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수필

두칠이



조동수필(校洞隨筆) / 햇살은 다시 들고 8
   
   
 
8



땡볕에 열린 호박도 익어 버릴 것 같은 더위가 마을을 덮은 바람 한줌 없는 날씨이다. 마당의 감나무 잎도 파리 한 마리도 움직이지 않는 날이다. 마을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공동우물의 닫힌 뚜껑을 열었다. 물 속은 물 그림자만 바닥에다 내려놓고 파문하나 없이 조용하다. 손바가지를 내리는 순간 물 속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숨죽이던 긴장이 이완된다. 정지된 공간이 通電 순간 공장이 다시 돌아가듯 하였다. 미지근하리라 생각했는데 물은 차가웠다. 우물 뚜껑을 덮자 사방은 다시 고요해 졌다.
풍뎅이 한 마리 닭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길을 지나 대문을 밀고 마당에 들어섰다. 햇살은 지붕 낮은 초옥의 마루 끝에도 올라서질 못했다. 나는 좁은 그늘에 앉아서 낮은 산등성이에 걸린 푸른 천 조각을 보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집, 내가 오지 않는다면 영 영 아무도 오지 않는 집인 줄 알았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집이 아니었다. 내가 오지 않는 날도 오는 것이 있었다. 숨이 막히게 내리 쬐는 태양은 어김없이 이 집을 찾아왔다. 저 산에 계시는 내 외조부모님은 영혼으로 매일같이 다녀가는지 몰라도 태양은 한결같이 이 마루에 빛을 남기고 다녀가고 있었다.

문풍지가 찢어진 대발로 엮은 여닫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 마른 흙 냄새가 벽에서 풍기는 토방에 누었다. 바닥에서 시원한 기운이 전해왔다. 외할머니가 임종하기 전에 누워 계시던 자리이다. 나는 그 자리에 내 몸을 꼭 맞추어서 누었다.
가구 하나 없는 빈방에 낡은 사진액자가 한쪽 벽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모두들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쓰고 흑백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 모서리에는 맨몸으로 고추를 달고 찍힌 백일 사진이 겹쳐 꽂혀있었다. 나도 있었다. 외할머니의 네 딸의 귀한 첫아들의 사진이었다. 외할머니에게 얼마나 귀한 외손자였을까?

열려진 방문으로 바람이 났다. 바람소리에 잠이 들었다. 초가 지붕 이엉자리 아래에는 삼대 말린 재릅이 지붕 짚단을 받치고 있다. 나는 외할아버지 몰래 재릅을 마구 뽑았다. 재릅은 매끄럽고 가벼웠다. 재릅 한쪽 끝에 손마디 만한 대나무를 날카롭게 잘라서 끼우면 화살이 되었다. 화살은 적어도 열 개 이상은 되어야 활쏘기에 나갈 수가 있었다. 나는 좋은 화살은 만들 수가 있었지만 좋은 활은 만들 재간이 없었다. 좋은 활은 무엇보다도 좋은 대나무를 구해야하고, 대를 강제로 휠 강한 힘이 있어야 하고, 휜 대를 단단히 묶을 팽이 줄처럼 탄력 좋은 끈이 있어야 하는데 어린 내가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활처럼 위험한 장난감을 선 듯 만들어줄 사람도 어린 나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성능 좋고 정확하게 날아가는 활을 갖고 싶었다.
지붕이 내려앉는다고 절대 지붕에 올린 재릅을 못 뽑게 하던 외할아버지에게 들키고 말았다. 마음이 여리기만 했던 나는 기어이 들키고 말았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러나 진작 놀란 것은 내 혼자 마음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놀라는 것만 보고 아무 말씀도 아니 하셨는데 나는 지레 놀라서 그만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 당황하신 것은 외할아버지였을 터인데, 나는 외할아버지가 그렇게도 무섭고 원망스럽고 미웠다.
내 이모를 졸라 만든 볼품없는 활이지만 활 통에 화살을 담고 빈 논에서 저 하늘을 향해 활을 쏘아 올리면 화살은 앞산을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산을 향해 날아간 화살은, 활 시울을 떠난 화살은 논 한 마지기 거리도 채 못 넘기고 추수하고 난 질퍽한 구렁의 진흙 논에 보기 좋게 꽂혔다. 내 나이가 한 살씩 더 먹어가며 힘이 붙자 나는 혼자서 활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지만 그런 일도 나이를 더 먹어감에 따라 다른 재미가 붙어 다시는 해 보지 못한 놀이가 되었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생긴 놀이란 것은 화투놀이나 술 마시기 놀이나 어른 몰래 하는 사내아이들 짓거리이다.

불기운이 없는 방에 선잠을 잤는데 일어나니 저녁 무렵이었다. 마루에 걸린 백열등을 켜고 달려드는 모기도 쫓을 겸 대문을 나섰다. 공동우물 못 미쳐 사이 길 언저리에는 외양간이 있었다. 소똥 거름이 쌓였고 밤에는 소의 되새김소리가 들리던 곳이다.
흙벽은 시멘트벽으로 바뀌었고 외양간은 방이 되었는지 돌아앉았다. 눈을 감고도 찾아 갈 수 있었는데 자꾸만 길이 낯설다. 두 번의 돌다리 개울을 건너 백암댁(장희형 생모)에 당도하니 아궁이 불을 태다 백암댁이 나왔다. 들고 간 소주를 놓고는 한잔하시라고 권하니 내 손을 불끈 잡고는 마루에 앉힌다. 마루에 난 벽장문을 열고는 양푼이에 담긴 수박 화채를 내어놓고 먹으라고 채근을 한다. 나는 목이 메였다. 여름에 수박 화채를 먹으면서 가슴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심장이 마구 뛰어 화채를 삼킬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날 보고 죽은 아들(장희)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같은 것이 아니라 틀림이 없었다. 오래 전에 죽은 아들보다 더 오래 전에 아들과 놀던 나를 보고 그녀의 여든이 넘은 망각된 기억 속에서, 나를 장희형으로 오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얼굴과 움직이는 입 모양을 흐린 각막으로 애지중지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초롱초롱 해지고 있었다.
자식 앞세운 어머니의 애달픈 한이다. 제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남에게 보내서 앞세워 버린 모정이다.
구부정한 허리를 일으켜 이내 부엌으로 들어갔다. 제 손으로 밥 한끼 먹여야 하겠다는 일념이다. 난 거절해도 소용없음을 안다. 그녀의 뜻을 받아드리는 것이 그녀를 위함임을 안다.

어둠이 산을 감고 들을 감고 마을길을 다 감았다. 까만 하늘에 별이 총총하였다. 앞산 뒷산 동산이 막고 하늘로 패인 하늘우물에는 별이 무수히 떴다. 별빛을 앞세우고 마냥 다니던 골목길을 타박타박 걸어 내려왔다. 뒷산 대숲에서 굴뚝새 소리가 들렸다. 집 뒤에는 대밭 있고, 생갑나루 들길이 내다보이는 계단이 진 콩밭이 있고, 밭 언덕에는 오동나무가 있었던 곳을 보지 않아도 안다. 오솔길 양편으로 더 작은 길로 이어져 있고 이 길에는 이름도 잊어버린 누가 살았고, 이 대문에는 또 이름도 잊었지만 친구 누가 살았던 집, 다 안다. 안다고 하지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 무얼 하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혹 만난다면 얼굴도 모를 것이다. 아는 것은 다만 철부지 어린 시절 싸우고 장난치고 어깨동무했던 그 시절의 일뿐이다. '그 사람 이름도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노래 가사처럼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시절 그 추억들만 내 가슴에 있네.
어두운 길에 별 하나 유성 되어 떨어진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 하나 떨어져도 별들은 여전히 반짝인다.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단 한사람 사라진데도 세상일에는 무슨 상관이듯이. 별은 이 밤이 다 세도록 반짝 반짝 빛날 것이다. 나도 별이 되어 빛날 것이다. 그 누구에게 별이 되리다.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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