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집-이상원

이상원

내가 서있는 길



	어느날 문득 단테가 자신이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에 버려졌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고 두려워하였다고 하듯이, 나에게도 한때 그의 고백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어둠 속에 버려져 있다고 느끼던 때가 없지 않았다. 오래전 기억이고 별로 중요한 추억이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뭐..그러하였다. 태초에 신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카인에게도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캐물으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버질의 손길도, 신의 물음도 없었다. 어느 순간 문득, 나는 숲 한가운데 버려진 어린아이와 같이 어두움에 겁먹고 외로움에 슬퍼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위협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너의 손발은 짧다. 너의 눈은 어둡다. 숲은 무서운 것들로 가득차 있지. 네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은 이 숲의 가장 무서운 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너, 그걸 아니? 이 숲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네 마음 속의 두려움이야." 그것은 지난 일. 한때 나는 자그마한 샛길을 발견하고 우선 길이 향하는 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길은 좁고 먼지투성이이지만 머리 위엔 하늘, 귓가엔 새소리를 들으며 그날의 몫을 살아간다. 인생은 지도 없는 여행, 사랑은 나의 건강이라 다짐하며, 잘못 들어선 길들이 모여 지도를 만드는 것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걷는 길 위의 한 점에 나는 서 있었다. 때로 더이상 가려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는 지친 여행자도 보았고, 혹은 이 길은 끝이 없는 미로일 뿐, 곤한 여행을 마친 뒤 시원한 나무그늘에서의 휴식이란 애초에 없었다는 늙은 길손의 탄식을 듣기도 하였다. 혹은 이리 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며 여러 샛길을 버려두고 한 사람의 선지자를 따라 우루루 몰려가는 군중들도 보았다. 때로는 그들을 따라 가 보기도 했지만, 그들이 저 길은 아니라며 내버려두는 작은 길들이 마음에 남아, 때로는 후회가 되고 아쉬움과 슬픔이 되었다. 누군가는 높은 산등성이에 앉아 별을 머리 위에 이고 발밑으로 바다를 굽어보며, 한쪽 구석 내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 작은 숲을 한켠에 치워두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길이 끝나는 곳이라 하여 모두들 두려워하는 곳이라도 가보면 또 다른 삶의 방식에 불과할 지도 모르는 일, 짧은 손발과 어두운 눈을 가진 내가 저어하고 머뭇거리며 어슬프게 더듬거리고 다니는 것을, 밝은 눈과 오랜 지혜를 가진 그의 눈으로 본다면 우습고 하찮을 수 밖에 없으리라. 때로는 그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대, 번갯불로 하늘을 가르고 바다를 호령하는 자여, 나를 경멸하지 말라. 내 비록 어둡고 약하나, 언젠가는 매의 눈을 가지고 長松의 가슴을 얻으리라." 허나, 그같은 발광이 무슨 소용 있으리. 땀흘려 걷는 이마를 스치는 시원한 한 자락 바람보다 못하다. 크든 작든 우리가 가진 것은 자기만의 미완성 지도일 뿐, 길든 짧든 우리가 걸어온 것은 숲길의 일부일 뿐. 연필과 지도를 거머쥐고 길을 좇으라. 그렇게..마음 먹었었다. 이따금 밤이면 옛 일기들을 뒤적이며 보고 온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과거는 지나가는 것,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게 내버려두라... 나의 지도 한 귀퉁이에 적힌 방향표지 중 하나이지만, 한때 보았던 어여쁜 꽃의 기억은 이제 한때의 아픔이 가신 뒤 그리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밤바람에 세레나데로 실려 꽃의 귓가로 날아가고 싶던 아픈 짝사랑의 기억들도, 차라리 그곳에 선 바위가 되어 영원히 바라보고만 싶던 새 한마리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 한바탕 감미롭고 즐거운 꿈을 꾸다 깨어 버린 듯 아쉽고 우습다. 그러다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다시 들었다. "즐거운가, 여행자여? 하루 세끼의 식사가 감사한가? 그대는 여전히 어리석고 나태하다. 혹 아는가? 이 길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왜 그대는 거기 있는지?" 그 말이 옳다. 알아보아야겠다고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누군가는 이 길은 숲의 한가운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거기는 산 것이 죽은 것을 먹고, 살아있지 않은 유령들이 산 자를 지배하는 곳이었다. 우리도 다른 잡것들과 마찬가지로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화나면 싸웠다. 그러다 문득 그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없는 길을 만들며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앞서 간 자들이 풀잎에 살을 베고 그루터기에 발을 다치며, 때론 서로 돕고 때로 다투며 만들 어놓은 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무기인지 도구인지 모를 커다란 쇠붙이들을 들고 패거리를 지어 다녔다. 그들은 팔다리에 힘을 키우기를 즐기고, 진중한 표정으로 의논을 하고, 패거리에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곤 하였다. 큰 나무를 넘어뜨리고 바위를 옮겨 길을 만드는 것은 대개 이들이 해놓은 것이라 하였지만, 그만큼 다른 여행객들과 싸우고 남들을 넘어뜨리는 것도 잘 하였다. 그들 패거리의 모인 힘은 안에서 보기에는 든든한 힘, 밖에서 보기에 는 무서운 위협이었다. 때로는 패거리끼리 피터지게 싸워 신음소리가 하늘을 채우고 주검이 땅을 덮은 곳도 보았다. 그 모든 것이 길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이 옳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애써 만들어놓은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그들 중 누군가는 매의 눈과 곰의 어깨, 호랑이의 허리를 가진 자들로서 함께 걷노라면 어두운 밤이라도 들짐승이 두렵지 않았고, 울창한 덤불이 앞을 막아도 다치고 죽어가 는 것을 무릅쓰고 길을 뚫고야 말았다. 하지만 때때로 그들 중에 섞여 있는 포악한 협잡배들은 아직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옛날 숲 속, 잡것들과 뒤엉켜 살던 어두운 야만의 동굴에서 금방 걸어나온 것만 같았다. 그들은 술 취해 시비 걸기 잘하고 멀쩡한 사람에게 호통치기 즐겼다.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그래서 넓은 초원에 모여 잘 살았었다고 한다. 그러다 돌림병이 돌았는지 어쨌는지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서로 싸우고 다투다 보니, 애초에 푸르고 밝은 초원이었던 땅에 덤불이 자라고 잡목이 해를 가려 깊은 숲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패거리를 짓기도 하고, 때론 혼자 다니기도 하였다. 다른 여행객들을 돕는 것도 즐겼는데, 그 중에는 즐겁게 돕는 자도 있는가 하면 때로 돕지 않으면 안된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곤경에 처한 여행객이 생기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상한 자도 있었다. 혹은 이 숲을 만든 자와 잘 안다고 하며, 다른 곳에 예전과 같은 초원이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여행객들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들은 숲길을 걸어가면서도 초원의 이야기를 하며, 먼지에 덮인 발을 하고서도 하늘의 빛을 눈에 담고, 새소리 혹은 바람소리 같은 아름다운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었다. 때로는 그들과 더불 어 초원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같이 어울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길을 가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데도 목적하고 있는 곳이 없으며 그저 되는 대로 갈 뿐, 열매를 따먹어야 할 필요가 없다면 굳이 길을 걸어 어딘가로 향해 갈 생각이 없다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들을 떠났다. 그들은 그 꿈꾸는 듯한 눈에 연민의 정을 담고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해 주었다. 나의 마음이 좁고 상상력이 부족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손에 들린 미완성의 지도에 그들의 초원을 그려넣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리석은 마음은 지도에 그려넣을 수 있는 숲속 샛길을 찾는 쪽으로 결정하고 말았었다. 그들의 초원은 어쩌면 그들의 마음 그것 뿐인지도 모를 일, 비록 아름다울지언정 실체 없는 무지개일 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꽃으로 엮은 그들의 움막을 떠나 밤길을 나섰을 때, 숲의 야성적인 독기를 머금은 바람이 다시 나의 감각을 일깨울 때, 눈을 감은 심호흡으로 허파가득 달빛을 받아마시고는 생각하였다. 잠시 아름다운 꿈을 꾸었었다고. 눈을 떴을 달빛아래 예전처럼 좁은 비탈길이 야수와 낭떠러지, 혹은 향기로운 꽃밭일지도 모를 어디인가를 뒤에 숨긴 채 어슴푸레 누워 있었고, 나는 걷기 시작했다. 길에서 여러 여행객을 보았다. 많은 자들은, 이를테면 '그게 어쨌단 말인가'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지도를 들고 삼삼오오 작은 무리를 지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때로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면서, 머무르고 싶어도 갈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몸을 지킬 수 있는 작은 무기 몇도막과 시원찮은 저마다의 지도 한조각 뿐, 빈 손과 작은 짐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무리를 보라. 작고 초라하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자들, 야수나 사나운 자의 패거리를 만나면 하루살이처럼 힘없이 사라지는 자들이며, 언젠가는 이 숲의 어느 구석에서 잠들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 자신의 뒤에 이 길을 걸을 자식들을 생각하는 자들...준 만큼 받는 것이 이들의 법칙이며, 달이 떴을 때는 노래하는 것이 기쁨이었다. 이 숲 속에서, 나의 지도에 채워진 길들은 어디쯤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다. 나무등걸 아래 잠자듯 누워 벌레들과 잡초들의 집이 되고 있는 어느 여행자의 빈 몸을 보라. 나는 그를 알 듯 하다. 숲에서 온 자였든, 하늘에서 왔든, 영을 벗은 그는 땅과 물과 바위와 다르지 않다. 조금만 울고 오래 슬퍼하지 말 것. 흙바닥을 춤추듯 뛰던 그의 발도, 사랑을 속삭이던 입술도, 그저 넓고 포근하던 넓은 가슴도 벗어두고 이제 바람이 되어 햇살 속으로 녹아들어 가노라.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일, 살아 숨쉴 때 사랑하고 슬퍼하며 한 숨 한 숨 귀하게 하라고 저기 누워 있는 그는 부드럽게 일러준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종말은 다가올지 모른다. 이번 여행길은 아름다웠던가. 천상병 시인처럼 한 세상 소풍, 즐거웠노라고 노래하며 하늘로 돌아갈 때 오랜 동반자였던 나의 지도는 호주머니에서 해방되어 바람이나 혹은 물살을 타고 제 갈길을 가리. 이제는 지도를 버려야 하겠다. 지나온 길들로는 다시 가지 않을 일, 애시당초 길을 그려본댔자 소용없는 짓인데 왜 그리도 꼭꼭 챙겨들고 다녔던가. 이 숲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왜 남들에게 꼬치꼬치 물어보았던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감싸가며 꼼꼼히 길을 그리고 주석을 달고 방향표지를 써 넣던 일이 그리 소중하였던가. 아침의 햇살 한모금보다 못하다. 어리석게도 말이 많았다. 눈을 떠 밤하늘을 보니 낮은 먹구름이 그믐달을 가리고 유성이 진다. 오늘 잠들어 내일 깨어나지 못할 지라도 아름다운 것 하나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