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冊) 버 러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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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보는 사람을 일컬어 왜 "책 벌레"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책벌레 라는 소리를 가끔 들어왔다.
옛말에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 하여 남자는 모름지기 수레 다섯에 실을만한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기준으로 말하면 트럭 다섯대에 실을 정도의 책일 것이다.
내가 근 20여년 모은 책이 라면박스로 50박스 가량 되지만 기껏해야 트럭 한대 분인데 그나마도 지난번 이사 때에 김매듯 상당수를 솎아냈으니, 책벌레 라기 보다는 내게 적합한 호칭은 그보다 낮은말인 "책 버러지"로 해 두는 편이 훨씬 걸맞다.
언제인가 내 집을 방문한 분이 넌지시 물었다.
"바쁜 미국 생활에 저 많은 책을 다 읽었읍니까?"
"바쁜"이란 말과 "다 읽었느냐?"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미국 생활, 하면 으례히 "바쁜" 이란 형용사가 붙는 데, 그말이 우리를 심리적으로 불안하게하여 실제로 시간이 좀 있어도 어영부영 흘려 보내게 한다.
여가(餘暇)란 남아 도는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 자체는 바쁘거나 한가하지도 않다.
시간은 정확히 일초 일초 가고 있을 뿐이고, 호들갑을 떨며 바쁜것은 우리 자신일 뿐이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비집고 있는 틈, 바로 그 "시간의 짬"이 한가한 시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많다.
바로 망중한(忙中閑), 그러니까 바쁜 가운데 끼어있는 한가로움을 찾아 독서를 해야 한다.
책에 따라 정독할 책과 속독할 책이 있지만, 이런 시간의 짬을 이용하여 읽을 책은 비교적 내용이 가볍고 흥미로운 소설책이나, 수필집, 시집이 좋다.
그리고 그 시간의 짬이라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을수 있기 때문에 읽을 책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이 필요하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에, 또는 버스를 기다릴 때, 약국에서 10여분 기다려야 할때, 화장실에서, 점심 시간에, 이렇게 시간의 짬은 생각했던것 보다 훨씬 많이 우리의 주위에 버려져 있다.
그런 시간의 틈을 타서 다만 몇줄 이건, 한장이건 책을 틈틈이 읽는 것이다.
"다 읽었느냐"는 물음은 나의 좋지 않은 독서 습관을 지적하는듯 하여 가슴이 뜨끔했다.
"다 읽은 책이 하나도 없고, 그렇다고 읽지 않은 책이 하나도 없읍니다."
책 버러지의 어정쩡한 대답이었다.
나의 나쁜 독서습관이란 한꺼번에 서너권의 책을 동시에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 몇장 읽고 귀 접어두고, 저 책 한 두시간 읽고 귀 접어 두고, 그러다 보면 책들이 내 주변에 널려 있게 마련인데, 손님이라도 오면 나는 그런 헤프닝을 "질서 있는 무질서"라고 농담으로 너저분한 환경을 얼버무린다.
하기야 무슨 책을 어디쯤 읽고 귀접어 두었다는것을 대충 기억 하니까 책을 정돈하면 내 "혼란속의 질서"가 파괴 되고 마는 것이다.
새 책을 구입하면 책의 서문(序文)은 꼭 읽으니까 안읽은 책이 한권도 없다고 억지춘향이의 변명도 가능하다.
새해에는 한달에 한권 정도의 책을 읽기로 했다.
그래야 일년에 고작 열두권 이지만, 한달에 한권의 책을 읽는것도 수월찮은 일이라는 것을 작년 한해 동안 실제로 당해봤다.
98년 일월달에 읽을 책으로 내가 선택한 책은 Alexs Pate의 "아미스테드(Amistad)"이다.
내 습관대로 이와 곁드려 읽으려고 서가(書 架)에서 뽑아낸 책들로는 Frank H.Tucker 교수의 "백인의 양심"(The white conscience), 그리고 Alphonso Pinkney교수의 "미국식 폭력"(The American way of violence)이다.
이 책들은 한 15년전 쯤에 귀 접어놀 틈도 없이 밤새워 완독했던 책들이다.
그때 내가 느낀것은 아름다운 나라 미국, 그 역 사의 뒤안길에서 저질 렀던, 인디언 말살, 노예제도, 인종차별등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장(障)이 학자적 양심으로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는데 놀랐다.
번역서가 없는것이 유감이지만, 학생분들 그리고 양서(洋書)를 이해 하시는분들께 "아미스테드"와 함께 위의 책들을 권해 드리고 싶다.
무턱대고 바쁘다는 핑게부터 대는 우리가 문제이지, 주위에는 좋은 책들이 있고 시간의 짬이 얼마던지 있다.
틈틈이, 짬짬이, 책을 읽어 마음을 살찌게 하자.
마음이야 아무리 살이 찐다해도 건강에 해롭지 않으니까 말이다.
98년도에는 책읽을 틈을 더 많이 찾아서,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 속에 접혀 있는 귀를 펴주고 "책 버러지"에서 "책 벌레"로 승격을 해야 겠다.
레디오 한국 "차 한잔의 대화" 에 기고
有想 (생활불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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