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더 푸르고 장미는 더 붉다
|
| |
|
|
| |
| |
| |
나무는 더 푸르고 장미는 더 붉다※
-김 종인 시집 『나무들의 사랑』(도서출판 문예미학사)
이 교 상
작금 우리들은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다. 정치와 경제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걸쳐 먹구름이 가득하다. 지구는 끝없이 악의 구렁텅이로 치닫고, 제국주의자들은 그럴듯한 여러 가지 명분을 내세우며 세계의 질서를 마구 어지럽히고 있다. 그리고 노동시장 구조가 바뀌고, 구조조정이 지속되고, 새로운 산업기술이 나타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잠시 한 눈을 팔면 이내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사람들은 늘 불안 초초하고, 종국적으로 우리의 경제적 여건이 나아질 것이란 그 분홍빛 전망들은 이제 말발이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성장제일주의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낳았는가에 대해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그 한 복판에서 호된 홍역을 치루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정신을 차리고 그것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1.
시란 무엇인가? 누가 지금 이 물음을 던진다면 나는 명쾌한 답을 줄 수가 없다. 부디 아무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답을 오늘 여기 김 종인의 시에서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김 종인의 제4시집 <나무들의 사랑>은 모두 4부 76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압해도>와, 제4부 <희망을 갖는다는 것>에서는 들뜨기 쉽고 흔들리기 쉬운 감성들이 여기저기 바람으로 흩어졌다 다시 빛으로 모여 한 곳으로 흐르고 있다. 어떤 날은 슬픔을 안고 저 먼 기억 속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섬의 억새풀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한다.
ꡒ돌부처도 싫으면 등을 돌린다는데 / 강물처럼 넘쳐 흐를 그 날은 언제이리 / 칠선에 실려 내 사랑 가네 / 아름다운 그대를 섬에다 묻고 / 우리는 살아서 지리산을 넘었네ꡓ
-「압해도」4연
ꡒ아픈 사랑의 기억이여, / 하루에도 몇 번씩 / 저 강 건너 남해 금산 가는 길 / 남해 금산만 가면 잊혀질까 / 상주 해수욕장 세모래밭에서 바라보면 / 골산은 성큼성큼 다가서는데, / 아픈 사랑일수록 더욱 / 그리운 남해 금산,ꡓ
-「남해 금산」2연
ꡒ추울수록 밤하늘 별은 빛난다 /살아서 휘익 사라지는 / 유성 하나, / 마음 속 생살을 그어 / 별 하나 뜨는데 / 무시로, / 하염없이 흔들리는 / 억새풀 저 마른 손짓!ꡓ
-「억새풀 저 마른 손짓」5연
등에서 보듯이 시인은 무겁고 아픈 상처들을 솔직하게 현실 속 꽃으로 피워내고 있다. 때로는 절박하고, 때로는 회한에 휩싸여 바라보기도 한다.
시는 그 사람의 표정이다. 그것은 사상과 마음과 몸이 그 속에 알게 모르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잔잔한 물빛으로 다가와 마음을 흔들기도 하고, 또 바람이 되어 하늘에 구름들을 멀리 흘려보내기도 한다. 시인은 말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란 말에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김 종인은 이 복잡한 세계를 현학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는 말의 뼈 위에 정직과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는 시인이다.
2.
제2부 <객토를 하며>에는 피폐해진 우리 농촌 현실에 대한 눈빛이 쓸쓸하게 혹은, 아프게 박혀 있다. 끝없이 물밀어 오는 저 비정하고 거친 농산물 개방의 바람 앞에서 속수무책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는 농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다. 비교우위론 자들의 경제논리가 대세를 이룬 마당에, 그냥 묵묵히 흙에 마음을 묻고 살아온 농민들의 가슴에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ꡒ선산 아래 흑단 같은 산밭 / 돌아보면 찌르르 눈물같이 하얀 / 개망초ꡓ(「개망초 고향」2연)가 피고, ꡒ무너진 집 울안, / 버려진 운동장 곳곳, / 마름버짐 피어나듯 피는 망초꽃 / 가라지와 달개비와 바래기 함께 / 꿈도 희망도 없이 번져ꡓ(「개망초 고향」4연) 끝없이 목을 옥죄이는 것이다. 그래서 ꡒ삭아 무너지는 묵정밭 고향ꡓ(「개망초 고향」5연)에 대해 절규하는 것이다.
전망 없는 미래는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다. 김 종인은 그러한 현실을 절박하게 바라본다.
ꡒ해마다 봄이 오면 허기져 넘던 고개ꡓ(「보릿고개의 기억」1연)를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그 보릿고개가 ꡒ지금도 아득한 고개ꡓ(「보릿고개의 기억」2연)로 남아 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현실인가. ꡒ바라보면 아득한 고향 / 빈집만 하나 둘 늘어ꡓ(「보릿고개의 기억」3연)가는 농촌을 보며 ꡒ황량한 초겨울 들판에서 붙은 / 성난 들불에 분신하는 문전옥답! / 애타는 추곡수매장에서 / 술국으로 빈속을 채워도 / 가슴마다 번지는 들불ꡓ(「추곡수매장」4연)이 되고픈 시인. ꡒ농민대회 날 핏국에 대파 넣어 푹푹 끓인 / 술국에 힘 얻고 돌아가는ꡓ(「장바우 대파」4연)
그 한정 없이 순한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나라 농촌에서 태어난 시인이 가져야 할 당연한 심성이고, 또 눈빛이 아니겠는가. 쓸쓸하고, 어둡고, 춥고, 외로움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모습일 것이다. 여기서 무슨 시적 논의가 필요할 것인가? 저 밤하늘에 반짝이는 것은 눈물도 아득한 꿈도 아니고, 별빛으로 빛나는 이 땅의 참 맑은 시인들인 것이다. 그래서 늘 깨어있는 시인은 결코 어둠에 굴복하지 않고, 그 위에 다시 아침을 불러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 이 시편들에 주목한다.
새터 모래 논에 참흙을 넣는다
알맹이끼리 어울려 떼알무리 되어
물스밈도 좋아지고 자람새도 좋아
화학 비료만으로 높은 수량 내는 것은
땅힘의 수탈 위에 피는
한철뿐인 꽃이라고
아아, 헛되이 살아온 세월
활활 벗어던지고
참알갱이끼리 어울리는 떼알무리 되리
벼이삭 알차게 하는 참흙
가을을 위하여 그대여
황량한 겨울 들판에 흙을 넣는다
-「다시 객토를 하며」 전문
3.
제4부 <나무들의 사랑>은 그 동안 김 종인 시인이 끝없이 추구해 온 정신의 궤적이 오롯이 담겨 있다. 현실속의 여러 가지 비리와 모순과 불합리, 그리고 오만불손하기까지 하는 저 제국주의자들에게 대한민국 소도시에 사는 한 시인이 던지는 선전포고다. 결코 그런 것들에 대해 외면하지 못하는 그의 고집은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고집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것은 그의 성격이 모나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것이 또 삶의 진정성으로 표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하늘에 단순한 별이 아니고, 이 땅에 그냥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없는 까닭인 것이다. 시인이 단순하게 말을 가지고 놀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고, 더욱 크게 눈을 뜨고 바라본 현실의 몸 위에 마음과 정신의 푸른빛을 놓을 때 비로소 별이 되고 꽃으로 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ꡒ안으로 충만한 에너지가 /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그 순간, / 그 황홀한 시간의 한가운데서 / 오로지 꽃은 피는 것!ꡓ (「꽃이 피다」의 2연)이고, ꡒ사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는, /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미워하는 것도 아닌, / 중간에서 일어나는 초월이 개화다.ꡓ(「꽃이 피다」의 4연)라고 그는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그 날카로운 현실 인식에서 오는 그의 자신감은 ꡒ탱크가 가는 모래바람ꡓ(「바그다드로 가는 길」1연)도, ꡒ가장 잔인한 살육으로 가는 길ꡓ(「바그다드로 가는 길」2연)도 모두 흔적 없이 지울 것이다. 그러나 김 종인은 외로운 시인이다. <낮달>을 보면서 사랑을 기억하기도 하고, 저 강물 너머 불어오는 바람 앞에서 혼자 깊이 회상에 잠기기도 한다. 그래서 ꡒ독한 술 한 잔, / 가슴에 붓고 싶은 날이ꡓ(「독한 술 한 잔」1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 종인은 분명한 길을 감지하고 있다. 그 끝이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이번 제4시집 <나무들의 사랑>에서 말하고 있다.
어떤 과학자는 나무가 인간의 행위뿐 아니라
사고까지 감지해 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는,
계측기를 나무에 부착하고
이 나무를 잘라 버릴까! 생각하자,
계측기의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략)
나무는 나무끼리 느끼고, 사랑하고, 감정을 나누는데,
그대만이 눈이 멀고, 귀가 먹고, 가슴은 닫혀 있다.
나무들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산들바람,
스스로 깊어지면서 바다로 흐르는 강물,
바위를 어루만지며 속삭이는 구름.
-「나무들의 사랑」부분
4.
김 종인은 늘 공부하는 시인이다. 그리고 길이 아닌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은 곧 아무리 어렵고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가야할 길이라면 분명히 간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그 동안 김 종인 시인을 곁에서 바라본 바로는 그는 고집이 있다. 그러나 그 고집은 너무나 합당하기에 아무도 그에게 딴죽을 걸지 않는다. 그는 황소처럼 묵묵히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기에. 내가 김 종인을 다 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진실의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김 종인의 힘이고, 그 힘이 현실 속에서 바람과 빛과, 그리고 몸과 마음과 정신이 한데 어우러져 꽃을 피울 때, 그의 시는 더욱 빛나게 완성될 것이다. 모두 다 아는 바지만, 김 종인은 저 암울한 시대를 정면으로 걸어온 시인이다. 서슬이 퍼렇던 당시의 억압적 시대사황과 맞서며 오는 동안 그의 고집은 더욱 견고해 졌으리라. 그러나 그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서정이 고집을 끌어안을 때 아니, 그 고집이 서정성을 따듯하게 보듬어 안을 때, 김 종인은 더욱 큰 느티나무로 우리들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 제목에서 떠 옴
<포항문학> 2004년 통권 24호
|
|
| |
|
|
|
|
|
|
