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수필(校洞隨筆) / 청송은 굽어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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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메는 일은 여자들 일이었다.
여름철 아침을 먹고는 외할머니를 따라 이모들은 머리에 수건 한 장을 햇빛 가리개로 쓰고는 콩밭 매앵(목화)밭 깨밭 꼬치(고추)밭 하물며 고매(고구마)밭까지 매어야 하니 한 더위에 예삿일이 아니었다. 제일로 힘든 밭매기는 자갈밭에 심는 콩과 매앵 그리고 매물(매밀)밭이었다. 고추밭이나 고구마 밭은 흙이 제법 암팡 지는 땅이니 호미날 심기가 쉬우나 자갈밭에 심은 것들을 매자면 허리만 찢어질 뿐만 아니라 더위에 사람 꼴이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밭 매는 일에 따라 나서는 일은 일상이었다. 내가 일을 거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이 그네들에게는 친구가 아니고 가족끼리 하는 일이라 내가 말동무도 되고 잔심부름을 부릴 좋은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안담에 외가의 콩밭은 사래가 긴 밭이었다. 이쪽에서 저쪽 밭의 끝은 산으로 굽어 들어가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밭 골이 많지 않으나 사래가 길어 한 자락을 차고 않아 굽어 돈 산자락까지 매어 가자면 아득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 곳은 소나무 산그늘이 아침나절동안 내리는 곳이라 일찍이 집을 나서면, 햇살에 그을리는 것이 원수 같은 처녀인 이모들에게는 다소 마음이 놓이는 일이기도 하였다. 할머니와 이모 둘 그리고 나 이렇게 나란히 한 골씩 맡아서 밭을 매기 시작하면 이모들은 한 숨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사래 긴 밭을 쳐다보면 저절로 한 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면 외할머니께서 겁에 질린 딸들을 보고 한 말씀을 하셨다.
"이 년들아! 호매이 자리(호미 자루) 흙도 안 묻히고는 한 숨부터 쉬나? 그래가지고 시집가서 아아(자식) 낳고 밥하고 농사 짓고 어찌 할 끼고. 빨랑 안 업디리고 뭐 하노! "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조동 라디오인 외할머니께서는 한 말씀 더 하셨다.
"게으른 눈아! 부지런한 손 있다."
일을 쳐다보니 태산같으나 일을 직접 하는 손은 시작하면 결국 다 해 낸다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밭을 매기 시작하면 외숙모가 중참(간식)을 이고 오는 시간이면, 해가 밭 두렁 소나무 머리를 지나 올라오는 시간이면 사래 긴 안담 콩밭 매는 일은 끝이 났었다. 할머니 말씀대로 부지런한 손이 다 하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산행을 하면서 할머니의 말씀을 상기하곤 한다. 산 위에서 산을 보면 건너 산이 까마득히 멀리 보인다. 우리가 오늘 가야할 목적지의 산이 저 멀리 희미하게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막상 산등성이를 타고 몇 시간만 걸어가면 아침에 바라보았던 산 위에 내가 가는 있는 것이었다. 이렇듯 눈으로 보는 거리는 멀어도 막상 걸어가면 몇 시간동안에 우리는 참으로 먼 거리를 걸어갈 수가 있었다.
그럴 때 나는 할머니 말씀처럼 이렇게 되 낸다 '게으른 눈아 부지런한 발이 있다.' 우리의 일상에도 마찬가지이다. 산적같이 쌓인 일거리도 하나 하나 시작하여 해치우면 어느 듯 다하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니던가?
적당히 비탈진 산을 개간하여 일군 매앵(목화)밭은 자갈밭이었다. 그늘이라고는 사방천지 어디에도 없는 산등성이 하나가 전부 목화밭에 목화가 익어 작약꽃잎같이 부드러운 녹두빛 꽃잎이 벌어지면 외할머니께서는 매앵 밭을 매셨다. 꽃이 피기 전에 열리는 다래의 달콤함에 맛을 익힌 나는 외할머니를 졸라서 다래송이를 한움꿈 집어서 밭둑에 앉아 다래 속을 꺼내 씹었다. 다래는 솜이 익기 전에 파란 송이 껍질 속에 담겨 있는 알갱이를 씹으면 달콤한 물이 나왔다.
매앵 꽃이 피고 목화가 열리면 이를 두고 면화 꽃이 핀다고 한다. 이 면화를 따서 솜 공장에서 씨앗을 뽑고 솜을 타면 무명실도 뽑고 무명천도 짜고 그 천으로 면바지 저고리를 지어 입었다.
면화가 열매를 열고 터져 나오면 보송보송 솜이 뭉게 구름처럼 달린다. 면화 열매 속 씨앗을 가려내고 솜을 보풀보풀 타서 고치를 만들어 외할머니는 물레에 돌리면 고치를 잡은 손가락 끝에서 거짓말같이 신기하게 실이 줄줄 나왔다. 나온 실을 실타래에 감아 다시 베 짜는 기계에 씨줄 날줄로 북을 만들어 길삼을 하여 천을 만들었다.
허나 어른들은 이렇게 옷감을 만드는 일만도 엄청나게 많은데 나는 마냥 매앵 꽃이 피는 목화밭에서 비단결 같은 꽃잎의 감촉과 향기에 그리고 다래의 맛만 익힌 산골이 도련님이었던 것이다.
매앵 밭에서 소변이 마려우면 밭둑에 그냥 싸면 되지만 뒤가 마려우면 자리를 살펴주는 일도 외할머니의 몫이었다. 외할머니는 뱀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아무 곳이나 주저앉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할머니가 마련해준 밭 어귀의 풀이 없고 평탄한 흙 자리를 골라 앉아서 볼일을 보고 나면 할머니가 호미로 땅을 파묻었다. 외할머니는 밑 닦아주는 일도 참으로 신통방통하였다. 휴지나 종이가 있을 리가 없었지만 자연물로 말끔히 해결하여 주었다.
외할머니께서 밭을 다 매시고 일어설 때까지 나는 작은 나무 그늘에서 들판 건너 신작로로 지나가는 버스를 바라보거나, 산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에 귀를 팔아야만 했다. 뻐꾸기 소리도 귀에 익어 들리지 않을 무렵이면 하늘에 홀로 빙빙 돌고 있는 솔개의 정지 비행과 맴돌이 비행에 눈 맛을 들이기도 하고, 소를 찾으러 온 아이들의 고함소리에 시간을 가름하기도 했었다.
그런 날 저녁이면 부엌에서는 구수한 생선 굽는 냄새를 맡았다. 소나무 삭정이로 밥을 짓고 나면 타고남은 잿불이 붉게 빛을 발했다. 외숙모는 재가 되기 직전의 초벌로 타고 난 불덩이를 아궁이 입구로 모아 내었다. 그리고는 불빛이 붉은 삭정이 불 위에 못대(석쇠)를 올리고 잘 손질한 메가리를 마리 채로 굽었다. 메가리는 정갱어 새끼처럼 생긴 생선으로 진동 만에서 여름이면 잡히는 어종이었다. 메가리는 기름이 많고 무른 생선이라 회로 먹지도 못하고 다만 이렇게 숯불에 구워서 먹는 것이 제 맛이었다. 메가리를 구우면 껍질에 공기구멍이 생겨 딱 딱 터지면서 노릿노릿 구였다. 생선장수가 이고 온 메가리를 할머니는 보리쌀과 바뀌었다.
마침 나무로 불 피우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 불 피우는 기억을 이야기하고 가자. 불 중에 가장 신나게 붙는 불은 소죽을 끊이는 가마솥에 한 아궁이 가득 불을 지피는 일이다. 여름에는 마른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장작을 마련하여 불을 때면 좋으련만 시골 살림에 장작불을 땐다는 것은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일이고, 밥짓는 아궁이에는 마른나무를 때거나 하나못해 짚단을 때기도 하지만 짚단을 때는 일도 아까운 일었다. 짚의 용도가 하도 많으니 나무가 없어 할 수 없이 짚단을 때었지 그것도 어림없는 일이다. 짚단으로 무얼 하냐고? 가마니 짜고, 새끼줄 꼬고, 소여물 먹이고, 지붕 이엉을 잇고, 하다못해 상여 나면 동아줄 엮는데도 짚이 들고, 단오 날 마을에 줄다리기 대회를 해도 짚이 사용되었다. 농촌에서 짚은 지금 가정에서 종이보다 더욱 요긴한 재료이다. 내가 저번에 말했듯이 변소 밑닦이도 짚나래끼로 하는 시절이니 짚을 불 때는 땔감으로 사용하는 일은 좀체 허락되는 일이 아니다.
하여간 소죽을 끊이는 아궁이에는 땔감이 꽤 많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주로 생솔을 지고 와서 사용했다. 생솔은 마르지 않아 솔가지나 솔잎에 송진이 번질거리고 불이 쉽게 붙지 않았다. 그래서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소죽을 끓이는 아궁이에 먼저 솔가지를 분질러 한가득 집어넣는다. 이 때 아궁이 주둥이가 미어 벌어질 정도로 가득 채워서 넣어야 한다. 작은 공간이라도 생기면 작은 가지를 짤라 하여간 최대한 가득 집어넣고는 아궁이 아래 재가 쌓인 곳을 부짓갱이로 살살 구멍을 내어서 마른 솔잎이나 마른 삭정이를 아래 부분의 틈을 내어 밀어 넣고 불을 붙인다. 일단 마른 재료에 불이 붙으면 그 불 힘으로 축축한 생솔가지의 송진에 불길은 옮겨 붙고 불이 붙은 송진 기운으로 타닥거리면 생솔의 솔잎에 연쇄적으로 불길이 일어나야 한다. 이 때 초기 불심이 모자라 송진이나 솔잎에 옮겨 붙지 못하면 불은 마른 재료만 타고 꺼지고 만다. 그러면 앞이 안보일 정도로 솔 연기가 나기에 한번 실패는 연기가 사라질 동안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일단 불이 거칠게 붙어나면 소나무 굵은 가지도 불기운에 마르면서 타 들어간다. 불길이 좋을 때 구경만 하고 있으면 불은 한번으로 끝나고는 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불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불기운이 절정에 도달하여 막 연쇄적으로 기운이 일어나는 동안 계속해서 생솔가지를 집어넣어 불기운을 최고로 올려서 계속 유지하여야만 생솔가지를 태울 수가 있다. 이런 불을 우리말로 잉걸불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 같고, 불길은 불길을 불러서 원자폭탄 폭발이 연쇄반응으로 일어난다고 하니 이 현상이 바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솔 폭탄이라고 불러야 하지 싶다.
이렇게 서너 번 생솔을 집어넣어 소죽이 다 끓고 나면 가마솥의 소죽은 여물통으로 옮기고, 그 솥에다 여물을 조금 남겨서 다시 물을 부어두면 화덕의 기운과 아궁이의 남은 불기운으로 물이 데워졌다. 아궁이 속 재에다는 고구마를 묻어두고 어둠이 오면 이모들과 나는 가마솥 목욕탕에서 목욕을 했다. 짚에서 나온 잿물이 미끈미끈하여 피부를 곱게 하였고 여물 남은 찌꺼기로 때를 벗겼다. 초저녁에 내가 목욕을 하고 밤이 깊으면 불을 넣고 다시 물을 끊여 이모들이 목욕을 했었다. 그리고는 부짓갱이로 재를 뒤지면 고구마는 껍질이 타지도 않고 속만 잘 익어 김이 모락모락 났었다. 불을 때는 동안 내내 아궁이에서 생솔이 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푸륵 푸륵 탁, 푸륵 푸륵 푸 부북 푹' 솔잎에 불이 이는 소리는 이렇게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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