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수필(校洞隨筆) / 햇살은 다시 들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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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었다. 가을이란 게 날씨가 흐리면 무척이나 추운데, 햇살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경로잔치를 마당에서 벌려야 하는데 햇살이 없다면 흥이 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산 사는 막내 이모가 먼저 도착을 했노라고 기별이 왔다. 마산서 큰 이모 내외를 모시고 출발을 하자 어머니 친구 몇 분도 따라 나섰다. 경로 잔치라는 게 말만 빌렸지 따로 준비 한 것도 없었다. 술과 음료수 차에 싣고 시골 장터에서 돼지 생고기 댓 근 사는 것으로 마쳤다.
내 삶의 깡다구는 일은 벌리면 다 시간이 일사천리로 진행시킨다는 믿음이다. 다만 사람 모이게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지라 기별하고 확인하고 그 일만은 잘 하니 말이다.
생갑나루에서 하마비를 돌아 솔개등대 산그늘을 밟고 나니 면장 댁 타작마당에 먼저 온 차가 한자리를 잡고 있었다. 공동우물 위에도 공터가 있었다. 대나무 밭 근처에다 차를 세우고 나는 마치 개선장군 입성하는 양 거드름을 피우면서 노인들을 앞 세워놓고는 노인보다도 더 느린 걸음으로 마을 앞길을 지나 삼 칸 草屋으로 행차를 했다만 동네에는 그 흔한 똥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 마을에서 제일로 오두막집을 찾으면 내 외가이지만 집을 모른다면 제일 기울고 허물어진 대문을 단 집을 찾으면 내 외가이다. 문고리가 없는 것을 시작으로 잠금 쇠가 없어 전깃줄로 대문 두 짝에다 구멍을 내어 끼워 바람에 덜렁거리지나 말라고 묶어 놓았으니 과히 짐작하고도 남지 싶다. 지난여름 태풍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그 태풍이 지나가면서 초옥의 서까래 밑으로 통과하는 전깃줄이 쳐지고 말았다. 다행이 누군가 두꺼비집(전원개폐기)을 차단해서 합선은 면했는데 그 뒤로 전기를 넣어보지 않아서 전깃불이 캐 질지도 모를 일이 되었다. 내 절름발이 손재주로는 그 전기 보수 공사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아 겨우 나무 막대기 하나 구해서 지붕의 달린 깨진 애자에 늘어진 줄을 걸었다. 다행이 불은 다시 켜 져 주어서 손볼 일은 없었다. 태풍이 다시 온다면, 그 때 일이 생기면 마저 하리다하며 나는 내 잘 난 머리를 위로 삼아서 기세 등등하게 지내는데,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생긴 것은 그 다음이었다. 집 뒤 언덕에 고목이 있었는데 그 나무가 넘어져 버린 것이다. 다행이 넘어진 방향이 지붕을 살짝 비껴서 집 뒤 텃밭으로 넘어졌다. 나는 그 나무를 치울 요량이 서지 않아서 쓰러진 나무기둥을 밟고 넘어 다녔다. 불편한 일이라면 누가 이 집에 와 본다면 '폐가에다 쓰러진 나무까지' 하면서 혀를 찰 일이지만 그럴 일도 없었고 내 힘으로 치울 재주도 없으니 그냥 두었다.
그 일도 다 맡김이 있었나 보다. 마치 먼저 온 막내 이모부가 톱을 구해 와서는 토막 토막으로 짤라 말끔하게 치웠다. 부지런한 내 막내 말순이 이모는 집안 청소를 아침 내내 했다며 내가 들어가자 그 활활 타는 火氣의 성격이 막 터질라 할 참이었다.
<헌데 이모야 이모야 내 이모 말순이 이모야, 니 캉 내 캉 그럴 사이가 아이잖아.. 우린 그 옛날 이 굴묵 뒤에서 설마 니가 내 이모라고 이모 노릇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우리 소꿉놀이도 했고 신랑 각시 놀이도 했지 싶은데 정말로 니 이 친구 같은 조카한테 성깔부리면 내 이모부한테 그 옛날 우리 으응~ 끙끙~ 한 일들 다 고해 바친다.>
이 나이에 뭐 할 터이면 하라고? 환갑 지난 이모부 무슨 힘이 있겠냐고..
<그러마 이모 아들 딸 장성하여 시집 장가 보내고 며느리도 봤다며.. 그들에게 일러도 무슨 탈이야 없겠지만 시어머니 체면에 손상이 와도 괜찮겠나?>
마 내가 이런 눈치를 보일 틈도 없이 하는 말이.
"하끄나.. 니 내 쌔기 쌔기 오라고 전화하드만 집 가죽은(가까운) 니가 먼저 와야지. 내 이기 뭐꼬. 내 소제하고 걸레 빨아라꼬 불렀나!"
얼굴이 불그락 푸르락 숨소리가 마치 내 귀에는 큰 이모랑 밥 먹고 설거지 서로 하라고 외할머니 앞에서 싸우던 어린 시절 목소리 같아서 하하 허허 이러고 있는데. 언제나 구세주이신 내 어머니.
"야 말순아 내가 나올라 카이 좀 얼쩡거리다 보이 그리됬따. 보자, 우리 망내이가 힘썼네. 그래 뭐라고 해도 봉곡대기 살아서도 그랬고 죽고 나서도 그랬다. 부산 강서방네가 제일로 욕마이 봤다."
"이모야! 내는 이모 중에 망내이 이모가 제일로 이뿌고 좋다. 이리 와 봐라 함 안아 주께..이모부요 괜찮지요."
"하모 하끄나. 내는 니 이모 하나 감당 몬 한다 아이가. 봉곡대기 살았을 적에 오매 가매 대다보자고 한 사람도 내고, 내 힘은 없지만 나매(남자) 하는 일은 다 하니 잔손 볼일은 보이는 족족 해 주고도 했는데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 봉곡대기가 나를 같은 강씨에 친정 피붙이라고 우리 강서방 강서방 하며 맛있는 것 다 챙겨주고 좋타 사아는데."
마당에다 불 판을 놓고 돼지고기를 굽으니 연기냄새에 앞집 옆집에서 사람들이 찾아 왔다. 봉곡댁 내 외숙모 돌아가시고 나서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집에 처음으로 사람 사는 집처럼 사람들이 모였다. 장희형의 생가 쪽 맏형인 팔희형도 오고 생모인 배돈댁도 왔다. 이 집과 인연이 되어 아들 주고도 마음으로 죄인처럼 살아온 사람들이다. 죽은 장희형의 처신에 대한 회한은 막상 같이 산 외숙모보다 낳아준 생모의 마음이 더욱 안타까웠을 것이다. 내 형이 반듯하게 살았었다면 두 분이 그만큼 마음 고생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장희형도 내 외할머니 외숙모도 다 저 세상으로 떠나 버렸으니 살아남은 외가사람들이 배돈댁을 위로해 드려야 했다. 하고 싶었던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살았던 배돈댁의 한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마음으로 화해해야 했다.
소주잔이 돌고 맥주 컵이 돌자 기분은 무르익어 갔다. 텃밭의 가을 상추를 뜯고 빈집에 없는 고추장 된장은 이웃집에서 담을 넣어 왔다. 그 옛날 아침저녁 담을 넘어 음식을 나누어 먹던 그 시절처럼.
동네 장구에 최고 고수인 배돈댁이 장구채를 잡았다. 여든을 넘긴 할머니의 마른 손목, 주름진 목에서 어찌 저런 목청과 손 기운이 나오는지 싶을 힘이 나왔다. 멜빵을 매고 서서 치지는 못해 멍석자리에 앉아서 치는 장단이지만 옛날 가락 솜씨는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이는 드셨지만 손가락 끝에 휘감아 도는 신풀이 장단과 여흥은 여전하였다.
이 얼마 만에 이 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 웃음소리인가?
이모들 출가한 후 그 동안 이 집에서 나온 소리는 울음소리뿐이었거늘 그 얼마 만인가?
이젠 영영 빈집이 되어버린 폐가에 모두 모여 아득히 흘러간 세월의 뒤안길을 더듬어 본 시간이. 마당 위 밭둑이 되어버린 다시는 짓지 못할 사랑채 석축이여!, 그 밭 어귀 장독간 돌 틈에서 면면히 이어온 고사리 홀씨여~, 씨앗을 결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지켜온 작은 풀꽃들이여~, 고맙고도 고맙다. 비록 이 자리에 이 집의 씨앗이 되어갈 내 조카가 오늘 오지 못하였지만 저 산에 조상의 무덤과 이 집의 혼을 담고 있으니 그가 찾아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뒷산 중턱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외조부께서 못다 이루고 가신 일 이제는 보시기 흐뭇하도록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비록 빈집이 되었지만 이제 보십시오. 이렇게 웃음소리가 흘러나지 않습니까?
나는 할머니 한 분 한 분을 껴안고 춤을 추었다. 내 나이 쉰이면 어디 가도 나이 든 사람 대접을 받는데 여기서 놀아보니 내가 제일 영계라며 할머니들이 날 안고 춤추고 싶어 야단들이셨다. 이렇게 내 인기가 치솟을 줄이야. 할머니들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나는 오랫동안 그 분들을 껴안고 놀았다.
마당 한 쪽에는 소국들이 올망 쫄망 꽃망울을 매달고 피고 있었다. 저 향기, 국화꽃향기가 번져나면, 여기 모인 이모들은 다 기억해 낼 거야. 조동 마을 이 초옥에서 자라면서 가졌던 시절의 추억들을 국화 꽃향기로 피어 올릴 거야.
사천의 두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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