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더이상 치열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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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은 날씨가 얼마나 매서운지 바람이 차서 뼈속까지 찬 기운
이 스며 드는 게 겨울날씨 답다. 게다가 오늘 아침은 어제보다 더 기
온이 내려가서 세상 모든게 꽁꽁 얼어 붙었는지 길에 사람하나 다닌
흔적없이 고요하다. 아침에 학교 간다고 나오는 딸아이를 보니 어제
날씨가 추워서인지 코트를 걸치고 나오는데 아랫종아리는 얇은 스타
킹 하나 신은게 전부다. 그렇게 입고서 다리가 다 얼겠다 말하니 엄
마말처럼 멋 부리다 얼어 죽을라꼬 아무것도 안신고 다니는 아이들
이 천지란다. 오매, 모질기도 해라! 엄동설한 이 추위에 맨종아리를
내놓고 다닌다니... 내게는 겨울코트에 얽힌 기막힌 사연이 한가지 있
다.
중학교 다닐때다. 그때는 겨울이 요즘보다 더 추워서 방안에 둔 물도
꽁꽁 얼 정도였는데 우리는 해방전에 일본인이 관사로 쓰던 집에 살
았다. 마당도 넓고 나무도 많았고 도꼬노마 인가 이름도 잘 모르는
그런 장식단도 있고 방마다 커다란 오시래가 달린 집이었는데 언니
방 오시래에는 울 언니옷들이 빼곡빼곡 들어 차 있었다. 복도가 길어
서 좀 캄캄하긴 했어도 봄이면 노란 줄장미가 가을에는 낙엽을 태워
목욕물을 데우는 구식 목욕탕도 있어 별 불만 없이 살았다. 엄마는
늘상 아파 누워 있었기에 집안 살림은 언니가 도맡아 했다. 언니는
나보다 아홉살이 많았으니 꽃다운 처녀시절이다. 늘 허약했던 엄마는
수술을 받고나서 자리에 누워 몇 달씩이나 일어나질 못했다. 언니혼
자 우리 오남매에 부모님까지 일곱식구의 살림을 혼자 맡아하기는
힘이 들었던지 아뭏든 누군가 와서 틈틈이 도와주기도 하고 어떻게
해서든 집안은 그런대로 잘 돌아갔다. 그때 난 중학생이었으니 지금
우리 딸보다는 좀더 철이 든 것 같은데 그건 내생각만인지 모르겠다.
암튼 겨울이 왔고 날씨가 추워졌고 내게도 학교 다닐때 입을 오버코
트가 필요했다. 그때 중학생은 교복으로 바지를 입고 다녔는대 그래
도 왜그런지 아침저녁 학교가는 길이 너무 추워서 나는 엄마에게 오
버가 필요하다고 다른아이들도 다 입고 다닌다고 했던거 같다. 엄마
도 내가 중학생이 되었으니 교복위에 덧입고 다닐 코트가 필요하단
걸 인정하셨다. 겨울이 깊어가서 다른 아이들은 모두들 허리가 잘록
들어간 날씬한 에이라인의 검은 오버를 입고 학교엘 다녔다. 엄마는
언니하고 같이 가서 코트를 맞추라고 했는데 우리 언니는 겨울이 깊
어가도 코트를 맞춰 줄 생각을 토옹 안하는거다. 그때만해도 기성복
이란게 없었으니까 옷이란 옷은 모두 양장점에 가서 맞춰 입었다. 나
는 춥다고 빨리 오버를 맞춰 달라고 성화를 부리고 느려터진 우리
언니는 차일피일 미루기만하고... 울 언니하고 나하고는 태어날 때부
터 성격이 물과 불이다. 얼마나 졸랐을까 드디어 어느날 밤. 언니는
나를 데리고 양장점엘 갔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보니 언니가 단골로
가는 일류양장점도 아니고 동네에 있는 이류 양장점도 아니고 생전
알지도 못하는 저 변두리 어디로 나를 자꾸만 끌고 가는 것이다.
다 찌그러질거 같은 양장점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머리에 실밥을 숭숭
붙인 주인 아줌마는 치수부터 재야 한다며 내몸 구석구석을 쟀다. 아
줌마와 우리 언니는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끝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고 나는 견본으로 널려 있는 패션잡지들을 들척여 최신형
의 오버 디자인 하나를 골라 내밀며 꼭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기대
에 부푼 말을 꺼냈다. 양장점 아줌마는 언니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
을 지으며 사이즈도 다른데다 남은천이 전혀 없어서 오버 모양을 그
렇게 만들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왜 천이 부족하냐
고 천은 내일 시장가서 떠오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아줌마 우리언
니 눈치를 자꾸만 보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다 헐어
빠진 양장점에 것두 오밤중에 데리고 갈때부터 알아봐야 하는건데.
알고보니 울언니는 자기가 학교 다닐때 입던 헌오버를 그 아줌마에
게 미리 갖다주고는 내 치수에 맞게 뒤집어 박아 달라고 했던 것이
다. 천을 뒤집는 이유는 헌옷이라 닳았을테니 뒤집어 박으면 그래도
좀 새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속이 상해 그집을 나와 버
렸고 난생처음 가본 동네를 헤매다 걸어서 겨우 우리집까지 왔다. 며
칠뒤 오버를 찾으러 가자는 언니. 나는 가지 않았고 며칠뒤 언니는
그 꼴도 보기 싫은 오버를 찾아다가 보란 듯이 내방 벽에다 걸어 두
었다. 그러는사이 겨울은 자꾸만 깊어갔고 그당시 학교교실은 난방도
부실해서 얼마나 추웠던지 할수 없이 그 꼴도 보기싫은 오버를 입고
학교엘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서 날씨가 조금만 따뜻해도 난 절대 그
오버를 입지 않았다. 오버를 입어야 할만큼 추운날에는 집앞 버스 정
류소에서 아버지가 출근하실 때까지 기다렸다 차를 얻어 탔다.
나는 그 오버를 입고 버스타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 당시 오버의 유
행은 허리선이 살짝 들어가고 오버단추를 제천으로 싼 조그만 단추
가 유행이었는데 언니가 다시 가공해서 만들어준 오버는 언니가 학
교다닐 당시에 유행하던 내얼굴 보다 몇배나 넓적한 칼라와 왕눈깔
사탕보다 훨씬 더 큰 시커먼 단추가 네 개 달린 푸대자루 같은 꼴이었다.
게다가 울 언니는 나보다 키가 훨씬 컸다. 내가 병아리 우장 쓴 몰골로 버스에 올라 타면 버스 구석 여기저기에서 감탄하는 아줌마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옴마야, 시상에 니 저 오버 기억하재? 우리 학교 다닐 때 유행이구
마는! 저끼 어디 있다 지금 나왔이꼬? 옛추억에 잠겨 어쩔줄 모르며
수다 떠는 아줌마들. 아줌마들이란게 버스에서 비밀스런 얘기 주고받
을 사람들은 못 되는지라 그쯤되면 버스안의 모든 승객들은 흘금흘
금 내 오버를 쳐다보면서 흠 저게 그 문제의 구식 오버란 말이지 하
며 내가 무슨 성냥팔이 소녀라도 되는 양 동정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그럴때의 그 챙피함이란... 그런데두 나는 그오버를 삼년동안이 아니
라 고등학교 이학년이 될때까지 입고 다녔다. 그 지긋지긋함을 어떻
게 설명 할수 있을까! 우리집이 찢어지게 가난했거나 울 엄마가 계
모였거나 언제 죽을지 모르게 아프지 않았더라면 난 그때 정말이지
그 오버 때문에 가출 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우리아이들에게 그 오버얘기를 하면 아이들은 킬킬 웃는다. 이모 등살에 살아남은 엄마가 대견해서인지 어쩌는지 배꼽잡고 웃어댄다. 조금만 날이 추워 울 딸에게 오버 입으란 소릴 하면 우리딸은 내 입을 막으면서 "엄마, 또 그 오버 얘기 할려고 그러지!"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초등학교
를 서울에서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해 한달반 정도 다니다 전학을
했다. 중학교 입학식날 내가 다니던 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는데 중,
고 대학이 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학식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했는데 입학식날 아침 나는 교복도 입지 못하고
학교에 갔다. 알고보니 교복을 입지 않은 아이는 전교에서 딱한명 오
직 나였다.
나는 아버지의 힘을 빌리고 울 언니와의 힘겨운 투쟁 끝
에 간신히 교복을 마련했서 입고 다닐수 있었는데 전학을 하면서 못
입게 된 그 교복은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낡은 옷장속을 깨
치고 나와 내몸에 걸쳐졌다. 내가 아무리 자라지 않았다쳐도 중학교
일학년이 입었던 그 교복은 고등학생이 된 그때까지도 내게 전혀 작
지 않았으니 중학생이 되자마자 세종로에서 북가좌동까지 40분동안
버스를 타고 다니며 나는 주체할수 없이 컸던 그 교복 때문에 버스
를 타고내리며 꼬꾸라질뻔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고등
학교 이학년이 되자 내 교복치마는 가방에 스치어 다 닳아 헤졌고
치마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다. 울 언니는 구멍난 부분을 시꺼먼 천
으로 숭숭 기워 주었다. 내교복치마가 곤색이었으니
덧대어 기운 부분은 십리밖에서 봐도 금방 표가 났다. 나는 그치마를
고등학교 삼학년이 될 때 까지 입었다.
우리언니와 나는 친자매이다. 내게는 교복이외에 원피스 몇벌과 외출
용 코트도 있었고 비록 동네 양화점에서 였다해도 가죽으로 만든 반
짝거리는 구두와 핸드백도 있었다. 물론 모두 우리 언니가 맞춰주고
사 준 것들이다. 왜그런지 우리언니와 나의 관계는 늘 그런식이었다.
꼴도 보기 싫었던 그 지긋지긋한 오버와 흥부네 딸같은 교복치마 때
문에 나는 참 배운게 많다. 내게 자아라는게 생기기 시작한 날부터
언니가 죽을때까지의 그 긴 시간동안을 나와 언니는 평생을 대립하
며 살았다. 인생관 가치관 사소한 습관과 버릇. 사람들을 대하고 사
물을 대하는 시각들까지 우린 모든 것이 정반대였으니 내 인생의 스
승은 우리언니라 할수 있다. 그 오버를 입고 다닐때 나는 사춘기였고
이쁘지도 상냥하지도 않은데다 뭐 하나 잘하는 것도 없었다.
처음 한동안 낡은 오버를 입고 다니면서 받았던 불편했던 사람들의
시선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점차 무디어졌다. 내가 그
낡은 오버를 입고 다니던 시절은 좋은 옷감들이 많이 나올때라 어지
간히 가난한 사람이 아니면 기운 옷을 입고 다니지 않았다. 겨울에는
낡은 코트 때문에 봄 가을에는 낡은 교복치마 때문에 가난한 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인심이 어떠한지 어떤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을 가
졌는지 일찍이 터득 했으니 나는 우리 언니 덕분에 돈주고도 못 살
귀중한 체험을 한 셈이다. 우리 언니로써는 사사건건 제 주장을 고집
하는 동생의 고집을 꺾어놓기 위한 손쉬운 방편이었는지 모르지만
내게는 굴욕을 이기는 오기와 끈질긴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나는 대학을 다니며 몇가지 아르바이트를 했고 결혼하기 전까지 갖가지 세상
경험들을 해보고 싶어 여러 단체에 발을 디밀기도 하고 다소 엉뚱한
일에 뛰어들기도 했었다. 뒤돌아보니 그때 그 낡은 오버를 입고 버
틸수 있었던 오기가 내게 인생이 무언지 아주 일찌기 깨닫게 해준
스승이 아닌가 싶다. 언니는 몇 년전에 죽었다. 내 삶은 우리언니가
죽은 이후 더 이상 치열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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