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수필(校洞隨筆) / 햇살은 다시 들고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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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키우는 과수 중에 나는 감나무를 좋아한다. 요즈음처럼 상업적으로 재배하는 단감나무가 아니라 키가 지붕까지 솟고 가지가 사방으로 뻗는 재래종 감나무를 좋아한다.
우리 토종 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 명칭을 내가 다 익히지 못하기에 그냥 우리 마을에서 불렀던 이름으로 말해보면 감이 가장 굵은 왕감, 동글납작한 반시감, 고추전구 모양의 뽀쪽감, 가장 작은 귀감(고욤), 재래종 단감도 있다. 감나무 껍질은 뱀의 표피 같기도 하고 벌집의 무늬 같아 아름답다. 가지사이의 완만한 곡선도 보기가 좋다. 나무는 적당히 단단하여 어린 내가 올라갈 수 있도록 적당한 높이로 가지를 내어주어서 쉽게 딛고 오를 수가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서쪽 담을 기대고 들판을 내다보고 선 감나무가 있었다. 들판 건너 낮은 산들은 바다로 흘러내렸다. 하늘마저 바다로 내려온 뚫린 공간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곤 했었다. 왜냐면 그 공간에는 마산에서 오는 대한금속 완행버스 정류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은 그 빈 공간에서 나타나 들판을 가로질러 왔다.
손님이 오지 않는 날이 많았지만 어쩌다 진동 장을 다녀오는 고무 다라이를 머리에 인 외숙모가 나타날 때도 있었다. 나는 서럽게도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고, 예쁜 한복을 입은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고 외숙모가 나타나면, 어머니가 아닌 걸 빤히 알면서도 흙 묻은 치마 저고리에 외숙모의 모습이 어머니의 환한 모습으로 신기루처럼 변하는 착시를 경험하곤 했었다. 그런 그리움을 내 속에 간직하고 있었지만 한번도 단 한번도 내 심중을 누구에게도 표현해 본 적은 없었다. 모두들 나를 착하고 말 잘 듣고 어른스런 아이라고 칭찬만 해 주었지 내 속내를 읽어주는 이는 없었다. 나는 그래야만 된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면 나는 사내아이이고 양반 종가의 맏이고 과묵하고 우뚝해야 한다고 세뇌를 받았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나온 다음에야 감나무는 죽은 가지처럼 메마르고 야윈 가지에서 작은 싹을 틔웠다. 감나무의 새순은 일년생 이년생 가지를 가리지 않고 피고 싶은 자리에서는 어디라도 상처 난 자리에서 떨어져 나갈 굳은 각질 같은 새 눈을 늦봄에서야 틔우곤 했었다.
참새 주둥이 같은 속잎들이 피어서 손바닥만한 잎으로 자라 노란 감 꽃을 종 모양으로 종알종알 달면, 어느덧 이른 장마가 시작되곤 했었다.
장마비가 이따금씩 그친 자리에 꽃받침에서 떨어진 감 꽃을 줍기 시작했다. 굵은 실을 엮어 꽃술이 남긴 구멍에다 차례로 엮어서 꽃 목걸이로 걸고는 한나절을 놀고 나면 꽃잎은 어느새 멍이 들어 노란빛이 바래고 말았다. 혹은 종 모양의 한쪽이 벌어지면 실밥을 밀고 나와 목걸이에서 떨어져 버리기고 하였지만 대개는 비가 다시 내리는 시간이면 낮은 축담 마루에 걸터앉아 하나씩 뽑아서 먹었다. 낙수 물이 마당에 떨어져 지붕 끝자리와 나란히 한줄기 작은 강으로 흐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감나무 아래에는 정말로 오래된 돌 도구통(절구) 하나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 그 도구통에서 떡 매를 쳤지 싶다. 포도주잔 모양으로 허리 아래가 가늘고 가슴통은 넓고 풍만한 도구통은 비가 오면 비를 담고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외숙모가 돌아가시자 나는 그해 가을에 그 속에다 부레옥잠화 몇 포기 옮겼다. 물을 보충하기도 했었다. 빗물에 바람결에 부레옥잠화가 자라는 작은 연못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왔다. 헌데 감나무 아래 있어야할 도구통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시골에 빈집이지만 도둑이 올리는 정말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니 나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뒤에 알고 보니 이 도구통에 눈독을 들인 사람이 있었다. 방앗간을 했던 앞집 아저씨였다. 내가 도구통을 찾으러 왔다고 하자 장희형의 친형인 팔희형에게 허락을 받고 가져왔다며, 죽은 봉곡댁이 자기 죽고 나면 가져가도 좋다고 언약을 한 일이라고 하니 되받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웃만 아니면 돈이라고 주고 다시 사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도회지 골동품이나 민속품 가게에서 파는 장식용으로 그 댁에서 사용한다면 내가 되찾았을 것인데 시골에서 음식 만드는 도구로 사용한다니 물건의 용도가 원래 그러한데 사용 처도 없는 내가 굳이 주장을 한다는 것이 도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댁은 외숙모 생전에 매일같이 내왕을 하면 외숙모 쓰러지던 날도 외숙모를 발견을 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절구를 보자 맷돌 생각이 낫다. 외숙모가 돌아가신 그해 외숙모가 심었던 마늘종을 따 주던 날 나는 밭둑 돌에서 맷돌 한 짝을 발견한 일이 있었다. 그 녀석은 상판석인지 하판석인지 내가 맷돌의 상하를 눈여겨보지 않아 잘 모르나 한곳에 구멍이 참하게 뚫려있었다. 그렇다면 상판석이구나. 그 구멍으로 콩알을 숟가락으로 퍼 넣는 곳일 터이니. 헌데 하판석은 어디에 있을까? 분명 상판이면 하판석이 있어야 한 벌인데.
언제를 마지막으로 저 맷돌이 돌아갔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저렇게 밭둑을 쌓은 돌로 사용될 처지까지 되었다면 모두가 이 맷돌의 사용은 물론이고 존재마저 잊었던 일이다. 외숙모, 외할머니 사실 적에, 동네에 전기 방앗간이 생기고 나서부터 맷돌은 이미 그 용도를 다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누가 살아있어서 맷돌 하판석의 유무를 물어 볼 일인가?
그러고는 한 해를 보내고 절구 사건이 발생한 봄, 햇살이 앞마당 장독대를 지나서 마루 깊숙이 들어오던 날 나는 외가의 장독을 매만지고 있었다. 오래된 독들이 한가득 했던 장독들은 반이나 비어버렸다. 외숙모가 담았던 고추장 된장을 퍼 가면서 작은 독들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장독대 생김을 잠깐 말하자면 부엌 앞에 돌 축대로 허리정도 쌓고 돌계단을 두 세 개 올리고 방구들 놓는 판석으로 평탄하게 깔았다.
돌로 높게 쌓은 곳이라 물이 전혀 고이지 않았고, 장독대 너머는 텃밭이라 사이에 흙담을 또 허리정도 올려서 기와를 덮었다. 비바람이 불어도 밭 자락의 흙이 넘어오지 못하였고 북쪽으로는 초옥이 막았다. 남쪽으로 밭이니 양지가 좋아 해가 종일 머무르는 곳이고 서쪽이 열려서 바람이 내내 통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 장독간 흙담에는 매년 고사리 잎 같은 고비가 해를 거르지 않고 자랐다. 바닥 돌 틈으로 봉숭아 붉은 가지가 올라서 연분홍 꽃을 피우기도 했었다.
나는 그날 내가 앉았던 장독대 바닥 돌 중에 하나가 둥근 것을 보았다. 그것은 다른 돌과 무늬와 빛깔이 다른 화강암이었다. 바로 맷돌의 하판석이었다.
오라, 누가 맷돌 한 짝을 여기로 옮겼을까? 상판석보다 크기가 넓은 가장가지에 원으로 홈이 패이고 중앙에도 홈이 패인 짝을 잃은 맷돌 아래 돌이었다. 나는 맷돌을 뽑아서 지난번의 상판과 짝맞춤을 해 보았다. 맷돌에서 빠진 것은 손잡이 뿐이었다. 손잡이는 나무로 다시 만들어 끼우면 되는 일이다.
맷돌을 발견한 후 그 동안 전혀 불안하지 않았던 걱정이 생겼다. 여기에다 맷돌 한 벌을 정렬해 두면 누가 몰래 가져갈 것 같다는 걱정이었다. 지난번 절구 사건도 있고 하니.
그럼, 어떡하지? 가져가? 어디로? 가져갈 곳도 없었다. 둘 곳도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상판은 상판이 있었던 밭둑에다, 하판석은 장독대 바닥에다 다시 옮겨 두고 말았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제자리에 자연스럽게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보관 법이다 싶어서 나는 갖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그 자리에 두고 말았다.
몇 일에 한번은 시도 때도 없이 돌렸을 저 맷돌, 콩을 넣고 콩 물을 만들어 여름 더위를 넘기고, 쌀을 갈고 보리를 갈고 밀을 갈았던 맷돌, 대대로 이 가문을 이어온 맷돌이 언제부터 돌지 못하고 제자리를 잃고 말았을까?
이 집의 아낙네가 이 맷돌을 돌리는 시간동안에는 시름을 잊을 것인데 세상의 시름도, 남편의 시름도, 자식의 시름도 잊었을 것인데.
저 맷돌을 돌리는 시간도 사람도 이제는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는 소원하였다. 누가 맷돌 대를 다시 잡아다오!
저 맷돌에서 한이 흘러나온대도 그 한은 우리네 민족이 살아온 한 일진데, 물에 분 콩을 넣고 돌리면 그 끈적이는 부연 물은 우리네 삶의 진액(津液)이요 향기일진데.
누구 다시 저 맷돌 대를 잡아 이 집 남정네의 기운을 살려 줄 아낙이 없겠는가!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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