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쫄병수첩

쫄병수첩

두칠이

65.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군바리 주제에 면회 온 아가씨를 마다하고 보내다니...... 이런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해가 서쪽에서 뜰지라도 그 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말하니 군바리도 인간이긴 하나보다. 그러니 이제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던 말년 여름이었다. 다 이야기에 적었듯이 무룡산 너 머 정자에 복무하던 시절이었다. 말년에 몸조심하라는 군대용어가 있었듯이 나는 그 해 10 월이면 제대하기로 되어있었다. 정문 초소에 연락이 왔다. 아가씨가 면회를 왔다는 것이다. 내 그 시절 나는 우리 중대본 부 왕 고참이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정문에서 면회할 일이 아니라 부대 내무반까지 불러들이 어 만날 수도 있었다. 휴일이라 말뚝들 다 영외로 가고 없는데 내가 왕이었지! 그런 세상에 아가씨가 면회를 왔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군대 3년 썩다보니 사회의 아가씨 는 씨가 말랐는데 어디 말라서 골아버린 남는 아가씨가 왔단 말인가?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 다. 사회에 날 아는 여자는 다 떠났고 또 군바리 시절 휴가 가서 사귄 아가씨는 귀대하면 끝장이 나기 마련이니 말이다. 분명히 알지 못하는 아가씨가 날 찾아왔다고 두 번 세 번 확인을 해도 틀림이 없어 나는 전화로 아가씨랑 통화를 했다. 정문 내 졸병은 내가 괜히 심통을 부린다고 짜장 킥킥거리며 놀리는 것이었다. 아뿔싸! 이런 잊혀진 여인, 사라진 여인이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내가 스무 살이 되 던 해 가을 진주행 열차에서 만난 동갑내기 아가씨였다. 그녀는 부산에서 나는 마산에서 진 주 가는 기차에서 동석을 하여 알게 되었다. 우린 다 같이 진주 개천 예술제 구경을 가는 스무 살 젊은 청춘들이었다. 그래서 그 날 내내 진주서 어울려 다니다 밤이 깊어 우린 남강 백사장 모래밭에서 10월의 새벽 추위에 떨며 한 밤을 같이 세웠다. 10월의 한 낮의 옷차림으로 새벽을 지 세운 것은 그 젊음의 열기가 그 때는 살아있었다. 그녀는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우린 손 한번 맞잡아보질 못했다. 모래로 원숭이를 만들기도 하고 성을 쌓기도 하며 날이 세길 기다린 밤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린 헤어졌고 그 후 몇 번의 편지가 오고 갔을 뿐 세월이 지나니 그만 잊고 만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날 찾아온 것이다. 1976년이니 우리 나이 스물 넷이었다. 그녀를 보니 기억이 났었다. 여길 어떻게 알고 왔을까? 난 왜 왔는지 보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하는 궁금증이 더 일었다. 그러나 군바리 이 두칠이도 치마 입은 아가씨라 반갑긴 반가웠다. 아는 아가씨가 날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러했었다. 난 그녀를 데리고 바닷가 한적한 식당으로 가야하는 데 그녀는 한사코 산허리에 노송이 자리한 잔디밭으로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이끄는 데로 소나무 숲 아래 무덤가로 갔었다. 그녀는 주름진 통 넓 은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 시절에 별로 유행에도 맞지 않는 독특한 차림 이었다. 그녀는 변해 보였다. 얼굴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있었고 큰 키가 불어난 체격에 묻혀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찾아왔는지 물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녀가 무얼 원하는지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군바리에게 어디 빼앗길 것도 없고 흥정에 손 해 볼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로지 거래가 생기면 이득밖에 없으니 이건 잡아둔 당상이었 다. 우리 집에 편지의 주소를 들고 찾아갔단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도 만나고 내 아우가 형님 사귀는 여자구나 싶어 알려준 것이다. 부산서 여기 울산은 멀지 않은 거리이니 아침에 나서 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나중에 아우에게 물었더니 형수 감으로 합격이라 어서 보냈다고 능청을 떨었다. 그녀가 날 찾아온 이유는 이러했다. 그 동안 마땅한 남자를 못 만났다는 것이고 이제 결 혼 적령기에 들어서니 집에서 소개한 중매결혼을 해야 하는데 내가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 내가 자길 원하고 있다면 나와 결혼하겠다고 나의 의사를 확인하고자 왔다는 것 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아무리 그녀의 이상형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아직은 아가씨가 다짜고짜로 나랑 결혼 할 의사가 있느냐고 있다면 기다려서라도 결혼하겠다는 일종의 청혼이었다. 그러니 난 여자 의 청혼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누가 물을 일도 없지마는 묻는다면 있다고 해야 할 일이다. 나에게 그녀는 까맣게 잊혀진 여자였고 또 그 자리에서 다시 보아도 마음에 드는 인상이 아 니었다. 아무리 군바리 주제지만 이건 아니었다. 어느 정도만 받쳐주었다면 혹 흑심이 생겨서 좋다고 승낙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녀 는 아무리 뜯어보아도 아니었다. 나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아니라고 고 개를 흔들어 보이는 대신에 난 결혼할 나이가 아니라고 그리고 아직 학교도 남았고 또 우리 가 서로를 기다릴 만큼 정이 깊은 것이 아닌데......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으로 군바리 입에 굴러 들어온 밥을 나는 마다하고 말았 다. 그녀를 그 날 하오 버스로 떠나보냈다. 그녀는 그렇게 비통해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기 대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마땅찮은 결혼하려니 마음의 방황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추억 속에 묻힌 남자 한번 만나서 확인이나 해 보자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용 기는 참 대단하였다. 그게 인생일까? 여자의 용기일까? 그녀는 아마 맞선 본 남자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이제 다 옛 일이 되었다. 나에게 그녀가 이런 추억이듯이 그녀에게 나도 추억일 뿐이다. 이제 우리들은 이런 추억을 먹고사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남아............ 2000. 12월에.... 사천에서 두칠이 이학근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