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수필(校洞隨筆) / 햇살은 다시 들고 9 (마지막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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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을 왼편으로 뒷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었다. 밭 언덕사이로 비가 오면 물길인 길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길도 묵어버려서 다닐 수가 없었다. 양담 음담 마을을 가로질러 새 길이 생겼다. 곰솔나무와 풍광 좋은 무덤을 지나 오솔길을 걸어올라 외조부모의 산소에 당도했다.
매미도 한 더위에 지쳤는지 조용하고 곰솔나무에서는 푹푹 더운 기운이 넘쳐 나왔다. 키 낮은 소나무가 무덤 울타리로 감싸던 땅은 밤나무 농장으로 변해서 녹음이 짙었다.
황토 기운의 땅 냄새가 뫼 뿌리를 덮고 일어난다. 흙을 파서 집을 짓는 개미에게 이런 더위정도는 아랑곳없다. 제 몸 크기 만한 흙덩이를 물고 나와서 구멍 곁에다 놓고는 사라진다.
개미들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다. 내 어릴 적, 소들이 건너 산에서 노는 동안 우리들은 분봉 낮은 무덤사이 잔디밭에서 고상받기 놀이를 하였다. 아이들 밑에 깔리면 코끝이 잔디가 닿았다. 잔디는 씨앗 줄기를 풀잎사이로 밀고 나왔다. 그 줄기를 뽑아 엄지와 검지 손톱으로 대를 밀면 맑은 즙이 끝에 매달렸다. 줄기에 매달린 물방울로 겨루기를 하였다. 두 물방울을 접촉시키면 큰 물방울 쪽으로 작은 물방울은 옮겨간다. 물방울이 점점 모여 줄기 끝에서 지탱하지 못하면 땅에 떨어지고 만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에는 튀밥처럼 생긴 개미가 손살같이 기어가고 있었다. 개미는 우리가 고상받기 놀이로 몸을 눕혀 뒹굴어도 용하게 짓이겨지지 않고 잔디 사이에서 살았다.
나는 개미가 낯설지 않았다. 그렇다고 성가시지도 않았다. 개미는 그렇게 그곳에서 터전을 잡아 살았다. 그 개미는 내 외조부모 무덤 곁에도 집을 짓고 살았다. 변한 것은 다만 저 아래 마을에 계셨던 어른들이 돌아가시어 개미가 사는 집 곁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개미가 흙더미를 옮기는 것은 비가 올 징조이다. 수리봉 산머리가 어둑하여 무거워지더니 소나기가 왔다. 금방 물이 불고 무덤사이 골이 되어 물길이 났다. 한바탕 소나기에 몸이 젖어 버렸다. 젖은 손으로 이마 위로 머리를 쓸어 넘긴다. 빗물에 젖어 시야가 흐릿하다.
개미들은 구멍을 막고 숨었는지 구멍도 개미도 보이지 않았다. 무덤 앞 상석에 놓인 소주잔을 챙겨들고는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내려온다.
들판 건너 신작로에는 차들이 길을 물고 달아난다. 굽은 길을 따라가는 개미의 행렬이다. 산길이란 게 애당초에는 물길이었다. 물길을 따라 사람이 다녀 산길이 되었다. 신발은 이미 다 젖고 말았다.
비는 그치고 하늘이 파랗게 개였다. 하늘이 열린 읍내 쪽에 무지개가 양손으로 낮은 산의 옆구리를 짚고 반월교 석교처럼 떠 있었다.
참새가 낱 곡식을 먹으러 감나무 아래 내 소쿠리에 걸려들기 바라던 날처럼 나는 감나무 아래를 바라보고 앉았다. 뒷마당 외양간에서 소가 여물을 먹을 시간이다. 감나무 그림자가 초옥의 지붕을 길게 덮고 있었다.
한여름 하오 무렵의 조름이 밀려왔다. 반쯤 열린 사립문을 밀며 바 지게를 진 찌든 한복의 외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나타나셨다. 할아버지가 헛간으로 사라지자 어느새 백발 머리에 흰옷을 입은 낙도할머니가 마루끝자리에 나와 앉으셨다. 마당의 멍석에는 나락이 밭이랑 모양으로 늘려 있었다. 낙도할머니는 나에게 곧 말씀을 하실 것이다.
"하끄나! 신발 벗고 멍석에 올라서 나락 골 뒤집어라."
낙도할머니가 방으로 사라지자 부엌에서 행주치마를 입은 외숙모가 물동이를 이고 마당을 지나 사립문으로 사라진다. 이모들은 아직 보일 시간이 아니지. 읍내 학교에서 돌아오자면 좀 더 기다려야 하지. 마루 서까래에 달린 사각 스피커에서 방송을 마치자 '케이비에스' 이 소리만 귀에 익어 들린다. 밭일을 나간 외할머니가 목화밭에서 올된 다래송이를 대 바구니 담아 이고 나타나신다. 깜장 고무신을 신은 얼굴이 발갛게 익은 사내아이가 할머니 뒤를 따라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들어온다.
아이 뒤를 따라 누군가가 마당에 들어선다. 군복에 모자를 쓴 군인 아저씨이다. 아이에게 낯익은 얼굴이다. 그는 아이를 보자 누군가하고 빤히 다시 쳐다본다. 아이는 그를 아는데 그는 아이를 몰랐다. 그의 국방색 작업복 상의에는 흰 명찰이 달려 있었다.
'이 상조' 그는 행방불명된 내 외삼촌이고 내 외할아버지의 외아들인 이상조였다. 내 외숙모 방 앉은뱅이 책상에 꽂힌 사진의 주인공, 언제나 젊은 '청년 이상조'가 나타났는데 외숙모는 그 순간에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외숙모, 우물가에 가신 외숙모가 오셔야 하는데.....
아, 인생도 연극도 모두가 다 이다지도 비극이란 말인가?
이 모든 일들이 단막극처럼 잠깐 나타났다 무대에서 사라졌다. 반세기의 시간을 넘다드는 연극 같은 무대였다.
그들은 모두 현실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삼간 초가에 밭과 장독대, 돌절구, 맷돌 그리고 나는 남아 있었다.
나는 빈집에서 한여름의 낮 꿈을 꾸었었다. 자고 나서 찬물에다 머리와 얼굴을 씻었다. 반소매 차림으로 들바람을 쐬며 감나무 그늘에서 생갑나루 들머리를 바라보았다. 젊은 청년과 아낙이 들판을 건너 조동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이제 이 빈집에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옷을 고쳐 입고 벽에 걸린 사라진 사람들의 사진을 다시 한번 보고 방문을 닫고 나왔다. 마루 가운데 허리가 한층 더 휜 소나무 기둥이 오늘따라 반가웠다. 기둥을 손으로 가만히 매만져 보았다. 한결 부드러워 생기를 가진 기둥이었다. 긴 여름 해가 기울어 햇살은 지붕 낮은 마루 속까지 밀어 넣었다. 마루 틈 사이에도 햇살은 소복소복 담기었다.
지난봄에는 축담에 제비꽃이 피었었다. 보라색 제비꽃이 주춧돌사이에서 돋아나 앙증맞게 예쁜 꽃을 저 혼자 피우고 있었다. 무서운 생명력이었다. 이 집을 지킨 영혼 같았다. 무쇠 솥이 썩어 가는데도, 장독대 석축이 다 망가져 가는데도 꽃의 생명은 끈질기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대문을 닫고 문짝에 난 작은 구멍으로 짧은 줄을 끼우기 위해 줄을 찾았다. 줄이 없어졌다. 하는 수 없이 대문을 가지런히 맞추어 두고는 집을 나왔다.
마을 앞 공동우물을 지나, 면장집 대숲을 지나, 면장집 앞 각지를 도는 순간 내 두 다리는 땅에 붙고 말았다. 청년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꿈에서 보았던 군인이었다. 흰 명찰을 보였다. 아낙은 바로 장희형의 아내인 내 형수였다.
"인사드려라. 아재다."
어깨가 넓고 눈썹이 짙은 장희형을 빼 닮은 그는 거수 경례를 올렸다.
2003. 04. 02.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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