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수필(校洞隨筆) / 햇살은 다시 들고 2
|
| |
|
|
| |
| |
| |
2
그 해 여름 나는 일요일에는 조동마을 찾았다.
헌 신발에 농부차림의 헌옷을 갈아입고는 마당의 텃밭을 갈았다. 외숙모가 심어놓고 결국 거두지 못한 마늘을 수확하여 마루의 추녀 끝에 걸었고 가을 배추와 무를 심었다. 빈집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가을이 오자 외로운 감나무에도 감들이 파란 하늘에 매달려 주었다. 아무도 가꾸지 않는 감나무이지만 덜 익은 감을 따서 곶감도 깎고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가지를 꺾어서 벽에 걸어도 두었다.
지붕 서까래도 낮고 마루도 낮고 축담도 나지막한 빈집의 초가에도 가을 햇살은 마루 깊숙이 들어와서 오래된 송판사이에 담았다. 낙도 할머니가 긴 담뱃대를 물고 나와 앉았을 마루에, 아침마다 외할머니의 드르륵 드르륵 따발총처럼 내 뱉었을 잔소리가 묻었던 마루에, 한숨으로 느림으로 한 세월 묵묵히 살았을 내 외숙모의 마루에 이제는 나 혼자 가을 햇살을 받고 앉았다. 한 많고 서러웠던 세상들을 산 내 일가친척의 여인이어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살아온 질곡의 세월에서 핏줄을 이어온 어머니들의 삶이 보이는 듯 하였다.
통나무 굽은 채로 얼기설기 짜 올린 허물어진 부엌 실겅에는 저 혼자 녹이 쓴 톱 한 자루가 놓여있었다. 아궁이 위에 놓였던 무쇠 솥도 사람 없는 집이라고 누군가 들고 가버려서 휑하게 구멍만이 궁상스럽게 보였다. 나는 바닥에 뒹구는 남겨진 잔가지들을 모아 아궁이에다 밀어 넣고는 성냥불을 그었다. 지저분한 바닥을 치울 요량으로 온돌 고래까지 밀어 넣어 보았지만 불길은 고래로 들어가지 않고 부엌 한가득 연기만 자욱해 지고 말았다. 오랫동안 묵혔던 온돌방 고래에는 습기가 많아 불이 잘 들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아무래도 고래 구멍이 막혔든지 집 뒤 흙 굴뚝이 망가졌든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손을 볼 방책이 없어 그만 두고 말았다.
부뚜막 구석자리에 묶은 초병이 부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있었다. 병은 속이 비쳐 보였다. 아래쪽으로는 식초의 앙금이 가라앉았고 위로는 말간 물이 틀림없는 재래 식초였다. 저 식초에는 적어도 이 집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신맛에 대한 유전자가 들어있을 것이다. 식초는 결코 상하는 법이 없다. 식초의 균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식초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섞지 않는 법이다. 먹다 남은 막걸리를 식초병에 부어 초 균을 살리기도 하고 감을 넣어서 초 균을 일구었을 이 집 부엌을 꾸린 여인네들의 손길들이 전해 준 마지막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식초의 균은 이미 내 腸部에도 원조 균으로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동질 감을 순간 느껴 먼지를 한가득 덮어쓴 병을 집어들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병마개를 열자 오래된 식초 냄새가 햇살을 타고 부엌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천장으로 집 주위를 감싸 돌기 시작하였다. 나는 마치 내 오래된 기억의 고향에서 꿈속처럼 아늑함을 느끼며 오래 오래 식초 향기에 젖었다. 그런 동안 아궁이에서 뿜어 나온 연기는 삼 칸 초가를 감싸고 피어올라 마치 봉화 연기를 피워 올린 곳이 되었다. 앞집 옆집에서 사람들이 기웃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아니 사는 집에서 연기가 올라오니 무슨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연기 속에서 내가 인사를 하며 나오자.
"왔나? 혼자 왔나? 불 피우나?"
"예, 안녕하시지요? 놀러 왔심더."
"오매는 잘 있나?"
"늘 그렇지요."
"뭐 좀 무운나? 때 되면 밥 묵으러 넘어 오이라."
"태희는 잘 있심니꺼?"
"하모, 저거들은 골에다 집 지어놓고 소 키우면 잘 산다. 안 그래도 니 안부 물어 사트라."
앞집에 혼자 사시는 단동 아지매였다. 내 어머니, 외숙모, 그 아지매는 그 시절의 또래들이었다.
"참 하끄나.. 이 집 세 안 놓을래?
진동에 사는 사람이 방을 구하러 와서는 보고 갔는데 들어와서 살면 좋것나하고 해서 물어본다. 안 되것제?"
"어디 이 집이 제 집입니꺼. 저도 생각나면 들리는 사람 아입니꺼."
"그래도 니가 이 집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니 니 승낙을 받아야 하제."
"외지 사람이 들어와서 살면 동네 사람도 그러하고 또 가끔씩 오지만 이모 님들도 못 마땅할 깁니더."
"집은 사람이 안 살면 허물어진다 아이가. 내가 가끔은 마당도 쓸고 마당의 잡초도 뽑고 하지만... 그래 니라도 이리 찾아오니 아무래도 니가 이 집을 간수해야지 싶다. 지난 추석에 부산에 사는 장희 안사람이 왔다 갔다. 물 청소도 하고 이것저것 챙겨 가는 것 같더라만 연락은 하나?"
"예 엄니가 연락을 하나 봅디다. 시장하면 밥 묵으러 갈께요."
가을 햇살은 어느새 연기를 잠재우고 마루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연기가 사라지는 남녘 하늘을 바라보며 햇볕에 몸을 데우고 안았다. 마당 끝자리 텃밭에는 도라지가 모가지를 뽑아 보랏빛 꽃대를 올리고 있었다. 외숙모가 심었던 도라지.. 외숙모는 돌아가셨지만 해말간 도라지꽃이 되어서 내 앞에 돌아오셨다.
그래,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이모들을 불러야겠다. 마루에 걸린 마늘도 한 접씩 나누어 드리고 이 도라지도 캐어서 나누어 드리자.
내 아버지가 장가를 오시고 내 이모부가 장가 왔던 이 마당에서 아직은 살아있는 그들을 불러모아서 흥을 모아 보자. 아버지 먼저 보내시고 적적하신 내 어머니께서 얼마나 좋아하실까?
큰딸로 태어난 죄로 허물어지고 망해 가는 친정의 업보를 홀로 감당하시던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외숙모 보내고 나니 내 외할아버지 뜻대로 양자의 아들에게 남은 유산 상속하고 조상 제사 모시도록 반듯하게 일을 마무리하신 어머니의 공이라도 세워드리자.
나는 앉았던 마루에 떨어진 흙을 쓸어내고 물걸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지붕 한곳으로 비가 세어서 천장의 흙이 마루에 떨어져 제비 똥처럼 굳어있었다. 여름 내내 쌓인 마루의 먼지를 닦았다. 그 옛날 율무가 염주 알 모양으로 알알이 열리던 자리에는 꽈리가 심었다. 봄에 심고 한번 물 준 것이 전부인데도 제 혼자 떨어지는 빗물 받아먹고도 어느새 황토빛 꽈리 봉투를 잎새사이에 종알종알 달고 있었다. 등 낮은 동산에는 푸르고 싱싱한 하늘 한 자락이 엎드려 조동마을을, 초가 삼간을, 흙 마당에 선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어린 날 어머니 품을 떠나 홀로 남겨지던 날, 말없이 동무해준 그 하늘이었다. 그 빛이었다. 푸르고 깊은 옥색 물빛 바로 그 빛이었다.
사천의 두칠이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