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겨울에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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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 몰래 앓고 있는 병(病)이 있다.
다분이 심인성(心因性)이기 때문에 남의 눈에 띄지 않아 내 병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병명은 음치(音癡) 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손꼽을 정도고 그나마 맨정신이 아니라 술잔이나 마셔 얼큰해져서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 노래 못 부르는 배냇 병신인 것이다.
사랑 빼놓고는 돈도 명예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으나, 삶의 멋을 한껏 부려보며 살려는 사람인데 노래를 못 부른다는 것은 약에 감초가 빠진거나 다름이 없다.
춤은 몇 스텝 밟을 줄 안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춤을 출줄 아는 사람이 노래를 왜 못 부르냐고 의아해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내 스스로도 의문스럽다.
성악을 전공한 분의 진단에 의하면 음치는 아니라고 하니까 다소 안심이 되고 희망을 갖는다만, 노래를 부를라 치면 작곡 작사를 내 맘대로 해 버리니 그것이 문제다.
성량(聲量)은 큰 편이나 박자가 엉망이고, 게다가 몇줄 않되는 노래말을 잊어 버린다.
그렇다고 치매증이 있는것도 아니다.
근 한시간 가까이 염불(念佛)을 줄줄 외우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노래하고는 무슨 상극수(相剋數)라도 있는 모양이다.
비라도 내리고,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날에는 가끔 노래를 부를수 있는 시설이 있는 테번(Tavern)에 들른다.
그러나 노래하면 주눅 부터 드니까 구석 테블에 앉아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멀뚱이 바라볼 뿐이다.
"저렇게 속 시원히 노래 한번 부를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부럽기 짝이 없다.
한 4년전 쯤의 일이지만 고놈의 음치병을 고쳐 보겠다고 단단히 마음 먹고, 노래 하나를 택해서 되풀이해 부르기 시작했다.
음치의 첫 노래로서는 너무 어려운 곡 이라는 충고도 있었지만 노래말이 맘에 들어서 그냥 그걸로 계속 부르기로 작정했다.
차 안에서 부르고, 산책을 하면서도 불렀다.
심지어는 매화(梅花)타령을 하면서도 웅얼 웅얼 불렀다.
타령을 하면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수 있냐고 의심이 가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매화란 꽃이 아니라 배설을 말한다.
그러니까 측간(厠間), 요즘 말로 화장실에서 거시기를 보는것을 궁중(宮中)언어로 매화타령 이라고 한다.
발가숭이가 되서도 부른다.
노래 연습을 하면서 옷은 왜 홀랑 벗느냐고 또 의문이 가겠지만 옷 입고 목욕하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욕조에 받아논 따끈한 물속에 몸을 푹 잠그고 노래를 부르면 제법 그럴사하게 곡조가 잡힌다.
내 노래솜씨가 제일 좋을때가 핫 베스(Hot Bath)를 할때 인것이다.
알몸이 되어야 노래가 제대로 나오니 그것도 딱한 노릇이다.
하여간 이렇게 땀나는 노력을 하며 따라 부르기를 어림잡아 300 회는 더 한듯 싶다.
몇해전, 12월 어느날 밤 나는 드디어 데뷔(Debut)? 를 하게 됐다.
TV 스크린에 나오는 노래말을 따라 정신없이 불렀다.
이게 왠일인가? 노래가 끝나자 박수 소리가 들려 왔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잘했다고 치는 박수인지 야유조로 치는 박수인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감탄스런 표정으로 보아 진짜 갈채(喝采)임을 확인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드디어 평생의 숙원인 음치병을 고치고 만것이다.
그후 필요하다면 한곡조 멋드러지게 뽑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흐믓해 하며 지내왔다.
몇주전 일이다.
"차 한잔의 대화"에서 바로 내 데뷔곡이 흘러 나오는것이 아닌가.
반가운 마음으로 따라 부르기 시작 했다.
그러나 곧 실망하고 말았다.
가사도 더듬거리고 곡조도 엉망이 었다.
아뿔사! 고놈의 음치병이 다시 도졌구나!
이번에는 아예 뿌리를 뽑아야 겠다.
30여년을 마셔오던 술도 딱 끊었고, 맑은 정신에 창가(唱歌)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매화타령 하면서, 발가숭이로, 자나깨나 부른다.
잠꼬대도 노래로 할 정도로 열심히 부른다.
차 한잔의 대화 담당자님, 내 연습곡인 최백호씨의 "내마음 갈곳을 몰라" 들려 주시겠습니까?
적나라(赤裸裸)하게 한곡조 멋드러지게 뽑으면서 하얀겨울에 97년을 떠나보내렵니다.*
레디오 한국에 기고 -10- 1997.12.22.
有想 伽羅越 合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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