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정자의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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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아가씨 이름인가 하겠다. 정자는 울산 땅 무룡산 너머 해안 마을 이름이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라고 내가 장황하게 설을 풀 것도 없이 한번 가 보시라. 모르지 그 때 같지는 안 을지도... 하지만 변해본들 바다야 어찌 변하겠는가? 여기 저기 모텔인가 러브호텔인가는 많 이 들어왔다고 하드만.
내 요즈음은 모르겠고 그 1976년도 봄여름 가을철의 정자의 정체에 대하여서는 잘 안다. 정자하면 지금도 생각나는 게 몇 가지가 있다. 스무살 청춘에 남강 백사장에서 하룻밤 지새운 아가씨가 자기 결혼한다는데 내 의향이 어 떤지 물어 물어 찾아왔던 곳이고 둘째는 하고 한날 해가 뜨면 연병장 학교 운동장으로 공 찬다고 뛰어다니던 곳이고 마지막으로 내 발에 무좀이 드디어 덧이 나서 발가락을 잘라야 말아야 하는 수술을 받았던 곳이다. 그런 정자는 참으로 이름보다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자에서 감포까지의 바닷가에는 포 근하고 아늑한 반원형의 해수욕장도 있었고 바닷가 갯바위들의 奇岩들이 아름답게 서서 바 다를 쳐다보며, 바위사이로 솟아난 소나무가 아름다운 포구를 만든 곳도 있었다. 버스길을 따라 가다보면 작은 어촌마을 앞에는 나룻배들이 물결에 시름없이 흔들리며 졸음 겨운 할머 니가 돌담 곁 햇살아래서 긴 담배 대를 드리고 앉아있었다. 이따금씩 철모에 위장망 조끼를 입고 통일화 신발에 소총 한 자루 어깨에 맨 젊은 병사가 밥통을 들고 지나가는 일이 하루 의 모습인 그런 너무도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 해 여름 우리들은 오후 5시에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긴 해를 벗삼아 부대 아래 정자 초등학교로 공 하나 들고 갔다. 그리고 한시간씩 러닝 다 벗고 공을 찼다. 그 시절의 우리들 의 낙은 하루의 마무리는 공 차는 일이었다. 나는 그 일에 주동이었다. 내가 내무반의 왕 고 참이 되었고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내 취향대로 이끌었다. 이런 일에 제일 못 마땅하게 생 각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인사계 김상사였다. 우리들은 5시면 저녁 먹고 중대 상황실에 졸병 앉혀놓고 우리들이 할 일이란 게 별로 없 기 때문에 그로써도 굳이 못하게 말린 이유가 없었다. 그저 졸병들 배 터지게 노는 게 눈에 거슬리는 놀부 심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그의 트집은 우리가 부대에서 학교까지 이동 군 기가 나쁘다는 둥 복장이 불량하다는 둥 그런 핑계를 대긴 했으나 우리는 끈질기게 놀았다.
어느 날 우리들은 내기 축구시합을 했다. 우리 중대 내 졸병 손 상병은 축구에 달인같이 뛰어 다녔다. 경주 건천이 고향이라는 그 녀석은 건대 축대를 졸업하고 왔으니 나보다 나이 가 많았지 싶다만 그는 나에게 애송이 졸병에 새까만 졸병에 말 잘 듣는 졸병이었다. 그가 날 보고 한번도 나이 많은 기색을 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낼 수도 없었다. 졸병은 형님도 선배도 졸병일 뿐이지 다른 모습이란 없었다. 그 손 상병은 상대 골대 앞에서 나에게 밀어 넣으라고 공을 살짝 내어 주었다. 나는 잘 차는 손 상병이 그냥 슛을 칠 줄 알았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공이 나에게 흘러나온 것이었다. 나는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만 상대에 게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내가 그 공을 실수하여 우리가 지고 말았다. 아이고 억울하고 원통하여라. 나는 그 날 우리편이 낼 간식비를 통 채로 내었다. 그리고 우리편에게 사과를 했다. 나의 부족을 말 이다. 우린 참으로 지독히도 열심히 공차기를 했다. 그 가을 날 내가 전역하는 그날까지 나 는 공을 찼다.
내가 고참이 되어보니 고참은 참으로 신기하도록 신나는 직위였다. 세상의 모든 이들은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양 아름답고 즐겁고 멋진 하루하루였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노 는 것 다 준비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백수건달에 귀공자 노릇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늘 보고 바다보다 낮잠 자다 하루해가 저물면 축구 게임 한바탕 하고 저녁이면 어디 좋은 자리 봐서 술상 차례 마시다 자면 되었다. 빨래 걱정, 사역 걱정, 보초 걱정, 순찰 걱정, 이런 모 든 것으로부터 해방이었다. 특히 중대 본부 행정병은 여러 가지 특혜가 있었다. 바로 소대장 또는 분대장으로부터 일체의 간섭이 없다. 다만 인사계와 중대장의 명령만 받고 살았다.
그 아름다운 해변 정자 바닷가에서 보낸 그 말년의 여름과 가을날은 지나간 내 졸병의 고 생과 힘듦과 아픈 상흔을 치료하고 보상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다만 내 흘러버린 청춘 에 대한 보상과 고무신 거꾸로 신어버린 순이에 대한 상처는 끝내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생의 길이 그러할 진데 아쉬워하고 가슴 아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세월은 흘러가는 것, 흐르는 세월 속에 우리도 흘러가는 것. 흐르다 흐르다 인생은 끝나버린 연극 같은 한 세상이라는 걸 알자 죽고 마는 꿈 같고 덧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 아니던가! 이제 와서 정자의 그 시절을 그리워는 할지라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 않는가 말이다. 언제 다시 한번 그 시절이야 못 돌아가지만 그 곳에는 가 볼 수 있으리다. 정자의 아름다운 그 해 여름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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