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쫄병수첩

쫄병수첩

두칠이

54. 태풍불어 좋은 날



	일년 삼백육십오일 해안 초소에 보초 안 서는 날은 없다. 설이고 추석이고 광복절이고 국 군의 날이고 초병이 쉬는 날 노는 날은 없다. 어디 해안 초소만 그러하겠는가? 휴전선 155 마일을 지키는 초병도 그러하고 하늘과 바다를 지키는 군인도 그러하다. 그런 군인인데 우 리 해안 초소의 초병에게 쉬는 날 노는 날이 있었다. 바다가 뒤집어지는 날. 파도가 온 천지를 다 삼키듯 밀려오는 날. 바로 태풍이 불어주는 날, 우리는 해안 경계를 철수하고 분초에서 태풍이 노는 모습을 구경하며 쉬었다. 한 자락씩 한 박자씩 밀려오고 밀려가던 파도는 성난 해룡이 되었고 그 파도에 고운 살결 뒤척이던 해변도 자취를 감추고 하늘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뇌성번개를 치고 비는 밤새워 와주는 태풍이 지나가는 날 해안 분초 우리 초병에게는 바로 잔치 날이었다. 혹 태풍에 파도에 성난 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혹 방파제에 부서지는 해일을 본 적은 있 는가? 물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바람도 불도 물만 못하다. 우리 옛말에 三災이라는 말이 있 다. 바로 물 불 바람이다. 水災, 火災, 風災인데 이중 제일로 무서운 것이 바로 水災이다. 바람은 지나가는 길목만 피하면 된다. 그리고 화재가 지나간 뒤 불탄 자리는 남는다. 그러 나 수재가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수재만은 피하라, 시체 도 뼈도 못 찾는 것이 수재가 아니던가. 태풍이 파도를 몰고 해안을 들이치면 우린 모두 우리의 숙소인 분초에 피신을 했다. 분초 의 위치가 마땅하지 못하면 이 분초도 파도 한방 해일 한 자락에 쓸어 없어지고 만다. 지붕 엔 돌로 올리고 파도가 못 오는 위치에 수년동안 경험으로 위치를 정했기에 분초만은 어떤 태풍이 불어도 안전했다. 그 바람이 불고 비가 밤새워 오는 날, 해안의 갯바위가 거침 파도에 시린 이빨을 다 부시 어 버리던 밤, 우리 초병들은 분초에서 술잔치가 벌어진다. 이 날은 아예 공식적으로 분초 자율에 맡기어 쉬는 날이었다. 분초마다 멋진 잔치 준비를 했다. 이 날은 사령부 순찰도 중 대장 순찰도 없다. 괜히 초병들 해안으로 못 나가도록 부탁을 하는 날이었다. 쥐도 새도 모 르게 파도에 쓸리면 없어지고 만다. 간첩도 이런 날은 파도에 태풍에 수장이 되고 말 것이 다. 우리 졸병은 태풍불어 좋은 날 이날에는 마음껏 마음놓고 술을 마셨다. 졸병이 어디 고참 들 앞에서 술 마실 기회가 일년에 한두 번이나 있었던가. 그 밤, 그 비바람소리 속에서 하늘 이 무너지고 바다가 부서지고 천지가 개벽하는 그 날, 우리들은 밤새워 술판을 벌리고 침상 에서 노래부르고 늴리리 맘보에 트위스트 차차차로 춤추며 놀이판을 벌인다. 그런데 그 놀 이판에 지금 와서 기억해보니 아가씨는 없었다. 날이 좋고 별이 좋은 날은 찾아와 주던 해 안의 아가씨들도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들치면 집밖으로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불문 율인지 모르지만 이런 신나는 놀이판에 여자는 없었다. 부어라 마셔라... 이넘의 군대생활, 가거라 삼팔선아, 비 내리는 호남선, 이별의 부산정거장 을 부르며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우리들은 군가를 불렀다. 소위 중위 대위는 찝차 도둑놈 하사 중사 상사는 일종 도둑놈 불쌍하다 육군 졸병 짠밥 도둑놈 그러다 드디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 화랑담배 연기 속에 쓰러진 전우야! 부르다 어떤 녀석은 울음을 터뜨린다. 군인의 길이, 남아의 길이, 인생의 길이 어디에 있다고 하드냐. 우리는 오직 개구리복 입고 고향 앞으로, 우리 순이가 기다리는 꽃피는 내 고향, 내 형제 내 부모님이 사시는 고향으로 가는 꿈만이 우리가 이 고생을 극복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날이 새고 비가 그치고 하늘이 바다가 다시 푸르면 우리들은 태풍이 밤새 핥기고 간 바닷 가 우리의 초소와 철조망 교통호를 보수하고 정비하여야 했다. 어제 밤 술 마시고 노래하면 춤을 추었던 기억이랑 다 잊고 이제 다시 참호 속의 초병이 되어 밤을 지키며 살았다. 혹 운이 좋아 금년이 가기 전에 한차례 더 태풍이라도 쌍 태풍이라도 불어와 준다면 이런 운수대통이 어디 있느냐고 깨 춤을 출 일이었다. 태풍아 불어와라 바다가 무너지고 돌담이 다 무너져도 좋다. 바람아 불어라 분초에 올려둔 폐타이어가 날아가고 문간에 세어둔 비목의 목가지가 부러져도 좋다. 그 시절 우리들에게는 바람불어 좋은날이란 말처럼 태풍불어 좋은 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