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조동리(校洞里) 혹은 아름답게 살아난 신화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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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조동리(校洞里) 혹은 아름답게 살아난 신화의 마을
이 진 흥 (시인)
<1>
재작년에 간행된 두칠 이학근 선생의 자전적 이야기 [두칠이의 졸병수첩]과 [나의 명정기]에 이어서 이번에 나온 [조동수필]을 읽으면서 나는 괴테의 [시와 진실]과 박경리 혹은 최명희의 소설들을 떠올렸다. 그들과는 다르게 그가 표제에 [수필]이라고 붙인 것처럼 붓가는 대로 자유롭고 활달하게 써 내려간 이야기 속에는 우리들의 시대와 사회 그리고 그 속에 등장하는 소박한 사람들의 삶이 진솔하게 살아나고 있다.
이 글을 통해서 나는 작자가 그야말로 타고난 이야기꾼임을 다시 확인했다. 그가 지금까지 써서 인터넷에 올려놓은 이야기들, 예컨대 <낙남산맥 종주기>를 비롯한 수많은 산행기들 그리고 옛 자취를 살피는 <선인들의 길을 따라>의 연작과 <부석사>, <대마도>, <사이판>에 대한 기행문들과 <사천편지> 등은 어느 하나 재미없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 글들이 정리되어 앞으로 여러 권의 책으로 묶여질 것으로 보인다.
바쁜 직장생활을 하는 중에도 그가 그토록 많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풀기 힘든 수수께끼 중의 하나이다. 추측건대 그것은 아마도 <조동마을의 라디오>인 그의 외조모로부터 물려받은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기질과 사물을 보는 섬세한 감성 그리고 비상한 기억력 등에 기인하는 듯하다.
나는 경남 마산시(옛 창원군) 진동면 교동리라는 마을엘 가 본 적이 없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그곳이 매우 아름답고 인간미가 넘치는 마을로 축조되어 있다. 나는 언젠가 그 마을을 찾아가 보고, 조동의 인물들을 하나씩 되새겨 보고 싶다. 나는 이미 경상남도 지도를 펴놓고 마산에서 2번국도를 타고 내려가 진동 진북 진전면을 살폈으며, 시루봉과 수리봉의 예쁜 산이름과 태봉천과 진동천 그리로 광암해수욕장을 익혀두었고, 진주로 가는 2번국도에서 고성으로 가는 14번 국도가 갈라지는 진전천도 봐 두었다.
20년 전 쯤 나는 서정주 시인의 [질마재 신화]를 읽고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질마재)에 찾아갔던 일이 있었다. 소요산의 치마자락이 흘러내린 끝자락 쯤, 서해바다의 한 가닥이 밀려들어와 만을 이루고 있는 곳에 정답게 앉아있던 그 마을에서 나는 당시 80세이던 김방원 할아버지를 만나, 서정주 시인의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과 지명들이 모두 실재하는 것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등장하는 <눈들영감>이나 <한물댁> <단골 무당> <알묏집 개피떡> <앉은뱅이 박재곤> 등이 서정주라는 시인을 통해서 아름다운 신화가 되고, 그 신화 속에서 질마재 마을은 마치 올림포스 산처럼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다시 말해서 저 괴테의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의 <누가 올림포스를 지켜서 신들을 살게 하는가?/ 그것은 시인 속에 계시되는 인간의 힘이어라.>라는 구절처럼 이제 조동마을은 두칠 선생의 붓끝을 통해서 하나의 신화의 마을로 독자들의 가슴속에 새롭게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두칠 선생이 아니라면 전쟁이 훑고 지나간 조동 마을에 대가 끊긴 어느 경주 이씨 가문의 한 청상과부의 한 맺힌 삶을 누가 다시 불러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낙도할머니의 보쌈이야기나 전설적인 몬지아재의 인물을 누가 살려낼 수 있었겠는가? 단언하건대 두칠 선생이 아니었다면 <마루 가운데 굽은 소나무 기둥이 낮은 지붕을 받치고>, <오촉 짜리 백열 전구가 마루 끝 서까래에 매달려 부엌과 마루를 고루 비>추는 조동마을의 삼칸 초가를 감동적으로 다시 살려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세대의 사람들에게 이 조동수필은 매우 공감을 주는 이야기였다.
두칠 선생의 글이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첫째로 그의 타고난 솔직한 성격에서 기인되는 듯하다. 문학사에 남는 위대한 자서전이나 자전적 소설의 특징은 대체로 작가가 대담하게 솔직한 자기고백을 하고 있다는 데, 다시 말해서 작가의 솔직성이 드러난다는 데에 있다. 예컨대 톨스토이 자서전이나 어거스틴의 고백록 혹은 괴테의 시와 진실이나 우리의 경우 이문열의 젊은 날의 고백이나 박완서의 작품들의 미덕은 작가의 솔직성에 있다. 어떤 글이 읽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실성(리얼리티)이 있어야 하는데 진실성의 요소를 우리는 일관성, 논리성에서 찾는다. 그런데 그러한 요소는 바로 작가의 솔직성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섣불리 기교를 부리다가 과장하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것은 독자들의 직관의 그물에 금방 걸려들게 되어 있다. 우리가 대체로 성공한 작가들을 만나보면 그들은 대개 놀랄만큼 솔직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들의 그러한 솔직성이 결국 거짓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에 닿게 되어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칠 선생의 타고난 솔직성이 그의 산문을 매혹적으로 읽히게 한다고 생각된다. 자기 자신과 가족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저절로 꾸미고 미화하고 싶게 마련이지만, 그러한 욕구를 떨쳐버리고 꾸밈없이 진실을 이야기할 때 인물이나 사건 속에 진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횔덜린이 <인간은 본래 지상에 시인으로서 산다>라고 했을 때 그러한 본래적인 인간(시인)의 모습을 우리는 어린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자장 솔직하게 사물을 보고 말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두칠 선생의 두 번째 미덕은 그의 타고난 예인기질이다. 그것을 흔히들 [끼]라고 말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잘 모르지만, 그의 글을 통해서 그가 틀림없이 예술가적 기질, 즉 끼를 지닌 인물이라고 믿고 있다. 토마스 만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에 의하면 주인공 토니오의 내면에는 두가지 기질,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북구적인 시민성과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남구적 예술성의 상충이 나타난다. 토니오는 그러한 시민성과 예술성의 대립 속에서 자신이 결국 저주와 같은 문학의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만, 이에 비하면 두칠 선생은 예술성에 기울어진 인물로 보인다. 예컨대 그의 명정기나 졸병수첩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일화들은 균형과 절제의 시민성보다는 낭만과 도취의 예인기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동수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예컨대 외조부는 시민성에 기운다면 <조동마을의 라디오>인 외조모는 예술성에 기울고 있는 분이다. 작자는 어린시절 외가에 살면서 어머니가 보고 싶어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고 잘 참아냈지만, 그러나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감수성이 무척 예민한 어린이였고, 거기다가 그의 외조모의 예인적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아 그의 낭만적 성격을 더욱 강화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의 부친의 애주가적인 기질까지 합쳐서 그의 끼는 더욱 잘 발현되어 예컨대 그의 기막힌 노래나 춤 솜씨 그리고 끊임없는 방랑벽과 샘물처럼 솟아나는 이야기는 글쓰기로 연결되어 앞에서 말한 대로 그의 방대한 기행문, 일기, 편지, 그리고 시 등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러한 예인기질을 가지고 있는 작자의 또 다른 강점은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이다. 외조모의 영향으로 보이는 그 능력은, 그의 주변의 어떠한 인물이나 사건 혹은 정황이라도 일단 그가 입을 대면 모두가 일반성을 넘어서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로 변해 버리게 하고 만다. 어떠한 사실이 일단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그 사실에 가미된 <이야기적 요소>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이라 해도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것이 대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소설가 이병주씨는 일찍이 그의 소설 [마술사]에서 마술은 화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도 이야기하는 기술(화술)을 통해서 하나의 특별한 사태(마술)가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의 특별한 이야기(작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괴테의 말처럼 <올림포스를 안정시켜 신들을 살게 하>는 시인이란 결국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 이야기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칠 선생은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수많은 마을 중의 하나에 불과한 교동(校洞)이라는 마을을 <조동마을>이라는 하나의 신화적인 마을로 살려낸 것이다. 그곳에 살다간 인물들과 그들이 살던 집과 우물과 길과 담장..... 요컨대 그 마을은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의 사랑과 질투와 음모와 싸움이 이어지던 신화의 무대 <올림포스>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글을 읽어보면 두칠 선생은 휴머니스트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천성적으로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는 누구든지 함께 아우르고 감싸안아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지리산의 벌꿀주인이나 시골의 식당 아주머니 혹은 그가 만나는 비교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나누는 그의 따뜻하고 끈끈한 인정은 그의 휴머니스틱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특히 조동마을의 외숙모나 장희형의 자식들 혹은 몬지아재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도 그의 따뜻한 마음과 휴먼한 가슴을 잘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산문은 따뜻하다. 그의 직업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날카롭고 치밀할 수밖에 없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어서 매우 냉정하고 서늘한 면모를 가지고 있을 법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항상 훈훈한 인정이 넘친다. 그가 간간이 보여준 하이쿠적인 짧은 시에 간혹 그의 예리한 감성이 드러나지만 그러나 그러한 날카로움을 그는 명정기에서처럼 술로 부드럽게 발효시켜버린다. 그의 본령은 아폴로적인 질서가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이고 바로 그 점은 그의 예인적 기질로 발전하고 그것이 다시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2>
{조동수필}은 3부로 구성되어있고 각 부마다 9장씩으로 짜여져서 전체가 3부 2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총 560여매 분량의 이야기이다. 전체를 아우르는 비극적 정황에도 불구하고, 거칠 것 없이 유장하게 풀어내는 작자의 이야기 솜씨로 각 장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삽입하여 지루하지 않게 단숨에 읽히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제1부 [청상의 우물]에는 작자가 어린시절에 외가인 조동에서 살게 된 내력과 외조부모님을 비롯한 외숙모와 장희형 등의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작자는 경주 이씨 집성촌인 조동마을의 지리적 위치와 6.25전쟁이 외가에 안겨준 씻을 수 없는 비극의 상처를 묘사하면서 반세기 전 한국 농촌마을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예컨대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하천의 징검다리, 처녀귀신이 나타난다는 호수, 마을 입구의 하마비, 솔개등대, 그리고 무덤들과 문중재실 등이 당시 조동마을을 형성하는 소품들이다. 그런 것들에 대한 작자의 묘사는 매우 탁월하다. 예를들면 작자가 어린시절 몸과 마음이 자라며 정서적인 근원이 되었던 초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는 대단히 생생하게 다가온다.
<내가 살았던 삼 칸 초가는 남향이고 바람길이 열려 여름 오후에는 매우 시원하였다. 마루 가운데 굽은 소나무 기둥이 낮은 지붕을 받치고 마당으로 열린 부엌에선 끼니마다 연기가 흘러나와 처마 서까래는 까맣게 도장된 흙집이다. 5촉 짜리 백열 전구가 마루 끝 서까래에 매달려 부엌과 마루를 고루 비췄다. 처마가 짧아 비가 오면 마루에 비바람이 들치기도 할 것 같지만 기어다니는 아이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바로 서서는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낮은 천장이라 마루까지 비가 들치지는 않았다. 옹이가 빠진 구멍난 송판으로 얼기설기 이은 마루바닥도 사람 한길이 되지 않아 댓돌에 다리를 올려놓고 누워야만 겨우 머리가 방문에 닿지 않을 정도로 폭이 짧은 마루였다.>
마산에서 태어난 작자는 세 살 되던 해 아우를 보게 되어, 마침 전쟁의 피난통에 젖먹이를 잃은 조동마을의 외숙모에게 보내져서, 아들과 손자를 잃은 외조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된다. 그리고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지내면서 그 곳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한 이야기들이 대단한 재미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전쟁으로 하여 청상에 과부가 된데다 어린 아들마저 잃은 외숙모가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청상의 우물>은 마치 박경리나 최명희에 의해 되살려진 우리의 근대사적 비극의 주인공들을 연상케 한다. <키가 작고 코가 납작>하며 <만사에 말대꾸가 없었고 일이 느리긴 해도 못하는 일이 없었>던 외숙모가 청상의 과부가 되어 <동짓달 긴긴 밤에는 색실로 자수를 놓으며> 외로움을 달래던 모습에 대한 묘사는 매우 감동적이다. <일부 종사 열녀 지사>로 살면서, 시아버지의 뜻에 따라 양자로 키우던 <장희형> 때문에 여러 가지 시련을 겪게되자, <여태껏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욱 망막하여 한 목숨 거두고, 먼저 간 외삼촌 곁으로 가겠다고 유서 한 장 방 머리에 남기고 헛간에 숨겨둔 농약을 마시>기도 하고, <모두가 잠든 밤>에 <물독을 이고 우물로 가서는 물소리에 울음을 묻어서 울>면서 <눈물 묻은 얼굴을 우물 거울에 담>고 <아무도 몰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독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외숙모의 한맺힌 생애는 읽는이의 가슴을 에이게 한다.
그러면서도 작자는 그러한 비극과 함께 그의 유년시절의 추억들, 예컨대 재래식 농촌의 화장실인 <통시 이야기>와 <꽁알(독버섯)을 삼킨 이야기> 혹은 <추어탕 끓이기>나 <소쿠리로 참새잡기> 그리고 <고추밭에 터팔기>등의 에피소드를 재미나게, 타고난 이야기꾼의 역량을 발휘하여 적절하게 배치하여 서사적 풍요를 이룩하고 있다.
제2부 [청송은 굽어도] 또한 유장한 서사의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앞부분에 해당되는 1,2,3장은 어릴 적에 뇌성마비를 앓아 언어장애가 된 <몬지아재>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작자의 어린시절 그에게 팽이와 고무줄 새총을 만들어 주었던 아재, 뇌성마비를 앓아서 조금은 모자라 사람들에게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사람, 특히 <유아시절에 어머니를 잃고 형님 밥을 먹고 자라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 아재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냥 앞 뒤 셈하지 않고 정을 통 채로 주는 편이었던> 몬지아재는 문자 그대로 자연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술버릇과 생활고 때문에 아내도 도망가버리고 처량하게 살다가 자살하고 마는 이 불쌍한 아재는 마치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에 나오는 곱추 <재곤이>처럼 신화적인 인물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곳에는 외할아버지의 장례식과 어릴적 함께 자랐던 장희형의 죽음과 장수하신 외할머니와 불쌍한 외숙모의 죽음 이야기가 나온다. 일찍이 아들과 손자를 먼저 보내고 일흔 둘에 위암으로 돌아가신 외조부의 장례식 때 상여 나가는 모습은 마치 영화장면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나이 마흔 둘에 두 아이를 남겨두고 간암으로 죽은 장희형을 <추시골 저수지가 바라보이는 양지 녘에 진달래꽃이 핏빛으로 핀 산자락 소나무 숲 속에 묻었다>는 표현은 눈물겹다. 그리고 천수를 누리고 아흔 다섯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스콧트 니어링처럼 눈을 감은 <조동마을의 라디오> 외조모의 별세에 비교되어 오랜 한의 세월을 보내고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자식 한 명, 며느리 손자 한 명 없는 병실에서 마지막 임종을 고했던> 외숙모의 죽음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신화 속에 다시 살아나는 조동마을을 작자는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동마을 솔개등대의 키 크고 오래된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줄기가 굽어서 살았다. 이 척박한 땅에서 죽지 않고 살자면 굽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일제의 속박에서 겨우 해방이 되어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자 할 무렵 이 땅에는 좌우익의 소용돌이가 몰아쳤고, 급기야는 민족 최대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를 불러온 동란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어찌 그 시대에 살던 민초들은 등이 안 굽고 살 재간이 있었겠는가? 허나 청송은 굽어도 푸르고 기상이 의젓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솔은 솔이더라.>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한 조동의 주인공들의 퇴장모습만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2부 2장에 나오는 소먹이는 이야기나 4장에 묘사되고 있는 짚의 용도, 밭매기와 불피우는 이야기 등은 사라져가는 농촌의 소중한 풍속도들이다.
제3부의 [햇살은 다시 들고]에서 작자는 오늘의 시점에서 조동마을을 눈물겹게 돌아보고 있다. 외숙모의 별세 후 거의 폐가가 된 옛집을 돌아보며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과거의 장면들을 회상한다. 작자의 증조모인 낙도 할머니의 보쌈이야기가 먼 전설처럼 떠오르고, 빈집에서 발견하는 옛날 물건들에 과거의 시간들이 묻어 나온다. 그리하여 작자는 그 곳을 찾아가서 한바탕의 잔치를 벌리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 빈집에서 마을사람들을 초청하여 벌리는 경로잔치는 오케스트라에 비유하면 클라이막스의 장면이다. 특히 팔순이 된 장희형의 생모이며, <동네 장구에 최고 고수인 백암댁>이 장구채를 잡고 목청을 뽑을 때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그야말로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장엄한 서사마당이었다. 그래서 작자는 그때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마당 위 밭둑이 되어버린 다시는 짓지 못할 사랑채 석축이여!, 그 밭 어귀 장독간 돌 틈에서 면면히 이어온 고사리 홀씨여~, 씨앗을 결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지켜온 작은 풀꽃들이여~, 고맙고도 고맙다. 비록 이 자리에 이 집의 씨앗이 되어갈 내 조카가 오늘 오지 못하였지만 저 산에 조상의 무덤과 이 집의 혼을 담고 있으니 그가 찾아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뿐 아니라 갖은 나무를 심어서 옛집을 살리고 싶어하는 바램이 아름답게 전개되면서 동시에 지나간 세월의 눈물겨운 추억들이 펼쳐진다. 부모님의 혼인잔치 이야기, 단동댁에서 수십 년만에 만난 옛 친구들의 이야기가 함부로 이어지고, 다시 유년시절로 가파른 시간을 거슬러 오르기도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서쪽 담을 기대고 들판을 내다보고 선 감나무, 그 감나무 아래에 있는 오래된 돌절구, 그리고 맷돌 한 짝..... 그 맷돌을 돌리는 동안에는 세상의 시름을 잠깐이라도 잊었을 아낙네...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다. 작자는 마음 속으로 절규한다. <누가 맷돌 대를 다시 잡아다오! 저 맷돌에서 한이 흘러나온대도 그 한은 우리네 민족이 살아온 한 일진데, 물에 분 콩을 넣고 돌리면 그 끈적이는 부연 물은 우리네 삶의 진액(津液)이요 향기일진데. 누구 다시 저 맷돌 대를 잡아 이 집 남정네의 기운을 살려 줄 아낙이 없겠는가!>
조동마을에 어둠이 감길 무렵 작자는 골목길을 걸으며 문득 뒷산 대숲에서 들려오는 굴뚝새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의 기억속에 환하게 펼쳐지는 집 뒤에 대밭과 생갑나루 들길이 보이는 계단식 콩밭과 그 언덕에 서 있던 오동나무..... 지금은 소식을 알 수 없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뛰놀던 어린 시절의 동무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그들은 지금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삼간 초가에 밭과 장독대, 돌절구, 맷돌과 그것들을 돌아보는 작자는 지금 남아 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을 작자는 과거의 시간을 헤치고 다가오는 미래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잠깐 빈집에서 그가 낮꿈을 꾸고 깨어나 찬물에 세수를 했을 때, 한 젊은 군인과 아낙네가 조동마을로 들어온다. 마을 앞 공동우물과 <면장집 대숲을 지나 다가오는 군복을 입은 청년과 아낙은 뜻밖에도 외가의 양자로 와서 살다가 죽은 장희형의 아들과 그 어머니로서 죽은 장희형의 아내이자 작자의 형수였고, 장희형을 빼닮은 조카가 작자에게 늠름하게 거수경례를 하는> 장면으로 대미를 이루고 있다. 이는 조동마을이 한 낱 과거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 주인공(다음 세대)의 등장으로 다시 새롭게 변화되어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문학은 인생의 해석이라고 한다. 과연 이 감동적인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휴머니스트인 두칠 선생은 인생과 세계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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