전에 외우고 써 한글을 익혔다. 지금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모두들 한글을 익혀 입학을 한다는데 그 때 시골의 학생들은 학교를 다녀도 국어 책을 못 읽는 아이도 있었다.
내가 외숙모 등에 업혀가 동네 아이 6학년 국어 책을 읽었더니 외숙모와 같이 모인 아낙들은 모두들 천재니 신동이니 하며 놀랐다고 하나 책이란 게 한글만 다 깨우치면 뜻은 몰라도 읽기는 어디 6학년 책만 읽었겠느냐 대학생 책도 읽을 수 있는 일인데 시골 사람들은 6학년 책의 한글과 1학년 책의 한글이 다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어찌되었거나 나는 대단한 자부심을 그 때 갖게 되었고 그 자부심은 내가 성인이 되고 삶에 대하여 정말 좌절을 맛보는 사회생활을 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었다.
정말이지 나는 성장하면서 나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내 부모가 그러했고, 내 일가친척이 그러했고, 내 학교 선생님, 형제, 친구, 세상의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다 내 편이었고 내 말은 다 들어주어야 했으면 심지어 이 세상 여자도 모두 내 여자로 생각하는 정말로 웃기는 철부지가 나란 사람이었다.
나는 언제나 말 잘 듣는 아이, 언제나 바른 일만 하는 아이, 언제나 착한 아이, 언제나 칭찬만 듣는 아이로 길들여지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었고, 나는 어른들이 좋아하지 않을 일은 예시당초하지 않으니 어른들 눈에는 정말 조속한 아이였을 것이다.

내가 좀 더 자랐을 때 외숙모께서는 마을의 가까운 친척으로부터 양자(養子)를 들이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두 살이 위였고 그는 확고부동한 나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으로 나타났었다. 그런데 그 양자 아이와 나의 관계에서 나는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내가 더욱 사랑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절대로 맞대응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초등학생이 되어서 외가로 양자를 왔었는데 그의 본집이 근처라 밥만 외가로 와서 먹지 잠자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노는 것도 외가에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도회지에서 갖고 온 과자나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양자 아이를 불러서 먹이곤 했다.
헌데 먹을 음식이 하나뿐인 경우가 생기면 같이 있는 나에게 주어버리면 그만이니 나는 먼저 먹을 수가 있었다. 귀한 간식이 하나 뿐이고 어른들이 꼭 양자 장희형에게 줄려고 한다면 외숙모나 이모들은 나에게 사전에 허락을 받았다.
"이것 장희형 주자! 형한테는 너는 먹었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그렇게 하라고 고개를 끄떡이며 먹고 싶은 것도 스스로 대견해 하며 참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형은 참으로 사려가 깊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었다.
먹기 전에 나에게 물었다.
"너 먹었니? 너 먹을래?"
그는 형 노릇을 하는 거였다.
"먼저 먹었어."
나는 어른들이 시킨 대로 먹지 않았어도 먹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어른들로부터 대견하다는 칭찬을 듣곤 했다.
아침이면 나는 동란 전에 사랑채가 있었던 밭 자리를 지나서 비탈진 흙을 타고 비탈의 윗집인 형 집으로 형을 데리러 갔었다. 형은 잠이 많아 겨우 일어나서 따라 내려오기도 했지만 내가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내려오면 어른들이 형과 같이 오지 않았다고 꾸중을 듣기에 나는 집에 앉아서 큰 소리로 형을 불렀다. 그러면 적어도 저 위에서 나는 형의 대답소리를 들으면 내 임무는 끝이 나기 때문에 직접 가는 일보다는 편한 일이었고, 밭을 지나 흙 비탈사이의 나무 가지를 비집고 올라가는 편보다는 쉽고 편하였다.
형이 이렇게 양자 온 나의 외가에서 자지 않고 본가에서 자는 것은 본가에는 형의 형제들이 많아 놀기 좋았지만 양자라고 온 집에는 잘 방도 없었고 여자들이 여럿 살고 있으니 불편하여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친어머니가 곁에 없는 것도 아니니 양어머니에게서 사랑을 구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어른들의 사정으로 양자라는 형식을 정해서 보냈다고 하나 본인으로써는 그 무얼 주고받고 가고 오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마산의 초등학교로 입학을 하게 되어서 외가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뒤에도 형은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외가에서는 잠을 자지 않았었다. 밥을 먹고 학비를 얻고 나무 짐을 지거나 소꼴을 베거나 들일을 하는 것은 외가의 일을 했었다. 형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시골 논마지기에 팔려온 자신이 불만스러웠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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