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수필

두칠이



조동수필(校洞隨筆) / 햇살은 다시 들고 4
   
   
 
4


겨울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 봄이 왔다. 마른 풀덤불 속에서 살찐 취나물이 돋아 나왔다. 계절은 이렇게 어김없이 돌아오고 묵은 땅에서도 새 순은 다시 돋아 나오는데 이 집을 떠나버린 사람은 아무도 다시 오지 못하였다.
산림조합에서 묘목을 도매가격으로 샀다. 내가 좋아하는 수종으로 나무를 골랐다. 먼저 백목련과 앵두나무를 고르고, 포도와 매화나무도 골랐다. 나무를 심자. 나무를 심는 뜻은 희망을 심는 일이다. 마당 구석자리와 뒤뜰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심었다. 땅을 파다보니 땅속에서 단지 깨진 사금파리가 나왔다. 그랬구나, 이곳은 돼지우리가 있었던 곳이구나. 돼지를 키워서 우리 이모들 시집가는 날 손님들 음식상에 내어놓았지. 털이 까맣고 체구가 작은 토종 돼지의 기억이 환히 떠올랐다. 구정물 한 바가지에 보리 겨 함지박에 담아 구유 통에 붙고 주걱으로 뒤섞어 놓으면 돼지 두 마리는 연신 돼지 코를 실룩거리며 꿀꿀 좋아서 노래를 불러 주었던 그 돼지우리 자리가 바로 여기구나.
돼지가 살았던 자리에 포도나무를 심자. 포도 덩굴이 그늘을 지우면 돼지 같은 마음으로 그 그늘에 앉아 노래를 부르리라. 돼지우리 옆자리에 나란히 목련을 심어두자. 백목련이 하얀 옷을 입고 봄바람을 타고 오시면 나는 심순애 곡의 '4월의 노래'를 불러보자. 눈이 부신 봄날 백목련 새하얀 빛으로 천지를 단장하리다.
할아버지 담뱃대를 만드는 시눌대 밭 언덕아래에는 매화나무를 심자. 양지 바른 따사로운 곳이라 제일 먼저 매화꽃을 피우리라. 봄바람에 매화꽃잎이 우수수 날리는 날 번져오는 저 햇살의 따사로움처럼 내 남은 삶도 따뜻한 나날이고 싶다. 그 날에도 내 기력이 남아 맑은 술 한잔 마실 수가 있다면 조동마을 서쪽 바다에서 번지는 저녁 노을을 벗삼아 짧은 시라도 한 수 읊으면 좋으련만. 그날 밤에는 하늘이 높아 별들이 함박눈송이 만큼이나 크다랗게 온 하늘에서 떨어지리다. 나는 봄밤에 홀로 황제가 되어 행복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오래 오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기리다.
장독대 옆에는 앵두나무를 심자. 앵두나무 새순이 참새 주둥이처럼 가지 거친 자리에서 터져 나오면 주름진 잎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자연의 오묘함을 새삼 배우리다. 그 푸른 잎새가 나온 후 연분홍 꽃잎이 피고, 여름이 시작되는 날 벌써 아가씨 입술같이 붉고 매끈한 앵두가 알알이 매달리리라. 누가 아랴, 내 장성한 조카가 훗날 아리따운 딸을 낳아서 이 집에서 키운다면 이 앵두나무가 좋아서 앵두 같은 여식이 좋아서 이 집으로 장가오겠노라고 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리고 그는 그 처녀에게 이렇게 속삭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 앵두나무 장독대가 좋아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이 앵두나무를 심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뭐 꼭 그렇게 묻지 않아도 무슨 소용이야. 그럴 즈음에는 나도 저 산 내 외조부모님처럼 저 산하에 누워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무슨 뜻으로 이 땅에 오늘을 살고 있는지는 짐작해 볼 수 있겠지. 그리고 얼마나 흐뭇해하겠는가. 지금 내 외조부모님이 내가 하는 일들을 보고 계시는 것처럼 나도.

상추는 한 해 두 번을 심어 먹을 수가 있다. 이른봄에 씨앗을 뿌리면 보리타작을 할 즈음이면 제법 자라서 뽑아 먹는다. 중부지방은 봄이 좀 늦으니 어렵지만 남녘에는 3월초면 씨앗을 뿌리고 오월이면 먹을 수가 있다. 혹 작년에 밭에 남긴 뿌리가 겨울에 다시 돋아나 준다면 더욱 일찍 상추 맛을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봄동이가 꽃대를 올리기 전에 후이나라고 부르는 봄 배추도 봄철의 좋은 김치 재료이다. 여름 장마가 끝나면 상추는 거의 밭에서 죽어버린다. 물에 잠기면 상추 잎은 그냥 물에 녹는다는 표현이 적당하지 싶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가을 상추 씨앗을 뿌린다. 나는 그 해 봄부터 외숙모가 심어놓은 상추를 뽑아 먹었다. 그리고 외숙모가 돌아가신 후에 그 씨앗을 받았다. 다른 상추보다 잎이 연하고 맛이 좋았기 때문에 꼭 이 상추 씨앗을 받아서 대를 이어야겠다는 내 생각이었다.
마늘도 뽑아서 씨알이 좋은 종자마늘부터 챙겨놓고 나머지를 나누었다. 논농사를 짓지 않아 볍씨를 따로 마련하지는 않지만 외할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종자씨앗부터 먼저 챙기셨다. 논농사를 지으면 짚도 생기고 쌀겨도 생기고 나락 껍질도 생겨서 농촌에서는 긴요하게 사용할 것인데 나에게는 그런 재료는 없었다. 나는 짚신을 못 엮지만 새끼줄은 잘 꼰다. 정말이지 외할아버지 곁에서 마른침을 손바닥에 퉤 퉤 뱉으며 곧고 가지런하게 새끼줄은 지금도 잘 꼴 자신이 있다.
농사일을 다 잘 못하지만 유독 낫질은 어려웠다. 어릴 적에 손 다칠세라 낫을 못 만지게 하였던 이유도 있지만 아무래도 낫 일이란 게 오로지 현장에서 꾸준한 실습만이 경지에 이르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똥 장군을 지고, 쟁기질, 써레질은 못하지만 마른나무를 한 짐 해서 지고 오는 일은 할 수 있었다. 겨울철 사내아이들은 산에 가서 나무하는 일이 일과이다. 나는 생솔을 베어오는 일은 마다하고 내 이모들이 곧잘 하는 솔방울 줍기, 감솔 나무 아래 잎 떨어진 솔 갈비를 갈고리로 긁기, 밑 둥지 잘린 나무 썩은 등걸 발로 밀어서 뽑기, 소나무 마른 잔가지가 손으로 쉽게 부러지는 삭정이, 이런 나무 짐은 가짜 촌놈인 나에게 적당하였다.
내 막내이모와는 많아야 다섯 살 정도밖에는 나이 차이가 없었다. 막내인 그녀에게 나는 적당한 남동생이 되었다. 그 이모가 방학이면 아직 초등학교 입학도 안 한 나를 데리고 나무하러 다녔다.
한번은 갈비 짐인지 생솔 짐인지는 모르나 나무 짐을 새끼줄로 돌돌 말아서 새끼 멜빵을 내어 나에게 지게하고 이모는 머리에 이고 내려 왔다. 나는 제법 사내처럼 한 손에 지팡이를 짓고 다른 한 손에 낫을 들고 비탈진 산길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산길을 다 내려와서는 그 동안 들고 왔던 낫을 어깨 뒤에 나무 짐에 훠익 꽂았다. 내 짐작으로 바른 손에 쥔 낫이 머리 위를 지나서 어깨 뒤 등짐에 낫 끝이 착 꽂혀야 하는데 낫은 내 머리 오른쪽 정수리에 턱 꽂히고 말았다. 낫이 꽂힌 모습을 본 이모는 아연 실색이 되었고 나는 별로 아픈 줄도 모르고 낫을 다시 뽑았다. 낫의 끝 방향을 하늘로 향하게 뒤로 돌려 꽂아야 하는데 나는 비스듬하게 낫을 쥐고는 돌렸으니 낫 끝이 머리에 꽂히고 만 것이다.
근처 개울에서 머리를 대강 씻고 흘러나오는 피를 이모 치마 말 자락인지 머리에 올린 머리 수건인지 수습을 하여 집으로 돌아 왔었다. 그래 집에 오자 별수 있나. 도회지 놈이라도 촌에 살면 촌놈이지 나는 외숙모가 퍼 온 된장떡을 만들어 머리에 붙이고는 신나게 저녁밥을 먹었다. 그래도 나무 한 짐을 지고 왔노라 하면서.
헌데 식구들 모두 어떻게 낫이 제 머리에 꽂히는가 하고 혀를 끌끌 찼지만 나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나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봤잖아, 꿩알이라고 독버섯도 먹는데 그까짓 머리에 낫 꽂는 일쯤이야.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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